궁능의 옛 나무들
1. 궁궐의 나무
도선국사 이후 풍수지리 사상은 우리 사회의 기본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조선왕조의 궁궐을 짓는데도 흔히 말하는 ‘명당 찾기’에서 크게 벗어날 수는 없었겠죠. 궁궐을 지을 좋은 택지가 어떤 조건인지 건설을 담당한 사람들은 끝없이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왼쪽에 물이 있고 오른 쪽에 길이 있으며 앞에는 못이 있고 뒤에는 언덕이 있다’면 그림 같은 집을 지를 장소로 모자람이 없습니다. 청룡(靑龍)과 백호(白虎), 주작(朱雀)과 현무(玄武)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완벽한 조건을 갖춘 곳이란 쉽지 않겠지요. 당연히 명당으로서의 조건에는 조금 모자라더라도 보완을 뜻하는 비보(裨補)를 해줄 수 있으면 명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비보의 실제 방법은 나무를 심어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조선의 궁궐을 만든 사람들은 이런 명당 사상을 기본으로 하나 더 첨가되는 원칙이 있었답니다. 우리와 함께하는 조경은 자연 순화의 개념이죠. 일본이나 중국처럼 철저히 인위적이거나 자연을 압도하는 거창함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단순하고 소박하면서도 결코 초라하지 않게 건물과 어울림을 한껏 높인 것이 특징이죠.
아울러서 지켜지는 또 하나의 원칙이 있었습니다. 집안에는 될 수 있는 대로 나무를 심지 않은 것입니다. 이는 3가지의 이유가 있답니다. 첫째는 임금의 안전을 위함이죠. 나무는 임금을 해치려는 자객이 숨을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집안에 나무를 심어면 곤(困)이 되어 왕실이 어려움이 오고, 대문 안으로 심으면 한(閑)이 되어 왕가가 한미해진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세 번째로는 혹시 집안에 나무를 심더라도 지붕높이 보다 더 자라는 것을 꺼렸답니다. 집의 정기를 나무가 빼앗아 간다고 생각한 탓이었죠.
궁궐 나무 심기의 개략은 주례(周禮)라는 중국의 옛 책을 기준으로 삼은 것으로 보입니다. 궁궐의 외조(外朝)는 왕이 삼공(三公)과 고경대부 및 여러 관료와 귀족들을 만나는 장소로서 이 중 삼공의 자리에는 회화나무를 심어 앉을 자리 표지로 삼았다는 군요. 창덕궁 돈화문을 들어서면 바로 외쪽에 3그루의 회화나무를 심은 것이 그 예입니다. 경복궁에도 마찬가지로 회화나무를 심었을 것이나 남아있지 않을 뿐입니다. 궁궐의 나무를 심고 가꾸는 전담기관이 필요하였겠지요. 처음 장원서(掌苑署)로 출발하여 상림원(上林園)로 바뀌었다가 다시 장원서란 이름으로 궁궐의 꽃과 과일나무에서 새와 짐승까지 관리하였습니다.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으로 이용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후 거의 270년을 방치하였다가 고종 때인 1865년에 다시 중건하기에 이르죠. 태조가 처음 경복궁을 건설할 때 어떤 나무를 어디다 심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는 물론 없습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과 몇 문헌에서 조금씩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북악산과 연결된 구릉지의 끝자락인 궁궐 안에는 소나무가 본래부터 많이 자랐을 터이고 자연 그대로를 살리는 우리 조경의 특성상 소나무가 궁궐나무의 주축이 되었을 것입니다. 다음은 뽕나무를 빠트릴 수 없다. 농상(農桑)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은 조선왕조는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는 친잠례의 시범을 보이기 위하여 궁궐 안에도 수많은 뽕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세종5년의 기록에는 경복궁에 뽕나무가 3,590그루 있었다고 하니, 경복궁이 오늘날 청와대 땅까지 궁의 일부였음을 감안하더라도 한때는 거의 뽕나무 밭 수준이 아니었나 짐작됩니다.
기타 태조의 활솜씨 자랑에 흔히 등장하는 배나무와 버드나무도 비교적 많았을 것 같습니다. 그 외 침엽수로는 잣나무, 전나무, 주목, 향나무, 활엽수로는 느티나무, 회화나무, 오동나무, 참나무, 음나무, 단풍나무 등이 여기저기 자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꽃나무로서는 매화, 모란, 진달래, 철쭉, 개나리가 있었을 터이며 과일나무로는 복숭아나무, 앵두나무, 개암나무, 대추나무, 자두나무, 살구나무가 자랐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나무만도 30여종에 이릅니다.
임진왜란 이후 궁궐이 방치되는 동안은 거의 소나무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이는 18세기 중엽에 그려진 정선(鄭敾, 1676~1759)의 그림에서도 확인됩니다. 경복궁이 중건된 이후 조선고적보를 비롯한 일제초기의 자료를 보면 20세기 초까지 경회루와 영추문 사이에는 소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 능수버들이 숲을 만들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태전 뒤쪽의 아미산의 굴뚝 옆 벽에는 소나무와 매란국죽 등의 식물과 용, 호랑이와 같은 동물이 새겨져 있습니다. 아미산과 향원지 등에도 여러 종류의 활엽수가 자라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답니다. 그러나 경복궁은 다시 일제의 손으로 철저히 파괴 과정을 밟으면서 또 다시 망가집니다. 오늘날 청와대 자리는 경복궁의 후원으로서 굵은 주목과 지름이 1m나 되는 회화나무 몇 그루가 남아 있습니다.
2003년 경복궁 관리사무소에서 조사한 내용을 보면 경복궁 안에는 큰 나무가 76종 2,631그루, 작은 관목이 39종 4,081종에 이른다. 이중에 115년 된 느티나무가 가장 오래된 나무이며 그 외 은행나무, 회화나무, 가중나무, 쉬나무, 버드나무, 상수리나무, 말채나무, 뽕나무 등의 굵은 나무 몇 그루가 궁궐로서 명맥을 이어줄 뿐입니다.
창덕궁은 처음 별궁(別宮)으로 쓰이다가 임진왜란이후 나라가 망하는 1910년까지 조선의 정궁(正宮)으로 쓰였습니다. 성종 15년(1484)에 준공한 창경궁은 창덕궁과 함께 조선왕조의 중후기 실제 궁궐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합쳐서 동궐(東闕)이라고 하는데, 19세기 초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라는 상세한 궁궐그림이 남아 있어서 비교적 상세히 어떤 나무가 자라고 있었지를 알 수 있습니다.
동궐도에서 나무 종류를 분석한 자료를 보면 소나무가 559, 향나무 등 기타 침엽수가 36, 활엽수 큰 나무가 1,620, 키 작은 관목이 600그루로서 전체 나무의 숫자는 2,815그루입니다. 소나무가 20%를 점유하고 있으며 실제 동궐도에서도 전체적인 느낌은 솔밭에 가까울 만큼 소나무가 많죠. 소나무 사이사이에 갓 잎이 피기 시작하여 길게 늘어진 버들이 유난히 눈에 띄고 분홍 꽃이 만개한 복숭아나무와 진달래로 짐작되는 작은 꽃나무가 궁궐의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답니다. 그 외 침엽수로는 잣나무, 전나무, 주목, 향나무, 활엽수로는 뽕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 참나무, 엄나무, 단풍나무 등이 여기저기 자라고 있었다. 꽃나무와 과일나무로서는 매화, 모란, 배나무, 앵두나무, 개암나무, 대추나무, 자두나무, 살구나무, 밤나무 등이 있었을 터이나 동궐도 그림만으로 명확히 구분해 내기는 어렵습니다.
창덕궁 후원은 소나무가 주류를 이루고 사이사이에 느티나무나 참나무와 같은 활엽수를 심고 밑에는 꽃나무를 가꾼 형태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후원은 소나무가 거의 없어지고 참나무와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여러 활엽수가 들어선 숲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후 혼란기를 거치는 동안 인위적으로 관리하여야하는 솔숲을 방치한 탓으로 생존경쟁에서 소나무가 도태되었기 때문이랍니다.
오늘날 창덕궁의 노거수는 느티나무 32, 회화나무 15, 주목 10, 은행나무와 측백나무 및 밤나무가 각각 2, 갈참나무, 굴참나무, 매화, 다래가 각각 1그루로서 모두 70그루에 이릅니다. 이중에서 700년 된 향나무(194호), 600년 된 다래나무(251호), 400년 된 뽕나무(471호), 돈화문 안쪽의 300~400여년 된 회화나무(472호)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한편 창경궁은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서의 수많은 역사의 부침을 그대로 이어 왔으나 1909년 일제에 의하여 거의 완전하게 파괴됩니다. 궁궐 안의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놀이터로서 변모시켰습니다. 1984년에 들어서야 옛 건물을 새로 짓고 나무를 심는 등 궁궐 복원사업이 시작되었다. 창경궁 나무의 가장 큰 변화는 일제가 심어둔 벚나무의 제거였습니다. 그 자리에 새로운 나무가 들어오면서 중부지방에 자라는 주요 나무는 대부분 조경수 심겨졌답니다. 현재 57,000여 그루의 나무가 자라며 종류로는 168종에 이릅니다. 소나무가 1,490그루로 가장 많으며 다음이 단풍나무 981그루입니다. 11월의 중순 창경궁 단풍이 가장 곱게 물들 때 궁궐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느티나무 311그루, 때죽나무 233그루, 귀룽나무 155그루로 이어집니다.
경운궁은 처음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사저이었지만 임진왜란 이후 창덕궁을 복원하는 동안 잠시 궁궐로 쓰입니다. 이후 고종 말년인 1897년 임금이 이사를 와 1911년까지 여기에 거처하면서 궁으로의 모습을 갖추게 되죠. 그러나 1904년에 큰 화재를 만나 건물은 물론 대부분의 나무도 없어져 버립니다. 영국대사관 쪽 북편 담 안쪽의 회화나무 등 몇 나무가 2~300년 된 노거수로 명맥을 이어갈 뿐입니다. 석조관 옆 후문 앞에는 1913년 네덜란드 공사가 고종에게 선물하여 심은 마로니에가 자라고 있으며 나머지는 대부분 최근에 심은 나무들입니다.
종묘 역시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버렸다가 광해군 때인 1608년에 중건하였습니다. 조성당시에는 소나무가 정전과 영녕전을 둘러싸고 있었음을 태조실록 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소나무가 거의 없어지고 잣나무와 아름드리 갈참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최근 조사자료를 보면 종묘는 면적 194,331㎡에 불과하지만 심겨진 나무의 종류는 90여 종에 7,757그루에 이릅니다. 가장 많은 나무는 때죽나무 2,331그루, 잣나무 1,655그루, 갈참나무 802그루 순입니다. 그러나 지름 30cm이상의 굵은 나무는 대부분 갈참나무가 차지합니다. 소나무는 건물의 앞부분과 향대청 뒤편 숲 속에 심겨진 것으로서 숫자가 109그루에 불과하죠.
2. 왕릉의 나무
조선왕조의 왕릉은 실제로 등극한 27대 임금과 죽은 후 이름만 올린 임금 및 왕비를 포함하여 44기에 이릅니다. 이들 중 북한에 2기, 강원도 영월에 단종능인 장릉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서울시내와 경기도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왕릉이 넓은 숲을 포함하고 있어서 수도권의 허파로서 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답니다.
왕릉의 개략적인 구조를 보면 남향의 구릉지에 뒤로 제법 큰 산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주산과 좌우를 둘러싸는 청룡과 백호에 해당하는 작은 능선이 있으며 앞에는 안산(案山)을 두고 사이에는 개울이 있는 형태입니다. 능의 입구에 자리 잡은 홍살문을 지나면 정자각과 마주하고 바닥에는 얇은 돌을 깐 보도가 있으며 좌우에는 제사 준비를 위한 작은 건물이 몇 채 있기도 합니다. 봉분과의 사이에는 문인석을 비롯한 여러 석조상이 있고, 봉분 주위에는 곡장(曲墻)이라는 나지막한 담으로 둘러싸고 있죠. 이렇게 홍살문에서 곡장에 이르는 넓은 왕릉의 앞마당은 나무를 심지 않고 잔디를 깐 상태로 남겨 놓았습니다.
능의 둘레에 나무를 심기 시작한 역사는 오래 되었으며, 삼국사기에 고구려 9대 임금 고국천왕 능에 소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처음입니다. 중국의 경우 예기(禮記)에 천자는 소나무, 제후는 측백나무, 대부는 밤나무, 선비는 회화나무를 심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원칙을 그대로 받아드리지는 않았으나 왕릉의 주변만은 거의 소나무를 심었습니다. 사실 소나무 단일 수종 심기는 송충이의 발생과 다른 병충해에 약하고 관리에 어려움이 있어서 그렇게 바람직하지는 않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왕릉에 주로 소나무를 심은 이유는 중국의 예를 따른 것도 있겠지만 그 외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첫째 소나무는 왕릉이 있는 구릉지의 건조한 땅에도 잘 자라며 나무의 가지 뻗음이 아름답고 뿌리도 깊이 들어가 바람에 잘 넘어지지 않습니다. 둘째 소나무는 늘 푸른 나무로 변치 않은 절개를 상징하고 십장생의 하나로 여길 만큼 오래 삽니다. 또 소나무는 햇빛을 좋아하는 양(陽)의 나무이므로 능 주위의 음(陰)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소나무는 집짓는 나무에서 선박재, 각종 생활용구, 황장목이란 이름으로 임금님의 관재까지 쓰임새가 많은 귀한 나무로 생각했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적어도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조선 왕릉이지만, 자라는 소나무의 나이는 4~50년 남짓합니다. 조선후기로 오면서 능의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도 있고, 그나마 남아있던 아름드리 소나무들은 일제강점기 수탈되었으며 해방 전후의 혼란기에도 제대로 소나무가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능에는 대부분 소나무를 심었습니다만 조금씩 다른 수종도 섞어 심기를 했습니다. 침엽수로는 소나무외에 잣나무와 전나무가 흔히 들어갔습니다. 태종 8년(1407) 왕은 태조의 왕릉을 둘러보고 ‘능침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없는 것은 법도가 아니니 두루 심어라’고 했답니다. 또 잣나무는 어느 능에서나 소나무와 조금씩 섞여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나무는 세조의 능침인 광릉에서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광릉지(光陵誌)에는 서쪽으로는 동구부터 십리 길에 여러 종류의 전나무와 잣나무를 심었고, 동쪽으로는 동구부터 오리정도 전나무와 진달래를 서로 섞어 심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광릉으로 올라가는 길은 물론 광릉수목원 앞 도로에 도열하고 있는 아름드리 전나무가 능을 만들 때 일부러 심은 것임을 알 수 있는 자료입니다. 그 외 전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정조실록에 2번씩이나 나옵니다.
왕릉의 침엽수로는 소나무와 잣나무 및 전나무가 거의 전부이고 다른 침엽수는 거의 심지 않았습니다. 다만 제실에는 가끔 향나무를 몇 그루 심은 경우가 있어 제사에 향 피우는 재료로 쓴 것으로 짐작됩니다. 예외적으로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고종과 순종의 능침인 융건릉에는 능입구에 독일가문비나무와 서양측백나무가 들어서 있습니다. 중국의 왕릉과는 달리 우리의 왕릉에는 측백나무가 심겨진 예를 찾을 수 없습니다. 아마 측백나무는 빗자루처럼 삐쭉하게 자라 소나무에서 느끼는 안정감이 적은 탓으로 짐작됩니다.
왕릉은 소나무와 같이 햇빛을 좋아하는 나무로 유지하려면 철저한 관리가 필요합니다. 조금만 숲의 관리를 소홀히 하여 참나무를 비롯한 다른 나무들이 자라게 되면 경쟁에서 밀려버립니다. 능을 참나무로 가꾸면 소나무보다 훨씬 손을 덜 봐주어도 좋은 숲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영조 45년 예조판서는 숙종의 계비 능인 명릉과 익릉(서오릉)에 사태가 많이 나니 아예 잡목(참나무)을 심자고 했답니다. 또 정조 25년 태종의 능침인 헌릉 주봉 동쪽 뒷 기슭에 도토리 4백말을 뿌렸다는 군요. 우리나라 숲은 자연 상태 그대로 두면 참나무 숲이 되고, 이렇게 심기도 했으므로 오늘날 우리 왕릉에는 소나무 다음으로 참나무가 많습니다. 어느 왕릉을 막론하고 지대가 낮고 땅 힘이 비교적 좋은 곳에는 대체로 갈참나무가 자랍니다. 종묘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왕릉에서 갈참나무와 만날 수 있어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일부러 갈참나무를 골라 심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숲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양지바른 남쪽 경사면에는 굴참나무나 상수리나무가 자라고 산의 능선부분에는 신갈나무가 차지합니다. 정조의 능침인 수원의 건릉 앞, 지대가 낮은 곳에는 상수리나무 숲이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곳의 지형적인 위치는 갈참나무가 자랄 곳이므로 이곳 상수리나무는 일부러 심은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은 지름 한 뼘 남짓한 어린 나무가 대부분이지만 일제강점기에만 하여도 아름드리로 꽉 차 있었다는군요.
다음은 왕릉에 오리나무가 빠지지 않습니다. 능은 대체로 약간 지대가 높은 구릉지에 조성되며 앞으로 작은 냇물이 흐르는 곳이 있게 마련이죠. 지대가 낮아 습기가 많은 이런 곳에 잘 자라는 나무로서 오리나무를 가장 널리 심은 것으로 보입니다. 거의 모든 왕릉은 입구에서 오리나무를 만날 수 있으며, 특히 선정릉과 헌인릉에는 아름드리 오리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서 장관입니다. 버드나무도 흔히 만날 수 있으며 특히 선릉의 비각 뒤쪽에는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또 무덤에는 소나무와 함께 가래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사도세자 능인 건릉 앞에는 여러 그루의 아름드리 가래나무를 만날 수 있답니다. 그 외 밤나무와 뽕나무 등도 비교적 흔히 왕릉에서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한편 왕릉에는 화려한 꽃이 피는 나무는 심지 않았지만, 단정하고 깔끔한 꽃이 피는 작은 나무 진달래는 흔히 심었다고 합니다. 광릉의 조성경위를 설명한 광릉지에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대체로 오늘날 왕릉에는 선조들이 일부러 심고 가꾼 나무들 이외에도 자연스럽게 자라는 수백 종의 나무가 있습니다. 왕릉 관람로를 따라 느티나무, 서어나무, 팥배나무, 때죽나무 등이 흔히 만날 수 있는 대표적인 나무들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혼란기에 수입나무인 리기다소나무와 아까시나무가 심겨져 있는 현실입니다. 한꺼번에 제거하면 많은 문제가 생기므로 문화재청에서는 연차적으로 이런 나무들을 베어내고 있으니 몇 년 후면 왕릉은 모두 우리의 나무로 복원될 것으로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