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우리나무
한반도에 자라는 우리나무는 약 1,000여종이 된다. 그중에서 옛사람들과 가까이서 직접적으로 삶의 애환을 함께한 나무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및 각종 농서(農書)에 등장하는 나무들을 합치면 백여 종 남짓하다. 물론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글을 아는 선비들의 눈으로 본 나무들이다. 책상물림으로 한문 배우기로 평생을 보낸 사람들이라 실제로 나무와 접촉할 기회가 적고 그 나마 중국 문헌에 나오는 중국나무에 치우친 탓에 부정확한 나무 기록이 많다. 실제로 나무를 잘 아는 백성들은 배우지 못한 탓에 기록으로 남길 수는 없었다. 전설이나 나무이름 속에서 나무와 사람이 어울려 살아온 흔적의 한 자락을 엿볼 수 있을 따름이다.
이하 기록으로 남아있는 우리의 역사서에 나타나는 나무를 중심으로 쓰임새, 권력과의 관련성, 사랑에 얽힌 이야기들을 알아본다. 아울러서 흔히 알고 있는 나무 상식의 잘못을 찾아보고자 한다.
우리나무
외국나무의 개념을 확대 해석하면 수천 년 전 중국에서 들어온 은행나무까지 포함시킬 수 있으나, 흔히 말하는 <우리나무>는 일제강점기 이후로 서양과 일본을 통하여 들어온 나무로 정의 할 수 있다.
중국에서 들어온 나무(33)
가죽나무, 개오동, 남천, 능소화, 당매자나무, 두충나무, 대나무, 매화나무, 모과나무, 모란, 명자꽃, 무궁화, 무환자나무, 배롱나무, 백목련, 박태기나무, 백송, 벽오동, 복사나무, 비파나무, 산수유, 살구나무, 석류, 앵두나무, 위성류, 은행나무, 자두나무, 중국굴피나무, 중국단풍나무, 차나무, 치자나무, 호두나무, 회화나무
일본에서 들어온 나무(18)
금송, 계수나무, 나한백, 나한송, 낙상홍, 낙엽송, 사방오리나무, 삼나무, 삼지닥나무, 영산홍, 유동, 일본목련(후박나무), 일본전나무, 풍년화, 편백, 홍가시나무, 홍자단, 화백
서양에서 들어온 나무(26)
꽃개오동, 꽃사과나무, 낙우송, 네군도단풍, 독일가문비, 리기다소나무, (메타세쿼이아), 무화과, 미루나무, 방크스소나무, 버즘나무(플라타너스), 서양측백, 라이락, 스트로브잣나무, 아까시나무, 연필향나무, 양버들, 은단풍, 은백양, 장미, 족제비싸리, 태산목, 튤립나무, 피라칸다, 협죽도, 히말라야시다.
우리의 옛 문헌에 나타나는 나무들
우리의 옛 문헌에는 많은 나무가 등장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및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시가집인 동국이상국집 등에는 수십종의 나무가 등장하고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과도 관련이 있다. 조선왕조에 들어오면서는 의서, 농서에 나무가 나타나고 조선후기에 실학사상이 들어오면서는 더욱 많아진다.
이들 중 가장 기록이 방대하고 많은 나무가 등장하는 조선왕조실록에서 발췌한 나무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가래나무, 가죽나무, 금강자(모감주나무), 감나무, 개나리, 개암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 금은화(인동덩굴), 느릅나무, 닥나무, 담쟁이덩굴, 대추나무, 등나무, 매화나무, 모과나무, 박달나무, 배나무, 버드나무, 벚나무, 보리수, 뽕나무, 살구나무, 상산(조팝나무), 싸리나무, 수청목(물푸레나무), 앵두나무, 영산홍, 오동나무, 오얏(자두나무), 은행나무, 자단(향나무), 자작나무, 참나무, 철쭉, 측백나무, 피나무, 해당화, 호두나무, 황벽나무, 황양목(회양목)-42종
가목(價木), 가서목(가시나무), 귤, 칡, 겨우살이, 계수나무, 금등화(능소화), 노간주나무, 능금, 단목(丹木), 단향(檀香), 동백나무, 두충나무, 목통(으아리), 백양나무(사시나무), 백단(白檀), 비자나무, 복분자딸기, 산매자나무, 산유자나무, 석류, 소목(蘇木), 신나무, 오미자나무, 옻나무, 이년목(二年木), 유자나무, 위령선, 장미, 정향나무, 칡, 탱자나무, 화리, 황칠나무, 후박나무, 흑목(黑木)-36종
나무의 쓰임새로 본 우리나무
1. 횃불로 쓰인 싸리나무와 쉬나무
요즈음 TV연속 역사극에서 보면 기름 솜뭉치로 어둠을 밝히는 장면을 흔히 본다. 그러나 석유가 나오기 전에는 등유로 쓸 기름은 쉬나무, 들깨, 아주까리, 관솔밖에 없다.
기록으로 보면, 성종이 죽자 연산 원년(1495) 장례 절차를 논의하는 과정에 한치형 등이 아뢰기를,“발인할 때에, 도성에서 전곶(箭串, 지금의 서울 화양동)까지는 사재감(司宰監)에서 싸리 횃불을 장만해 노비에게 들리게 하고, 전곶부터 능소(陵所, 지금의 서울 삼성동의 선정릉)까지는 경기·충청·강원도에서 싸리 횃불을 준비해 군인들에게 들리게 해야 할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따라서 횃불의 재료로는 싸리나무가 가장 널리 쓰인 것으로 보인다.
2. 제물(祭物)로는 개암, 앵두, 살구
지금은 우리가 거의 제사에 쓰이지 않은 과일이 옛 과일로 쓰였다. 《고려사》의 '길례대사'에 보면, "제사를 지낼 때 제2열에는 개암을 앞에 놓고 대추, 흰떡, 검정 떡의 차례로 놓는다"하였으며, 조선왕조에 들어와 세종, 세조, 연산군 때까지는 밤과 함께 제수의 필수품으로 쓰였고 세금으로도 거둬들였다. 이후 인조 4년(1626) 때까지 조선왕조실록에 총 117건의 개암나무에 관한 기록이 있다.
또 《고려사》의 '길례대사'를 보면, "4월 보름에는 보리와 앵두를 드린다"고 하였으며 태종 11년(1411) 임금이 말하기를 "종묘에 앵두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 의례의 본보기로서 반드시 5월 초하루와 보름 제사에 올리게 되어 있다. 흔히 보는 과일 중에는 가장 먼저 익고 맛 또한 달콤하여 조상에 바치는 과일로서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3. 껍질은 군수물자, 나무는 경판으로 쓰이는 벚나무
몇 년 전만 하여도 진해 군항제 벚꽃놀이가 전부이었으나 지금은 거의 전국이 벚꽃놀이에 들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선조들은 벚나무를 꽃으로 감상한 적은 없다. 다만 나무로서 이용하였을 따름이다. 껍질은 오래 전부터 화피(樺皮)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활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군수 물자였다. 《세종실록》의 '오례'에 관한 내용 중에 "붉은 칠을 한 활은 동궁이라 하고, 검은 칠을 한 것은 노궁이라 하는데 화피를 바른다" 했고, 이순신의 《난중일기》 갑오년(1594) 2월 5일자에도 "화피 89장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목재는 글자를 새기는 목판(木板) 인쇄의 재료로서 독보적인 존재다. 팔만대장경판은 60% 이상이 산벚나무이었다. 지금까지 자작나무로 알려진 것은, 옛사람들은 벚나무도 자작나무도 같은 화(樺)자를 썼기 때문이다.
4. 회양목과 인쇄문화
오늘날 정원의 가장자리에 여러 모양으로 전정하여 가꾸는 작은 나무 회양목은 사실은 우리의 인쇄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선조 36년(1603) 춘추관에서 실록 판각에 쓸 주자가 부식되어 흠이 많으므로 새겨서 보충하려는데, 황양목이 매우 부족하므로 많이 나는 황해도, 평안도, 강원도 등에서 각각 큰 것으로 40주씩 벌채하여 올려 보내도록 하였다는 기록과 정조 20년(1796)에는 정리주자(整理鑄字)을 완성하고 임금에게 보고하는 내용 중에, "임자년에 황양목을 사용하여 크고 작은 글자 32만여 자를 새기어 생생자(生生字)라고 이름했다"는 기록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사기에도 용도는 적혀있지 않으나 인쇄문화와 관련이 된 것으로 추정되는 회양목이 등장한다.
회양목은 구성하는 세포 중 물관과 섬유의 차이가 거의 없으며 굵기도 머리카락 굵기의 1/5에 불과하고 단단한 세포가 균일하게 분포하고 있어서 작은 글자의 획이 떨어져 나갈 염려가 없어서 목활자로서 가장 좋은 재료이기 때문이다.
5. 곤장에는 물푸레나무(水靑木)
물푸레나무는 물을 푸르게 하는 나무란 의미이다. 나무는 재질이 단단하고 질겨서 농기구로 널리 쓰였다. 또 다른 용도로는 죄인을 다스리는 곤장의 재료로 서민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고려사》'열전'을 보면 "임견미 등이 못된 종놈들을 시켜서 좋은 토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덮어놓고 수정목으로 곤장질을 하고는 그 땅을 강탈했다"고 나온다. 또 조선 예종 때에는 형조판서 강희맹이 "지금 사용하는 곤장은 그 크기가 너무 작아 죄인이 참으면서 조금도 사실을 자백하지 않으니 이제부터 버드나무나 가죽나무 말고 물푸레나무만을 사용하게 하소서"라고 상소했다. 그러나 물푸레나무가 너무 단단하다고 하여 현종 4년(1663)에는 버드나무로 대체하도록 했다.
권력과 우리나무
1. 자두나무와 조선건국
순수 우리말 이름은 오얏나무이고 한자명은 이(李)이다. 고려사에 보면 우왕 14년(1388), "목자가 나라를 차지한다[木子得國]." 라는 노래가 남녀를 막론하고 백성들이 모두 불렀다. 종묘제례악으로 세종 31년(1449) 창제된 정대업(定大業) 가사에 "....삼천 개의 열매 맺은 오얏이 번창하네/오얏이 번창하니 즐거움 끝이 없네...." 라고 하여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나무이다. 그러나 특별히 오얏나무를 왕씨의 나무로서 대접한 적은 없고 대한제국 때 이왕가(李王家)의 문장으로서 오얏을 사용한 정도이다.
복숭아와 함께 도리(桃李)라 하여 삼국사기, 고려사에도 여러 번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훨씬 이전부터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열매가 진한 보라색이고 모양이 복숭아를 닮았다하여 자도(紫桃)라 하다가 자두가 된 것이다. 옛 말에 오해를 받기 쉬운 일은 가까이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이란 말을 쓴다.
2. 배나무와 태조 이성계
‘배꽃(梨花)에 달빛(月白) 내려 비추고 은하수 흘러가는 깊은 밤/한가닥 나뭇가지에 걸린 춘심(春心)을 두견새가 어이 알랴마는/다정(多情)도 병이련가 잠 못들어 하노라‘
흐드러지게 피는 새하얀 배꽃 위로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걸려있는 모습은 누구라도 시한 수 읊조리고 싶어진다.
배나무는 꽃만이 아니고 우리의 복숭아, 자두와 함께 옛 과일로서도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배나무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조선왕조의 기록을 보면 ‘무학대사의 토굴이 있던 곳에 석왕사를 세우고 배나무를 손수 심었다.’고 하였으며 전북 진안 마이산 은수사에 있는 청실배나무는 태조가 이곳을 찾았을 때 심었다 한다. 《태조실록》'총서'에는 "태조가 일찍이 친한 친구들을 모아 술을 준비하고 과녁에 활을 쏘는데, 배나무가 백 보(步) 밖에 서 있고 배 수십 개가 서로 포개어 축 늘어져서 있었다. 손님들이 태조에게 이를 쏘기를 청하므로, 한 번에 쏘아서 다 떨어뜨렸다."고 하였다.
3. 앵두나무와 임금님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로 시작되는 유행가 가사처럼 공업화가 진행된 70년대 초, 소문으로만 듣던 서울로 도망칠 모의(?)를 한 용감한 시골처녀들의 모임방 구실을 한 것은 앵두나무가 있는 우물가이었다. 이처럼 앵두나무는 수분이 많은 곳을 좋아하는 작은 나무이다.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는 효자로 이름난 문종이 세자 시절, 앵두를 좋아하는 자신의 아버지인 세종에게 드리려고 경복궁 안 울타리에 손수 앵두를 심었다. 성종 19년(1488) 앵두 두 소반을 승정원에 내려주면서 "하나는 장원서(掌苑署)에서 올린 것이고, 하나는 민가에서 진상한 것이다. 지금 장원서에서 올린 앵두는 살이 찌고 윤택하지도 않은 데다 늦게 진상해 도리어 민간의 것만 못하다. 성종 25년(1492)에는 철정이란 관리가 앵두를 바치자, "성의가 가상하니 그에게 활 한 장을 내려 주도록 하라"했다. 이 관리는 연산 3년(1496)에도 또 임금께 앵두를 바쳐 각궁(角弓) 한 개를 하사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옛 사람들은 단순호치(丹脣皓齒)라 하여 빨간 입술과 흰 이를 아름다운 여인의 기준으로 삼아서 예쁜 입술을 앵두 같은 입술이라 하였다. 잘 익은 앵두의 빛깔은 붉음이 진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티 없이 맑고 깨끗하여 바로 속이 들여다보일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4. 가중나무와 저력지재(樗櫟之材)
동네의 빈 공터 아무 곳에나 잘 자라는 나무이다. 봄에 흔히 나물로 먹는 참중나무와 매우 비슷하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을 나타낼 때 흔히 가중나무와 비교한다. 세종 14년(1432) 봄, 과거에 새로 급제한 사람들이 “가죽나무 같은 쓸모없는 재질로 남다른 은혜를 입었으니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보답하기 어렵습니다." 이정간은 “하늘과 땅의 큰 조화는 가죽나무 같은 쓸모없는 재목도 버리지 않으며, 비와 이슬 같은 임금의 깊은 은혜는 특히 늘그막에 있는 신에게 적셔 주셨습니다.” 성종 20년(1489)에는 김흔이란 이가 “엎드려 생각하건대, 가죽나무처럼 쓸모없는 재목이 이미 말라 썩어야 마땅한데, 천지의 큰 은혜를 입어 자라날 수 있게 되었으니, 몸이 가루가 되어도 보답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가중나무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잘 자라며 나무의 재질도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나 옛 양반들이 미워하는 나무가 되었다.
5. 폐비 윤씨와 버드나무
시가 속에서 만나는 여인과 사랑과 버들은 수없이 많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한다.
‘산 버들가지 골라 꺾어 님에게 드리오니/주무시는 창가에 심어두고 보옵소서/밤비 내릴 때 새 잎이라도 나거든 날 본 듯 여기소서‘ 조선 중기의 기생 홍랑이 헤어지게 된 애인 최경창에게 받친 시 한수 이다. 북도평사라는 벼슬로 함경도 경성에 있을 때 둘은 사랑을 나누다가 임기가 되어 한양으로 떠나게 된다. 그를 배웅하고 어둠이 깔리는 저문 날, 홍랑은 비를 맞으며 버들가지와 이 시조를 지어 건네주었다고 한다. 신분을 초월한 연인사이의 안타까운 이별이 버들가지에 절절히 베어있다.
그러나 버들이 죽어서 상자가 만들어지면 저주의 대상이 된다. 성종 8년(1477) 비상을 버드나무 상자에 담아 권숙의 집에 던진 것이 중궁 윤씨를 폐하는 빌미가 되었으며, 숙종 27년(1701)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하여 지금의 창경궁 통명전(通明殿) 연못가에 각시와 붕어를 넣은 버드나무 상자를 묻었다가 발각되어 사약을 받았다.
6. 등나무와 소인배
사람과 사람사이에 다툼이 생겨 잘 풀리지 않으면 흔히 갈등(葛藤)이 생겼다고 한다. 바로 갈은 칡이고 등은 등나무를 말한다. 생김새는 둘이 전혀 다르나 살아가는 방식은 비슷하다. 혼자 주위의 다른 나무들과 피나는 경쟁을 하여 삶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손쉽게 다른 나무의 등걸을 감거나 타고 올라가 어렵게 확보해 놓은 광합성의 공간을 혼자 점령해버리는 횡포를 서슴치 않는다. 질서를 지키지 않은 칡이나 등나무가 선의의 경쟁에 길들어 있는 숲의 질서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다. 갈과 등이 자랄 때 생기는 이런 현상이 바로 갈등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등나무의 이런 특성을 싫어하여 소인배와 비교하였다. 중종 32년(1537) 홍문관 김광진 등이 올린 상소문에‘대체로 소인들은 등나무 덩굴과 같아서 반드시 다른 물건에 의지해야만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중종 34년(1539) 전주 부윤 이언적의 상소문에도‘간사한 사람은 등나무나 겨우살이 같아서 다른 물체에 붙지 않고는 스스로 일어나지 못합니다.' 인조14년(1637) 부수찬(副修撰) 김익희가 올린 상소문에, '빼어나기가 송백과 같고 깨끗하기가 빙옥(氷玉)과 같은 자는 반드시 군자이고 빌붙기를 등나무나 담쟁이같이 하는 자는 반드시 소인일 것입니다.'
7. 오동나무와 거문고
’대궐 뜰 오동잎에 밤비소리 싸늘한데/귀뚜라미 귀뚤귀뚤 이내 수심 일으키네/한가로이 거문고에 새 곡조를 올려 보니/한없는 가을 시름 흥과 함께 굴러가네‘라는 시한수가 있다. 연산12년(1506)의 시이니 같은 해 9월2일 중종반정으로 쫓겨날 것을 마치 예견한 것처럼 내용이 그 답지 않게 처량 맞다.
옛 사람들은 붉게 물드는 단풍을 보고 가을을 느낀 것이 아니라 커다란 오동잎에 주절주절 떨어지는 가을비 소리를 듣고 가버리는 한해를 아쉬워한 것 같다.
오동나무의 쓰임새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거문고의 재료로 가장 널리 쓰였다. 관리들이 향교에 있는 오동나무를 탐내었다가 나무 한 그루 때문에 파직되는 수모를 당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명종 15년(1559)에는 영천 군수 심의검이 향교 앞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다가 거문고를 만들었다가 벼슬을 쫓겨난 것은 물론 더 죄를 주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간신히 면했다. 현종 11년(1670)에도 남포 현감 최양필이 거문고를 만들 요량으로 향교 오동나무를 베었다가 파직을 당한다.’
8. 모과와 광해군
광해군 원년(1608)의 기록은 흥미롭다. "나는 본시 담증(膽症)이 있어서 모과를 약으로 장복하고 있다. 그런데 충청도에서 쌀을 찧는다고 핑계를 대고 1개도 올려보내지 않았다고 하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속히 파발을 띄워 상납하도록 독촉하여서 제때에 쓸 수 있게 하라".
나무와 사랑에 얽힌 상징성
1. 연리목(連理木)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맞닿은 채로 오랜 세월이 지나면 서로 합쳐져 한나무가 되는 현상을 연리(連理)라고 한다. 두 몸이 한 몸으로 합쳐진 모습으로 인해 예로부터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에 비유되곤 했다. 알기 쉽게 ‘사랑나무라고도 부른다.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역사책 후한서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있다. 채옹이란 사람은 어머니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하다가 돌아가시자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3년 동안 묘를 지켰다. 얼마 후 채옹의 방 앞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서로 마주보면서 자라나기 시작하더니, 차츰 두 나무는 서로의 가지가 맞붙어 마침내 연리지가 됐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채옹의 효성이 지극해 부모와 자식이 한 몸이 된 것이라고 칭송했다. 이때부터 연리지는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을 나타내는 효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백거이에 의해 장한가(長恨歌)라는 대서사시로 다시 태어났다. 칠월칠일 장생전에서/ 깊은 밤 두 사람은 은밀한 약속을 하는데/ 우리가 하늘에서 만나면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이승에서 다시 만나면 연리지가 되세라고 읊조렸다.
2. 석류
석류꽃은 몸통이 긴 작은 종처럼 생겼는데, 육질이 많아 포동포동한 아기를 연상케 한다. 끝이 여러 개로 갈라지고 6장의 꽃잎이 진한 붉은 빛으로 핀다. 이런 꽃 모양을 보고 송나라의 왕안석은짙푸른 잎사귀 사이에 피어난 한 송이 붉은 꽃(萬綠叢中紅一點)…이라고 노래했다. 석류꽃의 아름다움이 오늘날 우리가 흔히 쓰는홍일점이라는 말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석류 열매가 익어 가는 과정이 아이에서 어른까지 차츰 커져 가는 음낭과 크기나 모양이 닮았다는 것이다. 꽃 안에는 작은 빨간 루비를 촘촘히 박아 넣은 것 같은 씨앗이 수백 개씩 담겨 있다. 익으면 입을 크게 벌려 가을 햇살에 영롱한 빛을 발산한다. 시인 변영로는 〈논개〉에서…아리땁던 그 아미(蛾眉)/높게 흔들리우며/그 석류 속 같은 입술/죽음을 입맞추었네…라고 했다.
이와 같은 석류꽃과 열매의 특징들은 다산(多産)의 의미와 함께 음양의 상징성이 있어서 옛 여인들의 신변 잡품에 다양하게 쓰였다. 석류 문양은 조선시대 귀부인의 예복인 당의(唐衣), 왕비의 대례복, 골무, 안방가구 등에 단골로 사용됐다. 또 비녀머리를 석류꽃 모양으로 장식한 석류잠(石榴簪)을 꽂았는가 하면 귀부인들이 차고 다니던 향낭(香囊)은 음낭을 상징하는 석류 열매 모양으로 만들었다.
3. 대추나무 시집보내기
대추나무는 늦봄, 지대가 높은 곳에서는 초여름이나 되어야 겨우 잎이 돋기 시작한다. 봄나들이 객이 ‘어! 이 나무 죽었네!‘하기 일쑤다. 그래서 게으름을 피우는 양반과 빗대어 양반나무라고도 한다. 대추나무란 이름은 한자 이름 대조목(大棗木)에서 대조나무로 부르다가 대추나무가 된 것이다.
나무 시집보내기라는 행사가 있다. 설날이나 단오에 과일나무의 Y자로 벌어진 가지 틈에 남근을 상징하는 돌을 끼워 두면 그 해에 과일이 많이 열린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어 보인다. 굵은 돌을 끼워두면 가지의 지름이 커지면서 나무껍질이 눌리게 되어 잎에서 광합성으로 만들어진 영양분들이 다른 줄기나 뿌리로 가는 것을 방해받는다. 다른 곳으로 가기가 어려워진 영양분들이 결국은 열매 맺는 데로 가게 되니 더 굵고 더 많은 열매가 달리는 것이다. 환상박피(環狀剝皮)라 해 나무껍질을 도넛츠처럼 동그랗게 벗겨 내거나 가지에 강철로 만든 가락지를 끼워 두어 과일이 많이 달리게 하는 것 등이 다 여기서 나온 방법이다.
4. 복사나무
연분홍 복사꽃 빛은 남녀간의 사랑의 상징이다. 『시경』에서부터 현대시에 이르기까지 동양시인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나무가 바로 복숭아나무일 것이다. 옛 시에서 복숭아나무는 흔히 젊고 아름다운 여인과 비유되기도 한다. 그러나 복숭아꽃은 색정에 비유되기도 한다. 흔히 하는 말로 도화(桃花)살이 끼였다고 하면 여자가 한 남자의 아내로 평생을 살지 못하고 뭇 남자를 상대하거나 사별하는 살기(殺氣)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라 행동을 삼가야 한다고 믿었다.
5. 자귀나무
초여름의 숲 속에서 짧은 분홍 실을 부챗살처럼 펼쳐 놓은 자그마한 꽃들이 피어 주위를 압도하는 꽃나무가 바로 자귀나무다. 자귀나무는 50~80개나 되는 마주보기의 작은 잎들이 밤에는 서로 마주보기로 붙어버린다. 이렇게 잠자는 운동이 특기인데, 서로 붙었을 때 짝이 없는 잎이 없는 것 또한 퍽 재미있다. 그러니 자연히 부부의 금실을 상징하는 나무로서 합환수(合歡樹), 야합수(夜合樹)란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해가 있을 동안에는 잎이 마주 붙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구름이 끼어서 아무리 컴컴할지라도 낮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는다.
겨울이 되면 콩꼬투리처럼 생긴 긴 열매가 다닥다닥 붙어서 수없이 달리는데, 세찬 바람에 부딪쳐 달그락 달그락하는 소리가 옛 양반들의 귀에 꽤나 시끄럽게 들렸나 보다. 그래서 여설수(女舌樹)란 이름이 붙었다.
잘못 알려지고 있는 나무 이야기
1. 적송(赤松)은 일본 이름
우리가 너무나 쉽게 쓰고 있는 ‘적송‘이란 말은 일제강점기 이후에 나온 말이며 우리 선조들은 송(松) 혹은 송목(松木)이라 하였다. 적송은 소나무에 대한 일본이름으로, 그들은 '赤松'이라 쓰고 '아까마쯔'라고 읽는다. 일제강점기 우리말을 없애고 강제동화 정책을 쓸 때 나무이름도 일본식으로 부르도록 강요하였다. 이렇게 우리말에 들어와 버린 적송은 붉은 줄기를 가진 소나무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고 해서 오히려 갈수록 더 널리 쓰이고 있다.
2. 굴피집과 굴참나무
너와(나무기와)를 만들 소나무나 전나무가 없으면 굴참나무 껍질을 벗겨 지붕을 이었다. 이런 집은 '굴참나무의 껍질로 만들었다' 하여 굴피집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흔히 굴피집의 재료가 굴피나무 껍질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데, 굴피나무는 이름은 굴참나무와 비슷하여도 가래나무과(科)에 들어가는 전혀 다른 나무이다.
3. 재궁(梓宮)은 황장목
중국에서는 황제의 시신을 감싸는 목관을 가래나무로 만들었으므로 재궁(梓宮)이라고 부른다. 한 마디로 뭇 나무 중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은 셈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름만 빌려와 임금님의 관을 재궁이라 하였을 따름이고 실제 가래나무로 만든 것 같지는 않다.
《세종실록》'오례'에 보면, "재궁은 소나무의 가장 좋은 부분, 즉 황장목(黃腸木)을 추려서 만들었다"고 하여 질 좋은 소나무를 대신 쓴 것이다. 관을 만들만큼 큰 가래나무가 우리나라에는 흔치 않은 탓일 것이다.
4. 은행나무는 침엽수인가 활엽수인가?
잎의 생김새로 보아서는 당연히 활엽수에 들어가야 할 것 같으나 일반적으로 침엽수에 넣는다.
1. 은행나무는 밑씨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겉씨식물로서 바늘잎나무(침엽수)에 속하는 나무들과 촌수가 가깝다. <나자식물아문-소철목, 은행목, 구과목, 마황목 : 피자식물아문-쌍자엽식물, 단자엽식물>
* 침엽수-구과목에 속하며 일반적으로 바늘잎을 가지는 나무, 활엽수-쌍자엽식물중 목본에 속하는 넓은잎나무
따라서 정확하게는 은행수(?), 침엽수, 활엽수, 대나무로 구분하여야 할 것이나 은행나무는 1목-1과-1속-1종이므로 편의상 침엽수로 구분함
2. 은행나무를 이루고 있는 세포의 종류는 약 95%가 헛물관이라는 세포인데, 소나무나 향나무 같은 침엽수도 헛물관이 차지하는 비율이 은행나무와 비슷하다. 더욱이 세포종류뿐만 아니라 세포모양이나 배열도 침엽수와 구별이 안될 만큼 거의 그대로 닮았다. 반면에 활엽수는 헛물관은 아예 없고 물관을 비롯한 여러 종류 세포로 이루어지고 세포모양이나 배열도 은행나무와는 전혀 다르다.
바깥 모양으로는 활엽수 같으나 현미경으로 들어다 본 세포형태는 침엽수와 너무 가깝다.
5. 여러 보리수나무들
식물학적으로 보리수나무란 나무는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로서 잎의 뒷면이 은박지를 입혀둔 것 같고 가을에 붉은 열매가 달려 먹을 수 있는 작은 나무이다. 그러나 흔히 보리수는 여러 나무에 쓰이고 있어서 혼란이 있다. 보리수로 불리는 ‘가짜 보리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인도보리수가 있다. 바로 부처님이 도를 깨우친 나무로서 아열대지방에 자라며 잎 모양이 하트형이다. 둘째는 보리수라 불리는 피나무 종류가 있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면서 추운지방에도 자랄 수 있으며 인도보리수와 잎 모양이 비슷하여 부처님의 인도보리수 대용으로 쓰이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셋째는 슈베르트의 가곡집 《겨울나그네》에서 제5곡 '린덴바움(Lindenbaum)'은 원어에 충실한 의미가 피나무이나 번역하는 분이 보리수라고 붙여버렸다. 그래서 보리수란 이름의 나무는 열매를 먹는 우리 산의 보리수나무, 부처님의 인도보리수, 우리나라나 중국의 절에 심은 피나무 보리수, 슈베르트의 보리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모감주나무, 무환자나무 등 염주를 만들 수 있는 열매가 달리는 나무도 보리수라고 쓰는 경우가 있어서 '보리수'는 더욱 혼란스럽다.
6. 느티나무가 싸리나무로 된 사연
사찰의 대웅전 기둥을 흔히 스님들은 ‘싸리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싸리나무가 아니라 느티나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느티나무의 재질이 사리함 등 불구(佛具)의 재료로 매우 적합하여 절에서도 흔히 사용한 탓으로 절에서는 흔히 느티나무를 ‘사리나무‘라고 한 것이다. 사리함 자체는 청동이나 금동으로 만들지만 함을 넣는 상자 등 사리와 관련된 쓰임새에 느티나무가 이용됨으로서‘사리함을 만드는데 쓰이는 나무’라고 느티나무를 사리(舍利)나무로 부르다가 싸리나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