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의 꽃과 나무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박상진
조선왕조가 들어서고 한양에 새 도읍을 건설하면서 최우선은 정무를 돌보고 왕실의 위엄을 갖출 궁궐을 짓는 일이었다. 건물과 함께 빠트릴 수 없는 것은 꽃과 나무를 심어 임금님의 휴식과 정서적인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이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 조선의 왕궁에는 건물과 함께 후원이 함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경복궁 후원은 거의 사라져 버리고 왕조실록 등 옛 문헌에서 겨우 자취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공동 후원이었던 지금의 창덕궁 후원만은 다행히 역사의 소용돌이를 잘 넘겨 옛 모습을 거의 간직하고 있다. 물론 세월이 지나면서 나무는 자라고 죽고 건물은 필요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었지만 왕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서 부족함은 없다.
여기서는 창덕궁 후원을 중심으로 현재 자라는 나무와 《동궐도》 및 《조선왕조실록》의 자료를 비교하여 현황을 소개코자 한다. 비록 지금의 나무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우리 손으로 궁궐을 복원하면서 새로 심은 것들이 많지만, 임금님과 관련된 이야기를 가진 주요 나무들도 함께 알아본다.
궁궐 나무 심기 원칙
도선국사 이후 풍수지리 사상은 우리 사회의 기본을 이루고 있었다. 조선왕조가 아무리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했지만 궁궐을 짓는데 흔히 말하는 ‘명당 찾기’에서 크게 벗어날 수는 없었을 터이다. ‘왼쪽에 물이 있고 오른 쪽에 길이 있으며 앞에는 못이 있고 뒤에는 언덕이 있다’면 그림 같은 집을 지을 장소로 모자람이 없다. 청룡(靑龍)과 백호(白虎), 주작(朱雀)과 현무(玄武)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완벽한 조건을 갖춘 곳이란 쉽지 않다.
조선의 궁궐을 만드는 사람들은 명당 사상을 기본으로 하나 더 첨가되는 원칙이 있었다. 우리와 함께하는 조경은 자연 순화의 개념이다. 일본이나 중국처럼 철저히 인위적이거나 자연을 압도하려는 거창함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표현하는 것이다. 단순하고 소박하면서도 결코 초라하지 않게 건물과 어울림을 한껏 고양시킨 것이 우리의 조경이다. 아울러서 지켜지는 또 하나의 원칙이 있었다. 집안에는 나무를 심지 않은 것이다. 이는 세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째는 임금의 안전을 위함이다. 나무는 임금을 해치려는 자객이 숨을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집안에 나무를 심으면 곤(困)이 되어 왕실이 어려움이 오고, 대문 안으로 심으면 한(閑)이 되어 왕가가 한미해진다는 생각이었다. 세 번째로는 집안에 나무를 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혹시 심더라도 지붕높이 보다 더 자라는 것을 꺼렸다. 집의 정기를 나무가 빼앗아 간다고 생각한 탓이다.
궁궐 공간 조성 전체의 설계는 《주례(周禮)》라는 중국의 옛 책을 기준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구성은 물론 나무를 심은 일도 표준으로 삼았다. 여기에는 ‘면삼삼괴삼공위언(面三三槐三公位焉)’라하여 회화나무 심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한 예로 창덕궁 돈화문을 들어서면 바로 왼쪽에 3그루의 회화나무를 심은 것이다. 주례에 따르면 외조(外朝)는 왕이 삼공(三公)과 고경대부 및 여러 관료와 귀족들을 만나는 장소로서 이 중 삼공의 자리에는 회화나무를 심어 앉을 자리 표지로 삼았다. 경복궁에도 마찬가지로 회화나무를 심었을 것이나 남아있지 않을 뿐이다. 궁궐의 나무를 심고 가꾸는 전담기관이 필요하였다. 조선 초기 상림원(上林園)으로 출발하여 장원서(掌苑署)란 이름으로 궁궐의 꽃과 과일나무에서 새와 짐승까지 관리하는 기관이었다.
궁궐은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리면서 건물이 철저히 파괴되고 자라던 나무도 거의 없어졌다. 동궐의 몇 고목나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훗날 심겨진 나무들이다. 즉 20세기 초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어 의도적으로 조선왕조를 폄하할 목적으로 건물을 헐어내고 구조를 바꾸는 과정에 함부로 나무를 심었다. 가장 두드러진 나무 심기는 그들의 대표 꽃나무 벚나무를 궁궐에 들여오는 일이었다. 처음 창덕궁에 심겨지기 시작한 벚나무는 창경궁이 동물원으로 개방되면서 온통 벚나무 천지로 만들어 버렸다. 복원하면서 대부분의 벚나무는 제거되었고 후원에 자연적으로 자라는 산벚나무만 남아있다.
《동궐도》로 만나는 나무
창덕궁과 창경궁은 합쳐서 동궐(東闕)이라고 하는데, 19C초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라는 상세한 궁궐그림이 남아 있다. 적어도 2백여 년 전 궁궐에 어떤 나무를 심고 가꾸었는지를 짐작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귀중한 그림이다. 《동궐도》의 그림에서 나무 종류를 분석한 자료를 보면 소나무가 559, 향나무 등 기타 침엽수가 36, 활엽수 큰 나무가 1,620, 키 작은 관목이 600그루로서 전체 나무의 숫자는 2,815그루이다. 소나무가 20%를 점유하고 있으며 실제 《동궐도》에서도 전체적인 느낌은 솔밭에 가까울 만큼 소나무가 많다. 소나무 사이사이에 갓 잎이 피기 시작하여 길게 늘어진 버들이 유난히 눈에 띄고 분홍 꽃이 만개한 복숭아나무와 진달래로 짐작되는 작은 꽃나무가 궁궐의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그 외 침엽수로는 잣나무, 전나무, 주목, 향나무, 활엽수로는 느티나무, 회화나무, 참나무, 음나무, 뽕나무, 단풍나무 등이 여기저기 자라고 있었다. 꽃나무와 과일나무로서는 매화, 모란, 배나무, 앵두나무, 개암나무, 대추나무, 자두나무, 살구나무, 밤나무 등이 있었으나 《동궐도》 그림으로 명확히 구분해 내기는 어렵다. 또 《동궐도》에서 우리는 집안에 큰 나무를 심지 않았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창덕궁 후원은 임금님의 휴식공간으로 수많은 정자와 아기자기한 정원으로서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동궐도》에서 본 후원은 소나무가 주류를 이루고 사이사이에 느티나무나 참나무와 같은 활엽수를 심고 밑에는 꽃나무를 가꾼 형태이다. 또 숲에는 작은 길들이 수없이 그려져 있어서 전형적인 완상목적의 정원이었다는 느낌이 온다. 그러나 오늘날의 후원은 소나무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그나마 최근에 심은 소나무들이 많다. 참나무와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여러 활엽수가 들어선 숲으로 변해 버렸다. 일제말기와 광복 후 한국동란의 혼란기를 거치는 동안 인위적으로 관리하여야하는 숲을 방치한 탓으로 생존경쟁에서 소나무가 도태되었기 때문이다. 솔잎혹파리, 송충이 등 소나무 해충도 활엽수 숲으로 변하는데 한 몫을 했다.
지금의 창덕궁 나무
2002년 문화재청의 조사 자료를 보면 오늘날 창덕궁에 자라는 나무는 16,708그루이다. 이 숫자는 대체로 줄기 지름 6cm이상을 조사한 결과다. 종(種)수는 94종이며 조사 숫자에 포함되지 않았던 작은 관목이나 덩굴나무 등을 포함하면 100종이 넘는다. 가장 많은 종은 참나무이며 전체 나무 숫자의 약 23.5%에 해당하는 3,922그루이고 다음이 때죽나무, 단풍나무, 팥배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산벚나무의 순서로 이어진다. 또 참나무 중에는 갈참나무가 1,367그루로서 전체 참나무 숫자의 약 1/3에 해당한다. 갈참나무는 중부지방에서 흔히 만날 수 있으며 적당한 습기를 가진 낮은 구릉지에 자라는 나무다. 따라서 일부러 갈참나무를 골라서 심은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후원의 생육조건이 다른 참나무보다 더 적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종묘의 참나무는 거의 90%가 갈참나무이며 조선왕릉의 참나무도 갈참나무가 많다.
때죽나무나 팥배나무는 중부지방의 숲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나무다. 이런 나무들은 따로 심은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자란 나무들로 짐작된다. 숲을 이루고 있는 상태로 보면 크게 자라 숲의 상층부에 가지를 뻗고 있는 나무는 참나무, 느티나무, 음나무 등이고 중간층에 단풍나무, 팥배나무 등이며 아래층에는 때죽나무, 철쭉, 누운주목 등 관목이나 키 작은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다. 창덕궁에 현재 자라고 있는 나무 중 수가 많거나, 임금님과의 인연 등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21종의 나무는 표1과 같다.
후원을 제외한 오늘날의 건물 주변에는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매화나무 등이 심겨져 있다. 그러나 《동궐도》에서 흔히 만나는 복사나무, 능수버들을 지금보다 더 많이 심어주는 것이 궁궐의 옛 정취를 살려주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표 1. 창덕궁에 자라는 주요 수종
수종 |
그루 수 |
점유비율(%) |
비고 |
참나무 |
3,922 |
23.47 |
갈참.졸참.신갈.상수리.굴참나무 포함 |
때죽나무 |
2,482 |
14.84 |
|
단풍나무 |
1,954 |
11.69 |
|
팥배나무 |
1,450 |
8.67 |
|
소나무 |
1,436 |
8.59 |
|
느티나무 |
1,157 |
6.92 |
|
산벚나무 |
940 |
5.62 |
|
밤나무 |
391 |
2.34 |
|
음나무 |
325 |
1.94 |
|
주목 |
275 |
1.65 |
|
잣나무 |
273 |
1.63 |
|
회화나무 |
127 |
0.76 |
|
뽕나무 |
107 |
0.64 |
|
전나무 |
50 |
0.30 |
|
매화나무 |
46 |
0.28 |
|
돌배나무 |
23 |
0.13 |
|
은행나무 |
16 |
0.10 |
|
진달래 |
13 |
0.08 |
철쭉 포함 |
향나무 |
11 |
0.07 |
|
복사나무 |
7 |
0.04 |
|
능수버들 |
3 |
0.02 |
|
기타 |
1,700 |
10.22 |
|
계 |
16,708 |
100 |
|
창덕궁의 고목나무
창덕궁은 태종 5년(1405)에 준공하여 임진왜란 때 불탔지만 다시지어 왕조가 끝나는 1910년까지 505년 동안 궁궐로 쓰였다. 역사가 긴 만큼 다른 궁궐보다 고목나무가 훨씬 많이 남아있다. 현재 창덕궁의 고목나무는 느티나무 32, 회화나무 15, 주목 10, 향나무 3, 은행나무와 측백나무 및 밤나무가 각각 2, 갈참나무, 굴참나무, 매화나무, 다래나무가 각각 1그루로서 모두 70그루에 이른다. 이 숫자는 창덕궁 자체에서 지정한 숫자이며 고목나무 정의가 애매하나 대체로 둘레 한 아름 이상, 나이 300년 이상을 기준으로 한 것 같다. 물론 다래나무, 매화 등 원래 굵게 자라지 않는 나무는 지정기준이 다르다. 이중에서 4 수종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봉모전 앞의 약 700년 된 194호 향나무, 후원 깊숙이 대보단 터의 600년 된 251호 다래나무, 관람지 입구의 400년 되었다는 471호 뽕나무, 돈화문과 금천교 사이의 300~400여년 된 472호 회화나무 8그루가 천연기념물이다. 고목나무가 가장 많은 느티나무는 세 아름이 넘는 큰 나무가 6그루나 되며 나이 짐작이 어려우나 적어도 300년 이상은 되지 않았나 싶다. 그 외 관람지 바로 옆의 거의 두 아름이 넘는 밤나무, 아직 따로 지정은 안되어 있지만 낙선재 안의 한 아름 반이나 되는 돌배나무등도 특별히 관심 있게 바라볼 고목나무 들이다. 이들은 궁궐의 오랜 역사를 나이테에 기록하면서 묵묵히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한편 창경궁은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서의 《동궐도》를 보면 경계가 그려있지 않을 만큼 수많은 역사의 부침을 함께 했다. 그러나 창경궁은 1909년 일제에 의하여 거의 완전하게 파괴된다. 궁궐 안의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변모시켰다. 1984년에 들어서야 옛 건물을 새로 짓고 나무를 심는 등 궁궐 복원사업이 시작되었다. 이때 창경궁 나무의 가장 큰 변화는 일제가 심어둔 벚나무의 제거였다. 그 자리를 새로운 나무로 복원하면서 중부지방에 자라는 주요 나무들은 대부분 조경수로 심겨졌다. 홍화문에서 명정전, 함인전, 환경전, 통명전까지로 이어지는 복원 공간 이외는 모두 나무를 심었다. 궁궐 중 창경궁이 가장 많은 나무가 새롭게 심겨진 셈이다.
2005년 창경궁 수목 조사 자료를 보면 오늘날 창경궁에 자라는 나무는 105,968그루이다. 이 중 큰 나무인 교목이 98종 5,789그루이다. 현재 교목으로서 가장 많은 수종은 소나무와 단풍나무이며 2579그루로서 전체 교목의 45%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느티나무, 참나무, 잣나무, 귀룽나무 순으로 이어진다. 키 작은 관목은 75종 48,879그루이며 가장 많은 나무는 철쭉과 산철쭉이다. 26,388그루로서 전체 관목의 54%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조릿대, 국수나무, 진달래의 순으로 이어진다. 창경궁에는 철쭉과 산철쭉이외에 진달래도 2,706그루나 되어 전체 키 작은 관목의 거의 60%에 이른다. 대비를 비롯한 여인의 공간으로서 꽃나무를 많이 심은 것 같다.
창덕궁 나무들의 미래
창덕궁의 나무들, 특히 후원의 나무 들은 서로 모여 숲이란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생태계는 세월이 가면서 변화한다. 생물상이 바뀌고 서로의 끊임없는 경쟁으로 삶과 죽음이 공존하면서 숲은 나무가 살아가는 바로 ‘삶의 현장’이다. 따라서 최소한의 간섭만 하여 후원의 모습을 자연의 순리에 맡겨 그대로 둘 것인지, 아니면 《동궐도》처럼 소나무가 주축이 되는 솔숲으로 바꾸어 줄 것인지는 여러 각도에서 심도 있게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서 후원 나무의 세밀한 관리지침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현재 과도하게 우거진 숲의 간벌 및 너무 높게 자라 넘어질 위험이 있는 나무들의 처리 등 기준 매뉴얼이 있어야 효과적인 관리를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짚어 보아야할 일은 메타세쿼이아, 꽃사과나무, 아까시나무, 은사시나무, 일본목련, 중국단풍, 칠엽수, 홍단풍 등 최근 외국에서 수입된 나무들을 궁궐 안에서 띄엄띄엄 만날 수 있는 사실이다. 궁궐의 역사성을 훼손하는 나무들로서 빠른 시간 내에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창덕궁의 주요 나무들
느티나무
느티나무는 1,157그루로서 창덕궁에서 6번째로 흔히 만나는 나무다. 이 중 고목은 32그루로서 가장 수가 많다. 후원을 둘러보면 큰 나무로 눈에 가장 잘 들어오는 고목이 느티나무임을 알 수 있다. 중종 8년(1513) ‘큰 바람에 집상전(集祥殿)의 소나무와 상서원(尙瑞院)의 느티나무가 뽑혔다.’를 비롯하여 몇 건의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현내 우리나라 전체 고목나무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궁궐에서도 흔히 자랐을 느티나무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이는 느티나무를 소홀히 한 것이 아니라 한자 이름에 혼란이 있어서다. 즉 느티나무는 거(欅)라는 한자이름이 따라 있기도 하나 대부분 회화나무를 나타내는 괴(槐)와 같이 썼다. 따라서 옛 기록에서 느티나무만 따로 찾아내기가 어렵다. 《동궐도》를 보면 후원에는 대부분 소나무를 가꾸고 있었으므로 지금의 느티나무는 일제 초기 후원이 방치되면서 소나무 대신에 다른 활엽수가 자람 터를 넓힐 때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능수버들
《동궐도》에는 창덕궁 금천교 앞, 대보단 앞 궁궐 담장 밖, 궁궐의 마구간이었던 마랑(馬廊) 앞, 홍화문과 선인문 앞 등 여러 곳에 능수버들이 그려져 있다. 옛사람들은 지금처럼 벚꽃 구경으로 봄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능수버들 싹이 틀 때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으로 봄 경치를 즐겼다. 많은 능수버들을 심어두고 봄바람이 인왕산을 타고 내려와 버들가지에 물이 오를 즈음 궁궐의 봄은 한층 화사해 졌을 터이다.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은 엉뚱하게 시 쓰기를 좋아하였는데 버들잎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여러 수의 어제시(御製詩)가 있다. 능수버들은 아름다운 자태를 감상하는 것뿐만 아니라 활쏘기의 표적 나무가 되기도 했다. 최고의 명궁은 왕이 참석한 가운데 늘어진 능수버들의 잎을 맞히는 것으로 우열을 가렸다고 한다. 실상 능수버들 잎을 화살로 맞힌다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만큼 정확성을 기하라는 상징이었겠다.
단풍나무
궁궐을 일컫는 다른 말에 풍금(楓禁), 풍신(楓宸), 풍폐(楓陛) 등이 있다. 이렇게 궁궐을 나타내는 말에 단풍나무가 많이 들어가는 이유는 중국의 한나라 때 궁궐 안에 단풍나무를 많이 심은 탓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궁궐에도 단풍나무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창덕궁 후원에는 참나무, 때죽나무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나무가 단풍나무다. 단풍나무는 습기가 좀 있고 햇볕이 바로 쪼이는 곳보다는 큰 나무 밑이나 나무와 나무사이에 잘 자란다. 후원은 단풍나무의 자람 터로서는 좋은 조건을 갖추었으므로 원래부터 자연적으로 자라고 있는 단풍나무도 많다. 여기에다 일부러 심기도 했으므로 단풍나무는 더욱 많아진 것이다. 《일성록(日省錄)》에서 정조 때의 기록을 보면 ‘단풍정’에서 활쏘기 등 여러 행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단풍정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춘당대 곁에 있는데, 단풍나무를 많이 심어서 가을이 되면 난만하게 붉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지었으나 정자는 없다.’고 했다. 춘당대는 부용지 동쪽 영화당(暎花堂) 앞마당인데 지금의 이 일대에는 참나무, 느티나무, 음나무 등이 자리 차지를 하고 단풍나무는 거의 없어져 아쉬움을 더한다.
연산군은 단풍나무도 좋아하여 신하들에게 단풍을 주제로 시를 지어 올리라고 하였으며 자신이 직접 단풍 시를 짓기도 했다. 연산 10년(1504) 9월7일 임금은 어제시(御製詩) 한 절구를 승정원에 내려 보냈다.
‘단풍잎 서리에 취해 요란히도 곱고/국화는 이슬 젖어 향기가 난만하네/조화의 말없는 공 알고 싶으면/가을 산 경치 구경하면 되리’
이어서 전교하기를, 숙직하는 승지 두 사람은 차운(次韻)하여 올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연산군의 단풍나무’는 아마 경복궁 후원을 두고 노래한 것 같으나 지금은 그냥 흔적 찾기도 어렵고 지금의 경북궁에는 단풍나무가 많지 않다.
돌배나무
태조 이성계는 배나무와의 인연이 많았다. 무학대사 토굴이 있던 곳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석왕사라 했으며 거기에 배나무를 손수 심었다. 전북 진안 마이산 은수사에 있는 청실배나무는 명산인 마이산을 찾아와 기도를 마친 뒤 그 증표로 심었다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가 일찍이 친한 친구들을 모아 술을 준비하고 과녁에 활을 쏘는데, 배나무가 백 보(步) 밖에 서 있고 배 수십 개가 서로 포개어 축 늘어져서 있었다. 손님들이 태조에게 이를 쏘기를 청하므로, 한 번에 쏘아서 다 떨어뜨렸다. 가져와서 손님을 접대하니 여러 손님들이 탄복하면서 술잔을 들어 서로 하례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신궁으로 알려진 태조는 이처럼 활솜씨 자랑에 배나무를 이용한 것이다.
문종 원년(1450)에는 상림원(上林園)에서 아뢰기를, 금년에는 본원의 배나무가 전혀 열매를 맺지 않아서 천신 진상(薦新進上) 및 대소 제향(大小祭享)에 이바지하기 어렵습니다. 는 기록이 있다. 또 꽃피는 시기가 아닐 때 꽃피어 이상기후를 나타내는 기록이 여러 번 나온다.
낙선재 안 만월문을 지나면 둘레 한 아름 반이 나 되는 돌배나무 고목 한 그루가 왕조시대의 위상을 뒤로하고 지금도 무심하게 서 있다.
때죽나무
창덕궁에서 두 번째로 많은 나무가 2,482그루의 때죽나무다. 키 5~6m에 굵기 한 뼘 정도까지 자라기도 하나 창덕궁에는 지름 6~10cm 짜리가 대부분으로서 원래 아름드리로 자라는 나무는 아니다. 대체로 어린이날을 지나 5월의 화창한 날, 하얀 꽃이 2∼5송이씩 모여 나무 전체를 뒤엎을 만큼 많이 핀다. 동전 크기만 한 다섯 개의 꽃잎을 살포시 펼치면서 꽃들은 모두 한결같이 다소곳하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핀다. 가을에는 타원형이 은회색 열매가 달리는 우리나라 산 어디에서나 흔히 만나는 평범한 나무다. 제돈(齊墩)이라는 한자 이름이 있으나 특별한 쓰임이 있는 나무가 아니라 옛 문헌에서 이 나무를 찾기는 어렵다. 번식력이 왕성하여 한번 자라기 시작하면 계곡을 따라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나무이므로 창덕궁이 피폐해 지면서 따로 심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창덕궁에 널리 퍼지지 않았나 싶다.
매화나무
《삼국사기》의 ‘고구려 대무신왕 24년(41)’조에 “8월, 매화가 피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만 보아도 매화가 아주 오래 전에 우리 곁에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에 들면서 매화는 난초, 국화, 대나무와 더불어 사군자에 꼽히며, 양반 사회를 대표하는 상징이기도 했다. 15~6세기부터는 백자에 매화 그림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조선시대의 수많은 선비 화가들은 매화를 즐겨 그렸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태종6년(1406)가 태상왕 이성계에게 매화 분을 선물한 것을 필두로 매화를 선물로 주고받은 기록들을 찾을 수 있다. 또 연산과 정조는 매화 시를 직접 지어 신하들에게 내렸다고 한다. 매화는 조선선비들과의 문화교류는 물론 임금님과의 교유창구가 되기도 한 꽃나무였다.
창덕궁에는 선조 때 명나라에서 가져 왔다고 전해지는 홍매 한그루가 자시문 옆에 자란다. 자람 형태나 굵기로 보아 원래 나무는 아니고 다시 심은 나무로 보인다. 그 외 낙선재 앞의 매화 밭, 창경궁 홍화문 안쪽 등 궁궐의 여기저기에서 지금도 매화를 흔히 만날 수 있다.
밤나무
밤나무에 관련된 기록은 《삼국유사》 원효대사 이야기에 나오며 낙랑고분을 비롯하여 가야 및 청동기시대 고분에서도 밤알이 흔히 출토되고 있다.
고려를 거쳐 조선조에 들면서 밤은 조상들이 관혼상제의 예를 갖출 때 대추와 함께 빠지지 않는 과일이었다. 조선시대 나라에서 규정한 오례의(五禮儀)에서 길례와 흉례 모두 밤을 상에 올렸다. 가을날 벌어진 밤송이를 보면 안에 보통 밤알이 세 개씩 들어 있다. 씨알의 굵기는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후손들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으로 대표되는 3정승을 한 집안에서 나란히 배출시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해석은 밤이 싹트는 과정으로 이야기한다. 밤알이 땅속에서 새싹을 내밀 때는 밤 껍질은 땅속에 남겨두고 싹만 올라온다. 타닌이 많은 밤 껍질은 땅속에서 오랫동안 썩지 않고 그대로 붙어 있다. 이런 밤의 특성 때문에 자기를 낳아 준 부모의 은덕을 잊지 않는 나무로 보았다는 것이다.
밤나무 목재는 단단하고 잘 썩지 않으며 무늬가 아름다워 가구에서 건물의 기둥까지 두루 쓰인다. 밤나무 목재의 또 다른 귀중한 쓰임은 제사용품이었다. 나라의 제사 관련 업무를 관장하던 봉상시(奉常寺)에서는 신주神主와 신주 궤(匱)를 반드시 밤나무로 만들었고, 민간에서도 위패(位牌)와 제상(祭床) 등 제사 기구의 재료는 대부분 밤나무였다. 왕실에서는 밤나무의 수요가 많아지자 벌채를 금지하는 율목봉산(栗木封山)까지 두기도 했다.
궁궐 안에 밤나무를 심고 가꾼 흔적을 찾기는 어려우나 창덕궁 관람지(반도지) 남쪽 둑에는 두 아름이 훨씬 넘는 밤나무 고목 한 그루가 연못 쪽으로 비스듬히 자라고 있다. 궁궐에서 가장 굵고 크며 나이도 3백년이상으로 짐작된다. 《동궐도》에서 이 일대를 찾아보면 불로문 앞으로 약간 비켜선 자리에 큰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띤다. 나무 모양으로 보아서는 지금의 밤나무고목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물론 오늘날의 관람지 밤나무 고목보다 《동궐도》의 ‘추정 밤나무’는 관람지 위치와 거리가 좀 떨어져 있다. 그러나 원래 자라던 자리에다 큰 나무를 그대로 그려 넣었다가는 존덕정 아래 두개의 네모 연못과 둥근 연못이 거의 가려져 버리므로 약간 위치 변동을 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복사나무
세종 29년(1447) 안평대군은 꿈속에서 박팽년과 함께 본 복숭아 숲의 경치를 화가 안견에게 이야기하여 사흘 만에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완성했다. 복숭아 숲은 신선 사상과도 이어져 유토피아의 대명사가 되었다. 옛 시에서 복숭아나무는 흔히 젊고 아름다운 여인과 비유되었다. 영조 28년(1752) 빈궁을 칭찬하는 내용 중에 “복숭아꽃처럼 아름다운 자태 널리 소문이 나서 빈(嬪)이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 복사나무는 귀신을 쫓는 나무로도 유명하다. 세종 2년(1420) 모후인 원경왕후가 위독해지자 “임금이 직접 복숭아 가지를 잡고 지성으로 종일토록 기도하였으나 병은 낫지 않았다” 하며, 연산 9년(1503)에는 “대궐의 담장 쌓을 곳에다 복숭아 가지에 부적을 붙여 예방하게 하라” 하였고, 연산 12년(1506)에는 “해마다 봄가을의 역질 귀신을 쫓을 때에는 복숭아나무로 만든 칼과 판자를 쓰게 하라”는 전교가 있었다.
《동궐도》에 보면 분홍 꽃이 핀 꽃나무가 여기 저기 그려져 있다. 특히 수강재(壽康齋) 서편의 홍서각(弘書閣)이라는 행각 앞에는 거의 30여 그루에 이르는 복사나무가 보인다.
뽕나무
농상(農桑)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뽕나무를 키워 누에를 치고 비단을 짜는 일은 농업과 나라의 근본이었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양잠으로 비단옷감 짜는 것을 장려하여 왕비가 친히 누에를 치고 신으로 모시는 서릉씨(西陵氏)에게 제사를 지내는 친잠례(親蠶禮)를 거행했으며, 또한 잠실(蠶室)이라 하여 누에를 키우고 종자를 나누어주던 곳도 따로 있었을 만큼 나라의 귀중한 산업이었다. 세종 5년(1423) 잠실을 담당하는 관리가 임금께 올린 공문에는 “경복궁 안의 뽕나무 3,590주와 창덕궁 안의 뽕나무 천여 주와 밤섬의 뽕나무 8,280주로 누에 종자 2근 10냥을 먹일 수 있습니다”는 내용이 나온다. 기록대로라면 궁궐이 온통 뽕나무밭이었다고 짐작된다. 현재 창덕궁에는 1백여 그루의 뽕나무 자라고 있으며 관람지 초입에 자라는 뽕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 받고 있다.
벚나무
우리 문화로는 벚나무를 꽃나무 대접한 적은 없다. 벚나무와 자작나무는 서로 구분하지 않고 그 껍질을 화피(樺皮)라고 한 이름에서부터 벚나무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얇고 매끄러운 껍질을 벗겨 활을 만들 때 이용하거나 화피전이라 하는 것처럼 포장 재료서 쓰임이 같았기 때문이다. 동국이상국집을 비롯한 우리의 시가집 어디에도 벚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한 수가 없다. 그러나 일본은 그들의 《만요슈(萬葉集)》을 비롯한 수많은 시가집에 벚나무가 등장하고 국민 모두가 좋아하는 꽃나무이다. 벚나무는 어디까지나 일본을 대표하는 일본인들의 나무이다. 《동궐도》에도 벚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의 창덕궁에는 약 1천여그루의 산벚나무가 후원에 자라고 있다. 일제강점기이후 벚나무 종류는 따로 심지 않았으므로 후원이 소나무 숲에서 활열수림으로 변하면서 자연적으로 들어온 나무들로 보인다.
소나무
소나무는 3~4천 년 전 선조들이 한반도 이주해 오면서 많아진다. 원래 참나무를 중심으로 낙엽활엽수로 이루어진 우리 숲은 개간하고 연료로 쓰면서 파괴되기 시작하자 소나무는 점점 세력을 넓혀 간다. 직접 햇빛을 많이 받아야만 살아남는 소나무는 사람들이 개발을 위해 울창한 숲을 파괴하거나, 산불로 인해 다른 나무가 다 타버려 공간이 생기는 것을 좋아한다. 역사 흐름에 따라 차츰 많아지던 한반도의 소나무가 최고의 나무로 자리를 잡은 것은 조선왕조에 들어오면서부터다. 조선왕조는 소나무 왕조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소나무를 숭상했다. 소나무는 재질이 좋아서라기보다 느티나무나 참나무 등 질 좋은 활엽수는 다 없어지고 쓸 만한 나무는 소나무밖에 남지 않아서다. 관청이나 양반 집을 짓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나무였으며, 배를 만들거나 임금의 관재에도 꼭 사용되었다. 이를 위하여 전국에 소나무가 잘 자라는 2백여 곳에 봉산(封山)을 설치하여 아예 출입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엄격한 소나무 보호 정책을 썼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숲은 점점 더 황폐화 되어 버렸다.
《동궐도》에 보면 후원은 거의 소나무로 구성되어 있다. 대나무와 함께 상록수로서 임금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상징하는 나무로 숭상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1,436그루나 자라며 5번째로 많은 나무이지만 소나무의 존재감은 그렇게 높지 않다. 일제강점기동안 후원을 거의 방치하면서 소나무는 다른 활엽수에 밀려 차츰 사라졌기 때문이다.
은행나무
중국이 원산인 은행나무는 대체로 불교가 전파될 때 함께 들어 온 것으로 짐작되며 숲 속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자라면서 친숙해진 나무다. 수백 년에서 천년을 넘겨 오래 살며 우람하고 당당한 모양새에 아름다운 단풍까지 갖고 있다. 은행나무는 궁궐이나 선비들 곁에서 그늘을 만들어주고 쉼터가 되는 행정의 정자나무이거나 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던 곳의 행단을 상징 나무로서 우리와 함께 살아왔다.
행정(杏亭)으로서는 명종 17년(1562) 후원에 있는 은행정에서 2백여 인이 참석하여 왕세자의 가례(嘉禮) 축하행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후기 문인화가인 이유신의 ‘행정추상도(杏亭秋賞圖)’에는 단풍 든 은행나무 아래 선비들이 모여 국화를 감상하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행단(杏壇)의 나무는 조선 순조 17년(1817) 왕세자인 효명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하는 과정을 그린 ‘왕세자입학도첩’에서 만날 수 있고, 이 나무들은 천연기념물 59호로 지정되어 현재도 잘 자라고 있다.
지금의 창덕궁 후원의 존덕정 옆에는 궁궐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 나무 한 그루가 자란다. 줄기 둘레 약 세 아름(148cm), 높이 23m의 거대한 고목이다. 이 나무는 《동궐도》에서도 만날 수 있다. 폄우사 북쪽, 존덕정의 서북쪽에는 연지(蓮池)와 사이에 담장을 쌓고 직각으로 세 번 꺾어 들인 끝에 솟을 대문 같은 태청문(太淸門)이 있는데, 이 문 앞의 연지 쪽 구석에는 곧은 줄기에 타원형의 아담한 나무갓을 가진 나무가 오늘날의 은행나무로 짐작된다. 존덕정에는 1789년 정조가 직접 쓴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세상의 모든 냇물은 달을 품고 있지만 하늘의 달은 하나 밖에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왕권을 강화하고 신하의 도리를 강조하는 뜻으로 존덕정을 정비하면서 학문을 숭상하는 행단이란 상징성을 갖는 은행나무를 정조가 심지 않았나 짐작해 본다.
음나무
음나무는 험상궂은 가시를 달고 있다. 이 가시는 껍질이 변하여 된 것으로 비교적 약한 편이고, 그나마 나이가 들면 아예 없어져버린다. 그런데도 우리 선조들은 여러 가시 달린 나무 중에 특별히 음나무 가지를 골라, 잡귀가 들락거리지 말라고 문설주 위에다 가로로 걸어 놓았다. 아무리 나쁜 귀신이라도 의관 정제하고 다녔다고 상상하였으니 가시투성이 음나무 가지에 꼼짝없이 도포 자락이 걸리게 마련일 것이다.
음나무의 목재는 황갈색을 띠며 가느다란 줄무늬가 있어서 더 고급스럽다. 박달나무처럼 단단하지도 오동나무처럼 너무 무르지도 않아 강도가 적당한데다가 아름다운 무늬까지 있어서 가구재나 조각재로 널리 쓰인다. 특히 ‘금슬이 좋다’고 할 때의 슬(瑟)이란 악기는 앞판은 오동나무, 뒤판은 음나무로 만들어 25줄을 매어서 탄다고 한다. 자람이 빠르며 땅을 별로 가리지 않고 넓은 잎은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나무다. 창덕궁 후원에 한 아름 전후의 굵은 음나무들을 흔히 만날 수 있고 《동궐도》에도 초록색 큰 잎을 강조하여 그려놓아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많았다.
잣나무
중국에서는 잣이 바다를 건너왔다고 해서 해송(海松), 신라인들이 많이 가져왔다고 해서 신라송이라 불렀다. 잣나무에는 다른 이름이 더 있다. 굵은 나무를 잘라보면 속이 붉다 하여 홍송(紅松), 맛있는 잣이 달린다 하여 과송(果松), 소나무처럼 생겼으나 한 다발에 잎이 두 개씩 있는 것이 아니라 다섯 개씩 있다 하여 오엽송이다.
잣나무의 한자 이름은 백(栢)이다. 이 백은 잣나무보다 측백나무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특히 중국 문헌에 나오는 백(栢)은 잣나무가 될 수 없다. 잣나무는 우리나라 중북부지방과 만주 에 걸쳐 자란다. 우리 문헌에 나오는 송백(松栢)은 소나무와 잣나무로 볼 수 있으나 중국 문헌의 송백은 소나무와 측백나무, 혹은 침엽수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8년(1408) 건원릉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두루 심으라고 한 것을 비롯하여, 성석린이 남산에다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자고 건의하였다. 세종 31년(1449) 효행이 뛰어난 선비를 칭찬하는 내용 중에 그 아비가 죽게 되어서 잣나무를 얻어다 관을 만들어 장사지냈다고 했다. 잣나무는 공공건물에도 많이 심었다. 중종 21년(1527)에는 성균관 명륜당 뜰에 있는 잣나무가 벼락을 맞았다고 했다. 왕실에서도 잣나무를 귀하게 여겨 궁궐 안에도 심은 듯하다. 창덕궁에도 잣나무가 여기 저기 자라고 있으나 종묘 정전(正殿) 뒷길 양편에 잣나무가 가장 잘 가꾸어져 있다.
전나무
전나무는 북한의 고산지대를 비롯하여 추운 곳을 원래의 자람 터로, 혼자보다는 떼거리를 이루어 자라기를 좋아한다. 백두산 일대는 전나무와 가문비나무 및 잎갈나무 이 삼총사가 모여 원시림을 만들어 낸다. 그중에서도 전나무가 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가장 높아 남쪽으로도 거의 한반도 끝까지 내려온다.
나무의 생김새가 원래 곧게 자라면서 밑변이 좁은 삼각형의 작은 수관(樹冠)이 특징이다. 또 높이 30m를 넘겨 자라는 키다리나무다. 옛날 대형 건물의 기둥으로 장대재(長大材)가 나올 수 있는 것은 전나무 밖에 없다. 선조 39년(1606) 임진왜란 이후 종묘영건도감(宗廟營建都監)에서 전나무 확보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그 외 전나무는 조선왕릉의 도래솔로서 소나무와 함께 널리 이용되었다는 내용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여러 번 찾을 수 있다. 오늘날 광릉(光陵) 주변에서 전나무를 실제로도 많이 만날 수 있다. 나무가 너무 높이 자라 바람에 넘어지거나 벼락을 맞는 일이 많아 건물 주변에는 잘 심지 않는다. 서울 문묘에 자라던 전나무가 숙종 45년(1719)벼락이 떨어져서 며칠 동안 논란이 계속된 기록도 있다. 궁궐 안에 전나무를 따로 심어 관리한 기록은 찾을 수 없고, 지금의 창덕궁을 비롯한 궁궐 안에도 큰 전나무는 없다.
전나무의 한자이름은 ‘회(檜)’인데 때로는 지금 일본 삼나무를 뜻하는 삼(杉)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삼나무는 우리나라에 자라지 않았던 나무이므로 옛 문헌의 삼은 대부분 전나무다.
주목
주목은 결이 곱고 목재의 붉은 색이 아름다우며 잘 썩지 않는다. 자람이 매우 느리고 오래 살므로 속칭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주목’이라고 말한다. 그런 특성 때문에 시신을 감싸는 관재(棺材)로는 최상품 대접을 받았다. 일제 강점기에 평양 부근의 오야리 고분에서 출토된 낙랑고분의 관재도 주목이며 임금님 앞에 나갈 때 들던 홀(笏)도 주목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창덕궁 부용지 동남쪽 언덕의 한 아름이 넘는 주목이 궁궐의 맏형이다. 우리 역사 기록에서 주목은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창덕궁, 경복궁 등에 주목이 빠지지 않고 심어진 것으로 보아 선조 들이 좋아한 나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진달래
세조 3년(1457), 진달래가 만발할 즈음 남녀 7, 8명이 대궐문 앞을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지나갔으나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일이라 하여 이를 용서해주었다고 한다. 연산 12년(1504)에는 장의문(藏義門)에 탕춘정(蕩春亭)이란 새 정자를 짓고 산 안팎에는 진달래를 심었는데 왕과 왕비가 자주 거동하여 봄을 감상했다고 한다. 임금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예나 지금이나 진달래는 변함없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꽃임에 틀림없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기상이변으로 늦가을에 진달래꽃이 피었다는 기록이 10여 차례 등장한다.
진달래가 필 즈음이면 궁궐에서도 봄을 맞는 마음으로 꽃전(花煎)을 부쳐 먹는 풍속이 있다. 꽃전이란 찹쌀가루 반죽에 꽃잎을 얹어서 지진 부침개를 말하는데, 이 풍속은 고려시대부터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삼짇날 후원에서 중전이 나인(內人)들과 함께 진달래꽃 꽃전을 부치기 행사를 했다고 한다. 진달래 꽃잎으로 녹말가루를 씌워 오미자 즙에 띄운 진달래 화채 역시 삼월 삼짇날의 계절음식이다.
봄꽃이 한창 피어나는 계절을 배경으로 그린 《동궐도》에는 많은 진달래꽃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숲이 우거진 지금의 창덕궁 후원에는 양지식물인 진달래를 만나기 어렵다.
참나무
우리가 흔히 참나무라는 나무는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의 6종은 따로 구분하지 않고 집합적으로 부를 때 쓰는 말이다.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는 잎이 좁고 긴 피뢰침 모양으로서 가장자리에 짧은 침 같은 톱니가 있으며 열매는 꽃이 피어 익는데 2년이 걸린다. 나머지 졸참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의 4종은 타원형의 잎을 가지며 졸참나무 이외에는 가장자리가 물결모양이다. 열매는 꽃이 당년 가을에 익는다.
참나무는 우리나라 활엽수의 대표나무이며 가장 흔히 만날 수 있다. 나무의 성질과 분포 특성은 구석기시대 유적인 충북 제천 송학면의 점말동굴을 비롯한 여러 선사시대 유적에서 움막집 재료로 이용되었다. 그 외 건축재로서는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보관건물인 수다라장 기둥의 일부, 선박재로서는 1984년 전남 완도군 약산면 어두리 앞 바다에서 인양된 고려초 화물 운반선의 선체 일부, 그리고 경남 창원시 다호리고분군(사적 327호)에서 출토된 목관재 등에 참나무가 쓰였다.
열매는 흉년에 먹을 수 있는 구황식물로 널리 이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100여건의 기민(饑民)구제 관련 기사를 찾을 수 있다.
팥배나무
창덕궁의 팥배나무는 1,450그루로서 4번째로 많은 나무다. 키 15미터, 지름 한두 아름까지 자랄 수 있으나 실제 만나는 나무는 지름 20~30cm면 굵은 편이다. 햇빛이 많이 들어오는 곳을 좋아하나 자람 터 선택이 까다롭지 않아 계곡에서부터 산등성이까지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흔히 만날 수 있다. 가을날 서리를 맞아 잎이 진 나뭇가지에 팥알보다 약간 굵고 붉은 열매가 수백수천 개씩 달린다. 열매는 작아도 배나 사과처럼 과육을 가지고 있다. 과일주를 담구기도하나, 별다른 맛이 없어서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열매는 아니며 겨울새들의 먹이로 제격이다.
중국의《사기》연세가(燕世家)에는 주나라 초기의 재상 소공(召公)이 임금의 명으로 산시(陜西)를 다스릴 때,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한다. 여기서 나온 말이 감당지애(甘棠之愛)인데, 감당을 팥배나무로 알아왔다. 그러나 우리나라 이외에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감당나무를 팥배나무로 번역하지 않는다. 팥배나무의 중국 이름은 화추(花楸)로서 감당과 관련된 이름을 갖고 있지 않다. 평범한 숲속의 보통 나무일 뿐, 팥배나무를 민가 근처에 일부러 심고 아껴야 할 귀중한 나무로 보기는 어렵다.《중국수목지》를 살펴보아도 감당이란 특정 나무는 없으며, 감당의 다른 이름인 당이나 두이 등도 돌배나무나 콩배나무 등 배나무 종류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나무들은 열매를 식용하는 나무로서 이름으로 보나 쓰임으로 보나 팥배나무보다는 소공의 감당나무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일부에서는 능금나무라는 의견도 제시하는 등 감당나무를 과일나무로 보는 견해에 무게를 두고 있다. 나무의 이런저런 특징 등을 고려해본다면 감당나무는 돌배나무 등 배나무 종류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는 생각한다.
향나무
향을 풍기는 여러 가지 식물 중에 가장 대표적인 나무가 향나무다. 다른 나무보다 방향(芳香)을 더 많이 포함하고 있으면서, 잘라 놓은 다음에도 금세 향기가 날라 가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내 뿜어주기 때문이다. 나무 색깔이 붉은빛이 도는 자주색이라 자단(紫檀)이라고도 하고 나무에서 향기가 난다고 하여 목향(木香)이라고도 부른다.
향내는 부정(不淨)을 없애고 정신을 맑게 함으로써 천지신명과 연결하는 통로가 된다고 생각하여, 예부터 모든 제사 의식에는 먼저 향불을 피웠다. 향나무는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체이자 부정을 씻어주는 정화 기능을 갖는 신비의 나무로 사랑을 받아왔으므로, 궁궐은 물론 사대부의 정원, 유명 사찰, 우물가에도 널리 심었다.
창덕궁 봉모당(奉謨堂) 앞에는 창건당시에 어디선가 옮겨다 심은 것으로 짐작되는 7백년 생 향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고, 그밖에도 궁궐의 여기저기에 수백 년 된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회화나무
회화나무는 수백 년에서 천년을 넘겨 살 수 있고 다 자라면 두세 아름에 이르기도 한다. 키만 껑충한 것이 아니라 나뭇가지가 사방으로 고루 고루 뻗어 모양이 단아하고 정제되어 있다. 그래서 궁궐이나 알려진 서원, 문묘, 양반 집 앞에 흔히 심는다. 중국에서는 회화나무를 상서로운 나무로서 매우 귀히 여긴다. 그 기원은 주나라 때 조정에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고 우리나라의 삼정승에 해당되는 삼공(三公)이 이에 마주보고 앉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에 급제하면 회화나무를 심었다고 하며, 관리가 벼슬을 얻어 출세한 후 관직에서 퇴직할 때면 기념으로 회화나무를 심었다고도 한다.
우리의 궁궐에도 중국의 예에 따라 심은 회화나무를 만날 수 있다. 창덕궁 돈화문을 들어서면 왼편 금호문으로 이어진 행각 건물을 따라 일렬로 이어 자라는 4그루가 먼저 눈에 띤다. 다시 금천교 다리 남쪽으로 금천의 오른편에 자라는 여러 그루의 아름드리 회화나무가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동궐도》에서 만날 수 있다. 회화나무는 느티나무와 같이 괴(槐)로 표기하므로 옛 문헌에서 앞뒤 관계로 구분하는데 간단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