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 막음으로 심은 영양 주사골의 시무나무와 비술나무 숲
온 나라가 사통오달로 길이 뚫린 오늘날이지만, 그래도 백두대간의 동해 끝자락 영양은 아직도 산골이란 말이 어울리는 곳이다. 영양읍 남쪽에 있는 면소재지 석보란 곳을 지나쳐 산속으로 더 들어가면 개울가에 노거수 수십 그루가 숲을 이루는 주남리를 만난다. 숲은 약 800m쯤의 거리를 두고 아래 숲과 위 숲으로 나눠진다. 마을 앞을 흐르는 인지천을 따라 나무을 심어서 만든 인공 숲이다. 이 마을은 행정구역상 주남리이나 속칭 주사골로 불린다. 아주 옛날에 강씨들이 살았던 마을로 전해지고 있으나 4백여 년 전 큰 홍수를 맞고 마을을 떠나 버렸다고 한다. 이후 17세기 중엽 재령이씨 현령공파 6대 손인 주곡공 이도(李櫂)와 주계공 이용(李榕) 형제가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새로 마을 터를 잡기 시작하였다. 두 형제는 떠나버린 강씨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우선 인지천의 상류 홍계리의 넓은 고원에서 쏟아지는 물을 다스리는 일이 급선무였다. 둑을 쌓아 물길을 바로 잡는 일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더 많은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둑을 보호하고 여름날의 쉼터가 되며 성황당을 만들어 마을 지킴이까지 할 수 있는 다기능 다목적 나무 심기부터 착수한다.
형제는 숲에 무슨 나무를 심어야 할지를 두고 고심한 것 같다. 대부분의 선비 마을은 뿌리가 비교적 깊이 들어가고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소나무 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개울가는 소나무가 반드시 잘 자라는 곳도 아니고, 또 소나무는 직근(直根)성의 나무이므로 잔뿌리가 많지 않아 땅을 붙잡고 있을 힘이 그리 세지 않다. 개울가라면 흔히 심는 왕버들도 외면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비술나무와 시무나무를 선택했다. 두 나무 모두 흔히 만날 수 있는 나무는 아니다. 왜 이런 나무를 심기로 작정하였는지 오늘날 우리가 알 길은 없지만 튼튼한 뿌리를 박고 바람막이 나무로서 적합하다고 심은 것으로 짐작한다. 그만큼 나무의 특성을 알고 심은 것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마을 숲의 수종구성은 왕버들, 팽나무, 느티나무 등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곳은 흔하지 않은 수종으로 구성된 숲이란 점에서 값어치가 크다. 훨씬 이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어야 될 만큼 보호해야할 귀중한 숲이다.
위 숲은 주사교의 서쪽 개울 흐름이 ㄴ자로 휘어지는 곳에 조성되었다. 아름이 넘은 비술나무가 대부분이며 대체로 20그루 쯤 된다. 산 쪽으로 두 그루의 소나무가 자라고 몇 그루의 느티나무, 개울 제방에 붙어서는 아까시나무가 20여 그루쯤 자란다. 간이 화장실과 의자가 놓여있는 것으로 보아 여름철에는 피서객의 놀이터가 되는 것 같다.
아래 숲은 개울을 따라 홍계리로 들어가는 도로와 산 쪽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개천가에 Y자로 숲이 이루어진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며 굵은 비술나무 고목과 조금 지름이 작은 시무나무로 대부분의 숲이 이루어진다. 아까시나무가 10여 그루를 비롯하여 말채나무, 회화나무, 호두나무, 산벚나무, 산팽나무, 옻나무, 일본잎갈나무, 쉬나무, 졸참나무가 한 두 나무씩 섞여 있다. 또 굵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길가에서 쉼터 구실을 한다. 숲 안에는 당산제를 지내던 당집 자리가 건물은 없어지고 담장이 무너진 채 방치되어 있다. 당집을 복원한다면 주변의 여러 고목들과 어울림이 좋을 것 같다. 아래 위 숲 모두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이며 아름드리 비술나무는 300여년이상이 된 것으로 짐작한다. 어린 나무도 사이사이에 있지만 대체로 2~300년은 된 고목들이 숲을 이룬다. 나무 높이는 10~22m, 가슴 높이 지름은 20㎝에서 가장 굵은 것은 거의 2m에 이른다. 숲이 완성되고 마을이 안정을 찾자 주사(做士)골이라는 지금의 속칭도 생겨난다. 두 사람이 나무을 심어 마을을 지키면서 주곡공과 주계공이란 호(號)을 따라 지은 것이라고 한다.
숲의 이름에 딴죽을 걸고 싶다. 비술나무가 숫자로도 훨씬 많고 굵기도 더 굵다. 시무나무와 비술나무 숲이 아니라 ‘비술나무와 시무나무'숲이 합리적일 것 같다.
천연기념물 제476호, 영양 주사골의 시무나무와 비술나무 숲
2007.02.21 지정, 경북 영양군 석보면 주남리 산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