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장군들의 만남 터가 된 보성 전일리의 팽나무 숲
지금으로부터 4백여 년 전, 조선은 하찮게 보아온 섬나라 일본의 일격을 받아 온 나라가 초토화 된다. 임진왜란이라는 7년 전쟁을 치루면서 비극의 현장을 지켜 본 남부지방 노거수들은 전설을 품고 자라는 경우를 흔히 만난다. 전설 따라 멀리 보성만의 안자락에 자리 잡은 팽나무 숲을 찾아가 본다.
전남 고흥반도의 서쪽, 길게 육지로 들어온 만(灣)이 보성만이다. 크고 작은 강들이 바다로 유기물을 씻어 내려다 주어 어족자원이 풍부한 탓에 삶이 조금은 여유가 있던 곳이다. 이 만의 중간쯤에 옛날 간척지로 만들어진 꽤 넓은 평지가 있고, 굵은 팽나무 몇 그루가 길게 늘어서 조용히 마을을 지키는 곳이 있다. 행정구역상 보성군 회천면 전일리, 속칭 외래마을이라는 50여호 남짓한 전형적인 시골 마을 앞 작은 개천 둑을 따라 총연장 150m에 걸쳐 심겨진 줄 나무를 만난다. 여러 겹으로 나무를 심은 것이 아니라 한 나무씩의 외줄나무 숲이다. 처음에는 더 길게 상당히 많은 나무가 자랐을 것이나 이제는 팽나무18그루, 푸조나무 1그루가 겨우 남아 있어 옛 모습의 일단을 짐작케 할 뿐이다. 나무를 만나는 첫 느낌은 노거수답지 않게 싱싱하고 풋풋함이다. 생육상태가 너무 좋고 줄기가 썩어 보기 싫은 충전처리를 한 개체도 드물다. 나무 높이는 9~15m에 이르고, 가슴높이 둘레는 대부분 한 아름이 훨씬 넘는다. 가장 큰 나무는 세 아름이 넘는 둘레 약 5m에 달한다. 현재의 나무나이는 굵은 나무가 약 450년, 좀 작은 나무도 300년 이상으로 짐작하고 있다.
이곳에서 북으로 멀지 않는 곳, 장흥군 장동면 반산리에는 정유재란 당시의 육지 전투를 생생하게 기록하여 또 다른 난중일기를 남긴 정경달 장군을 모신 반곡사(盤谷祠)가 있다. 바다 전투기록인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와는 달리 ‘육지의 난중일기’라고 부를 귀중한 기록을 남긴 분이기도 하다. 이 숲은 1566년 정경준공이 마을에 정착을 하면서 심었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공의 동생 정경명 장군이 여기서 이순신 장군과 서로 만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정경달 및 정경준 장군을 비롯하여 이 일대의 영광 정(丁)씨 일족들은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한 것 같다. 실제로 이 숲에서 참전한 정씨 일족의 장군들과 이순신장군이 만남을 가졌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멀리 않는 반곡사에 이순신 장군을 모시고 있는 등 여러 정황으로 보아 임진왜란 당시 장군들의 모임 방 구실을 한 것으로도 짐작이 되기도 한다.
바닷가의 숲은 몇 가지 기능이 있다. 고기가 모여들게 하는 어부림 역할과 짠 바람을 막아 농토를 보호하는 방풍림이고, 때로는 비보(裨補)란 이름으로 풍수지리설에 따라 허(虛)한 곳을 보완하자는 목적도 있다. 이 숲은 방풍과 비보를 겸했다. 수종 선정에서부터 조상들의 지혜로운 숨결을 느낀다. 팽나무는 짠물에 강하며 빨리 자라고 오래 살 수 있다. 금상첨화로 나무의 재질은 무엇으로 만들어 쓰던 모자람이 없는 나무다.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고 덧 붙여 마을 숲으로서 사람들의 쉼터로도 함께 할 수 있는 다목적 숲이다. 팽나무 18그루 중 두 그루는 서로 몸을 맞대고 한 몸이 되어 버린 연리목이다. 먼 옛날 이루지 못한 마을 젊은이들의 사랑이 이렇게 죽어서 연리목으로 결실을 이룬 것이라고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 본다. 마을사람들은 새잎이 일시에 돋으면 풍년이 들고 조금씩 나면 흉년이 든다고 하여 기상목으로서도 기능을 한 것으로도 보인다.
숲은 아직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 영광정씨 세장비(世庄碑)를 비롯하여 가문의 선조를 기린 최근의 비석이 입구에 세워져 있고 마을의 여러 가지 농사용 잡동사니가 여기 저기 굴러다닌다. 또 나무와 너무 가까이 붙은 가옥 등은 숲의 품위에 걸맞지 않다. 가장 최근 지정된 새내기 천연기념물이지만 하루 빨리 정비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천연기념물 제480호, 보성 전일리의 팽나무 숲
2007.08.09 지정, 전남 보성군 회천면 전일리 3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