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관산의 영험으로 마을을 지켜주는 장흥 삼산리 후박나무 삼형제
서남해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멀리 강진반도로 달려가 본다. 김유신을 사랑한 천관녀가 숨어 살았다는 천관산(723m)을 가운데 두고, 동서로 널찍하게 펼쳐진 평야가 넉넉하고 편안함을 가져다주는 고장이다. 중부지방은 삭막한 겨울이지만 차창을 스치는 남도의 풍경에는 푸르름이 곳곳에 남아있다. 늘 푸른 잎을 가진 나무들이 훨씬 많아서다. 후박나무를 비롯하여 동백나무, 광나무, 생달나무, 사스레피나무 등 이름도 생소한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장흥 관산읍에서 남으로 5km쯤의 삼산리 산서마을 입구의 마을회관 앞에서 천연기념물 후박나무 고목을 만날 수 있다. 후박나무는 예부터 남해안에 널리 자라는 감나무 잎처럼 긴 타원형 잎을 일 년 내내 달고 있는 나무다. 추위를 싫어 할뿐 자람 터의 낯가림이 심하지 않아 아무 곳에나 심을 수 있고 쓰임도 넓다. 아름드리로 자라는 몸체는 재질이 좋아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의 재료가 되기도 했고, 껍질은 위장을 다스리는데 특별한 효능이 있다고 한다. 후박나무란 이름은 인정이 두텁고 거짓이 없음을 나타낼 때 쓰는‘후박하다’에서 따온 이름으로 짐작하고 있다. 까다로움을 피우지 않고 잘 자라주며 나무의 바깥모양이 너그럽고 편안해서다. 껍질은 쩍쩍 갈라져 버리는 보통의 나무들과는 달리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매끈한 피부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이 후박나무는 천관산의 영험을 이어 받아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나무다. 고기잡이 나가기 전 어부들은 이 나무를 찾아 정성어린 절이라도 한번 하고 가야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나무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높이 11m, 가슴높이 둘레는 작은 나무가 2.0m, 큰 나무 둘은 3.1m에 이른다. 둘은 노출된 뿌리가 서로 붙어 있을 만큼 가깝고 한 나무는 3m쯤 떨어져 있다. 나뭇가지가 뻗은 폭은 동서, 남북 모두 10m정도이다. 전설대로 심겨질 당시의 그 나무라면 나이는 400년이 넘었다. 굵기로는 심을 당시의 그 나무로 보기는 어렵고 아마 아들 나무쯤의 후계목인 것 같다.
대체로 후박나무가 혼자 자랄 때는 가지가 넓게 퍼져 버섯 갓 모양의 수관(樹冠)을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이곳 후박나무만큼의 아름다운 모습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다. 대부분의 나무들이 공간을 찾아 함부로 가지를 들쭉날쭉하게 뻗기 마련이지만, 멀리서 바라 본 이곳 후박나무 삼형제의 바깥 모습은 가장자리 선이 깔끔한 반달형이다. 전체적인 모습은 아무리 둘러봐도 한 나무이다. 나무 밑에 들어가 보아야 세 나무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셋이 가까이 자라면서도 서로 살겠다는 아우성이 아니라 삶의 공간을 사이좋게 나누어 가지면서 어울림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세 나무가 심겨진 연유가 궁금하다. 원래 이곳은 임진왜란 직전인 1580년 경 경주 김씨가 처음 정착하였다고 한다. 나라가 어수선 할 때 왜구의 출몰이 잦은 여기에 생활 터전을 잡은 선조들은 우선 주역의 음양사괘(四卦)에 따라 동서남북에 각각 나무를 심고 땅의 드센 기운 탓으로 닥쳐올 불행을 다스리고자 하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다른 나무들은 없어지고 이곳 후박나무만 남았다.
한 그루가 아니라 모여 있는 세 그루가 마을의 당산나무로 남아있는 곳은 다른 데서 찾기 어렵다. 아마 삼신(三神)사상에서 유래되지 않았나 싶다. 멀리 단군신화에서 환인·환웅·단군왕검의 삼신이 등장한다. 삼(三)은 음양의 조화가 최고에 이르는 숫자로서 완성의 상징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삼신할머니를 비롯하여 삼세번, 삼세판, 만세삼창까지 유난히 삼(三)을 좋아한다. 마을 이름까지 세 산으로 둘러싸였다는 삼산리(三山里)이니 이 후박나무와 삼이란 숫자는 인연이 깊다. 천연기념물은 이외에도 고목으로서는 212호 진도 관매도, 299호 남해 창선도, 345호 통영추도 후박나무가 있으며 숲은 123호 부안 격포리 후박나무 숲이 있다. 그러나 나무의 아름다움으로 친다면 이곳 후박나무가 단연 으뜸이다.
천연기념물 제481호, 장흥 삼산리 후박나무
2007.08.09지정, 전남 장흥군 관산읍 삼산리 324-8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