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 백곡리의 최고명품 감나무 한 그루
우리의 시골은 초가집 마당가에서 익어가는 감과 멍석위에 널리는 붉은 고추로 가을은 점점 깊어간다. 하지만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이런 서정적인 농촌모습도 대부분 사라져 버렸다. 초가집은 민속박물관을 가야 만날 수 있고 고추는 인공건조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래도 아직까지 집 둘레의 감나무만은 흔히 그대로 남아 시골 정취를 되살려 준다.
멀리 의령 땅에 자라는 우리나라 최고 명품 감나무 한 그루를 만나러 가본다. 남해고속도로 함안IC를 빠져나와 북으로 10km쯤 나지막한 산을 뒤에 두른 골안마을 옆에 덩그러니 홀로 자란다. 앞으로 펼쳐지는 남강하류의 넓은 들판이 아늑하고 풍요로워 보이는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다. 일대의 흙이 희게 보인다고 하여 행정구역 이름은 백곡리(白谷里)다.
감나무는 높이 20.0m, 가슴높이 둘레 3.7m, 가지 뻗음은 동서방향 19.3m, 남북방향 15.0m 정도이다. 알려진 우리나라 감나무 중에는 가장 크고 굵다. 땅위 3m쯤에서 여럿으로 갈래졌으나 가운데의 원줄기와 좌우 2개의 굵은 가지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잘라내 버렸다. 이 일대는 감나무골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부터 감나무가 많았으며, 그 중 한 그루가 살아남은 것이다.
대체로 15세기경 담양 전(田)씨 전훈선생이 이웃 용덕면 죽전리에 들어오면서 전씨들의 마을로 자리 잡게 되었다. 남강을 끼고 있는 가현리와 백곡리는 임진왜란 당시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선조를 모셨고 나중에 영산현감까지 지낸 전시우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나무 옆에는 영모재라는 전씨문중 재실이 있고, 부근에는 전씨들의 유허비와 숭모각등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감나무의 규모로 보아서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생을 중심으로 전씨 일족들이 마을을 새로 정비할 때 심었다고 생각되며 나이는 약 400년쯤으로 짐작된다. 밭둑의 대추나무, 야산 자락의 밤나무, 마당가의 감나무, 숲속의 돌배나무는 제사상의 맨 앞 과일 줄에 올라가는 조율시리(棗栗柿梨)에 반드시 챙겨야 할 과일나무들이다.
감나무를 비롯한 과일나무들은 과일을 매다느라 기력을 너무 소모해 버리는 탓에 오래 살기 어렵다. 사람들은 더 굵고 맛있는 과일나무를 만나면 원래 나무를 배어버리고 다시 심기 일쑤다. 한때 우리나라 감나무는 골프채의 헤드를 만드느라 거의 잘려 나갔다. 지금이야 티타늄이나 메탈이지만 30여 년 전에는 감나무 헤드를 최고품으로 쳤다. 이처럼 여러 이유로 보통 감나무는 백년을 살아남기 어려운 것에 비교하면 최고의 고목나무다. 그래도 자람 상태는 좋은 편이다. 느티나무나 은행나무 고목처럼 웅장한 맛은 없어도 적당한 잎 펼침과 가지 뻗음으로 마치 단정하고 깔끔한 노신사를 보는 듯하다. 아직도 생식활동을 하여 열매를 매단다. 그래도 세월의 무게는 어쩔 수 없는 듯, 감꽃은 잎사귀사이에서 제법 찾을 수 있으나 실제 가을에 익는 감은 많아야 10여개 정도라고 한다.
나무줄기에는 수백 년을 살아오면서 받은 고통의 역사가 그대로 남아있다. 원줄기는 울룩불룩 크고 작은 혹 투성이이며 세로로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다. 수없이 상처가 생기고 낫는 과정을 반복했다는 증거이다. 옛날에는 나무속이 텅 비어 있어서 아이들의 놀이터였고 마을 귀신이야기에 단골로 등장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외과수술이란 이름으로 우레탄 충전제로 꽁꽁 막아버렸다.
감나무는 중국 중남부가 원산지로서 동북아시아에만 있는 온대과일나무이다. 우리나라에는 벌써 청동기시대에 들어온 것으로 보이나 문헌으로 나타나는 것은 고려 중엽이후이다. 오늘날처럼 제사상에 감이 올라가기 시작한 것은 조선조 들어서이다. 세종실록 오례(五禮)에는 종묘에 천신할 때 10월의 과일로 감이 들어 있다. 민간에는 감이 설사를 멎게 하고 배탈을 낫게 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강한 수렴(收斂) 작용을 하는 타닌이 장의 점막을 수축시켜 설사를 멈추게 한다는 것이다. 감은 홍시를 만들어 높은 당도를 얻을 수 있고, 곶감으로 만들어 두면 다른 어떤 과일보다 오랫동안 저장 할 수 있어서 더욱 사랑을 받았다. ‘동의보감’에는곶감은 몸의 허함을 보하고 위장을 든든하게 하며 체한 것을 없애준다.고 했다. 또홍시는 심장과 폐를 눅여주며 갈증을 멈추게 하며 식욕이 나게 하고 술독과 열독을 풀어준다고도 했다. 감나무는 열매만이 아니고 나무도 귀중한 쓰임이 있다. 검은 줄무늬가 들어간 감나무는 특히 먹감나무라고 하여 옷장, 문갑등 조선시대의 가구재로 널리 쓰였다.
<주변 둘러보기>
감나무에서 6km쯤 북으로 올라간 성황리에는 천연기념물 359호 소나무를 만날 수 있다. 다시 6km쯤 더 올라가면 곽재우 장군의 생가이다. 지난 5월호에 소개한 바 있는 493호 현고수 느티나무와 장군이 어릴 때 올라가서 놀았다는 302호 은행나무가 있다. 남쪽으로 남강에 걸린 백곡교를 건너서 잠시면 346호 함안 대송리 늪지식물이다. 멸종위기 식물로 지정된 가시연꽃이 볼만하다.
천연기념물 제492호, 의령 백곡리 감나무
2008.03.12 지정, 경남 의령군 정곡면 백곡리 576-1
GPS 좌표 : N35°21′21.0″ E128°21′5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