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매어두는 갯마을 지킴이로 4백년을 살아온 고창 수동리 팽나무
전북 부안군과 고창군 사이의 서해안에는 변산반도를 끼고 그림 같은 풍광으로 널리 알려진 곰소만이 있다. 만(灣)의 시작점은 고창군 부안면 수동리다. 부안군이란 또 다른 행정구역이 인접하고 있어서 이곳 고창의 부안면은 헷갈리는 이름이다. 옛날 이 일대는 억센 서해바람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넓은 갯벌이 펼쳐 있던 곳이라,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가사처럼 평화롭고 소박함이 배어있는 마을이었다. 일제강점기 간척사업이 이루어진 탓에 주변이 많이 변했지만 지금도 시간을 멈추어 두고 한가로움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수동리 대동마을 앞 나지막한 언덕이 바다로 떨어지는 끝자락에는 400년 된 팽나무 고목 한 그루가 고고하게 서 있다. 나무는 넓은 시골 들녘에서 서쪽으로는 복분자딸기 밭을 깔고 동쪽으로는 간척지를 두르고 있다. 나무 크기는 높이 11.6m, 뿌리목 줄기 둘레 8.6m, 가슴높이 둘레 6.6m, 가지 뻗음은 동서25.0m, 남북 방향 20.0m에 이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굵은 팽나무이다. 나무의 모양새는 전체적으로 타원형이면서 높이에 비하여 옆으로의 퍼짐이 넓어 마치 커다란 우산을 펼쳐 놓은 듯하다. 장애물이 없고 간척지의 평야가 배경이 되어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것처럼 아름답다. 겨울날이면 가지 끝으로 갈수록 섬세한 가지가 촘촘히 뻗어 있어서 여름 팽나무 못지않게 우아하고 단정해 보인다.
나무의 밑동은 꼬이고 비틀리고 울룩불룩하여 기괴한 모양을 나타낸다. 원래 팽나무는 고목이 되면 곁뿌리가 굵게 발달하는 탓에 이런 모양이 되기도 하지만, 이 나무는 더 심하게 비꼬인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마을 앞이 지금처럼 간척지로 매립되기 전 바닷물이 바로 나무 아래까지 들어왔을 때는 배를 이 나무에 묶어 두었다고 한다. 파도에 배가 흔들리면 밧줄은 나무껍질을 긁어내기 마련이다. 팽나무는 다른 나무와 달리 고목이 되어도 껍질이 매끄럽고 얇으니 밧줄의 시달림을 더 크게 받는다. 상처가 생기고 딱지가 앉은 아픔을 수백 년 반복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셈이다. 예부터 ‘섟’이라 하여 물가에 배를 매어 두기 좋은 곳을 일컫는 우리말이 있다. 대부분의 섟은 말뚝 박기 등 인공시설물로 보완하여야만 제대로 사용할 수 있었으나, 여기는 팽나무 한 그루가 수백 년을 지키면서 배를 매는 말뚝을 대신하였으므로 천연의 섟 자리이었다.
팽나무는 오래 살며 아름드리로 크게 자라고 가지를 많이 뻗어 여름이면 무성한 잎을 펼친다. 그래서 느티나무와 함께 쉼터의 기능을 하는 당산나무로 널리 심었다. 이 나무는 배를 매는 역할이 원래의 임무였고, 이 팽나무보다 더 굵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마을의 당산나무로서 좀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노쇠하여 죽어 없어지면서 팽나무가 당산나무로 이어받았다. 한가위 때는 당산제와 줄다리기 등 민속놀이를 벌이면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는 나무이다.
팽나무는 늦봄에 자그마한 노란 꽃이 지고 나면 가운데에 단단한 핵이 있고 주위에는 육질로 둘러싸인 ‘팽’이란 열매가 달린다. 아직 익지 않은 초록색 팽은 팽총의 총알로 옛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이었다. 가을이면 붉은 끼가 도는 황색으로 익는 팽은 달콤하므로 배고픈 시골아이들의 좋은 간식거리가 되기도 했다.
팽나무는 중부지방에 자라기도 하지만 남부지방 바닷가에서 주로 만날 수 있다. 2007년 산림청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보호수 팽나무는 약 1200본으로서 느티나무 7100본 다음으로 많고 이중 약 75%인 900여본이 전남, 경남, 제주에 자란다. 팽나무는 곰솔과 함께 짠물과 갯바람을 싫어하지 않는 내염성(耐鹽性)이 강한 나무로 유명하다. 그래서 남부지방에서 부르는 팽나무의 이름은 포구나무다. 배가 들락거리는 갯마을, 포구(浦口)에는 어김없이 팽나무 한 두 그루가 서 있는 탓이다. 나무의 특성은 물론 자라는 곳을 그림처럼 떠 올릴 수 있는 포구나무란 이름이 팽나무란 정식 이름보다 훨씬 더 정겹다.
서해안 고속도로 선운산IC에서 내려 좌회전하면 바로 고창군 부안면 소재지다. 734번 지방도로로 약 3km쯤 올라간 삼거리에서 대동마을로 우회전하여 좁은 농로를 500m쯤 들어가면 복분자딸기를 재배하는 밭둑 끝에 나무가 있다.
<주변 둘러보기>
팽나무를 보고 되돌아 나와 서해안 방향으로 8km쯤 달리면 금산사와 함께 전북지역 2대사찰의 하나인 선운사다. 주차장 동쪽 개울 건너에는 상록 덩굴나무인 천연기념물 367호 송악이 암벽을 덮고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선운사 바로 서쪽 산자락에는 서정주 시인의 ‘선운사 동백꽃’으로 잘 알려진 184호 동백나무 숲이며, 3km쯤 떨어진 도솔암 밑에는 빼어난 모양새가 돋보이는 354호 장사송이 자란다.
고창읍에서 멀지 않은 고수면 은사리 문수사 463호 단풍나무 숲은 11월 20일 경에 물드는 단풍이 일품이다.
천연기념물 제494호, 고창 수동리 팽나무
2008.04.30지정, 전북 고창군 부안면 수동리 446 외
GPS 좌표 : N35°32′01.4″ E126°39′4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