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우(梨花雨) 흩날리는’ 정읍 두월리의 아름다운 청실배나무
전북 정읍은 정읍사(井邑詞)란 가장 오래된 한글 가요의 고장으로 지명에 친숙하다. 정읍시에서 동쪽으로 임실군과 순창군의 경계지역인 내륙 깊숙이 옥정호란 호수가 있다. 1965년 섬진강 상류를 가로 막아 만든 다목적 인공 호수로서 만경평야의 젖줄 구실을 한다. 내장산 국립공원과도 가까우며 주변의 산세가 험하여 어느 계절에 달려가도 아름다운 풍광이 그림 같다. 찾아가려는 두월리는 옥정호를 앞에 두고 20여호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다. 청실배나무는 마을 뒤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텃밭의 약간 남향 경사지에 자란다.
우선 청실배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부터 알아보자. 청실배나무는 산돌배나무의 변종으로서 지금의 개량 배나무가 나오기 전의 전통 우리 배나무다. 배나무에 관한 기록은 고구려 양원왕2년(546) ‘봄 2월, 서울에 가지가 서로 맞붙은 배나무가 있었다(王都梨樹連理)’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처음이다. 고려에 들어서는 명종 8년(1177) 2월 ‘민가에 넘어져 있던 배나무가 저절로 일어서서 가지와 잎이 다시 돋아났다.’는 내용을 비롯하여 명종 18년(1188) 3월 ‘배나무 등 과일 나무들을 때맞추어 심어라’고 한 고려사의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그 외 원종 원년(1125)에서 의종 21년(1166)의 약 40년 사이에는 8월에 ‘배나무 꽃이 피었다’는 기록이 네 번씩이나 나온다. 이를 보아 당시에도 널리 재배하고 있던 배나무가 이상 기후로 큰 타격이 받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선왕조에 들어서면 궁중의 과일나무와 꽃나무를 관장하는 상림원(上林園, 훗날 장원서)에서 배의 품종 및 재배기술을 다룰 만큼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왕조실록에서 ‘배나무’로 53건이나 검색되며 양화소록, 산림경제, 임원경제지, 색경(穡經) 등의 문헌에서는 심기, 키우기, 번식, 병충해방제, 우량 품종 선발 등 배나무에 관련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옛사람들은 산에 자라는 돌배나무 중 맛이 좋고 알이 굵은 나무를 골라내어 키우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말하는 ‘선발육종’의 기법을 우리 선조들은 일찍부터 도입한 셈이다. 이렇게 찾아낸 품질이 우수한 재래종 배나무 종류는 황실배나무, 청실배나무, 취앙네, 문배나무, 남해배나무 등이 옛 문헌에 남아있다. 1920년경에 조사한 자료에는 무려 56개의 우량 품종 배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06년 서울 뚝섬에 원예시험장이 들어서면서 개량종에 밀려 재래종 배나무는 거의 사라져 버린다.
선조들이 찾아내어 키우던 여러 종류의 전통 배나무 대부분은, 실물은 사라지고 이름만 남았지만 청실배나무만은 명맥을 유지하여 큰 나무로 살아남았다. 이곳 두월리 이외에도 천연기념물 386호 진안 은수사 청실배나무가 있으며, 아직 보호수로도 등록되지 않은 청실배나무가 여러 그루 더 있다. 청실배는 일찍 익으며 처음 푸른빛을 띠나, 따다 두면 차츰 노랗게 되고 즙이 많아 감칠맛이 일품이다. 옛 기록으로는 춘향전에서 만날 수 있다. 이도령과 성춘향이 첫날밤을 치루기 전, 향단이 차려온 주안상에 올라오는 여러 과일의 하나로 청실배(靑實梨)가 들어있다.
이곳 두월리 방성마을 청실배나무는 둘레가 한 아름 반(230cm) 정도이며 키는 20m에 이른다. 외줄기로 곧게 뻗었고 높이 4m에서 둘로 갈라지며, 10m쯤이나 올라가야 비로소 가지가 나와 둥그런 수관(樹冠)을 만든다. 수확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자그마하게 키워가는 보통의 과일나무와는 전혀 다른 모양새다. 이 나무의 참 모습은 4월 중순경 꽃이 만개할 때 만나야 제 맛이다. 마을 한 가운데 자리 잡은 탓에 돋보일 뿐만 아니라 웅장하고 기품이 묻어난다. 높다란 나뭇가지 사이로 봄바람이라도 스쳐 지나가면 흩날리는 배꽃 모습이 장관이다. 정읍과 이웃한 부안 출신 기생 매창(梅窓ㆍ1513~1550)의 시 한수가 절로 흥얼거려진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도다’
매창은 이 나무처럼 헌칠하게 잘생긴 유희경과 19세에 만나 ‘열아홉 순정’을 받쳐 사랑하였으나 2년 만에 천리 길 한양으로 훌쩍 떠나 버리자 시를 지어 읊조리면서 이별의 아픔을 달랬다고 한다.
마을은 남원양씨가 주로 모여 사는 집성촌으로서 10대 선조가 처음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를 기준으로 입향 당시에 나무를 심었다고 보면 대체로 나이는 약 300년으로 짐작된다. 본래 세 그루가 있었으나 두 그루는 없어지고 이 나무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당산제를 지내는 나무는 마을 서쪽에 따로 있으며 특별한 전설을 가진 것은 아니나, 과일 나무로서 주인을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 전체가 보호하여 오늘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천연기념물 제497호 정읍 두월리 청실배나무
2008.12.11 지정, 전북 정읍시 산내면 두월리 14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