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 영휘원 산사나무
서울의 동대문 밖 청량리에 홍릉(洪陵)이 있다. 정확히는 ‘홍릉터’가 맞는 말이다. 원래 이곳의 명성왕후 묘를 홍릉이라 하였으나, 1919년 고종이 승하하시자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에 왕릉을 만들면서 명성왕후의 묘를 옮겨가 합장하고 새로 홍릉이라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홍릉터는 산림과학원 홍릉수목원이 들어서 있다. 그 앞쪽 세종대왕기념관과 이어서 영휘원(永徽園)이라는 언제 찾아가도 한적한 무덤을 만날 수 있다. 안쪽으로 들어가 영휘원의 제실 앞을 약간 비켜서서 동그랗게 돌 둘림을 하고, 비스듬히 서있는 늙은 산사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한 아름이 조금 넘는 둘레 203cm, 키 9m정도의 흔히 만날 수 있는 크기의 고목나무이다. 그러나 평범해 보이는 이 나무가 가장 최근에 나무나라 최고의 영예인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이제까지 문화재청에서 지정하는 천연기념물 나무는 나이가 많고 덩치가 큰 은행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등 주로 당산목 위주였다. 반면에 옛 사람들의 실제 생활과 깊은 관련이 있는 다양한 종류의 전통나무들은 오히려 소외되고 있었다. 다행히 앞으로는 선조들의 생활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는 전통나무 중 수종을 대표할만한 나무들을 새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한다고 한다. 산사나무는 전통나무의 일종으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나무이었으나, 대부분 없어지고 이 나무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산사나무로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이다. 나이는 150~200년 정도이다.
산사나무가 이 자리에 살아남은 전후 사정을 잠시 알아보자. 영휘원은 고종의 두 번째 왕비 순헌황귀비 엄씨의 무덤이다. 처음 명성왕후를 모시는 상궁으로 있다가 어느 날 고종의 눈에 들어 성은(聖恩)을 입자 시기한 명성왕후에 의하여 쫓겨난다. 1895년 왕후가 무참히 시해되자 고종은 엄상궁을 불러 자기 곁에 두었고, 1897년 영친왕 이은이 태어난다. 엄귀비는 나이 44세에 얻은 아들을 끔찍이도 사랑했으나 1907년 불과 11살에 유학이란 이름으로 일본에 보내야만 했다. 아들과 헤어지고 4년 남짓인 1911년, 58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하고 이곳 영휘원에 묻힌다.
청량리는 성현의 ‘용재총화’ 에서 도성 내외 경치가 좋은 곳으로 꼽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숲이 우거지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명당자리이니 수많은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을 터, 산역(山役)을 하면서 많은 나무가 잘려 나갔으나 산사나무만은 살아남았다. 주위에 다른 아름드리나무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일부러 남겨 놓았다고 생각된다. 산사나무의 열매인 산사자(山査子)는 감기기침은 물론 소화불량까지 약으로 널리 쓰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으며 산사떡, 산사정과로 만들어 먹기도 했다. 이렇게 귀중한 나무이니 묘역의 지킴이로서 남겨 둔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다시 역사는 흘러 일본에 간 영친왕은 1920년 일본 왕족인 이방자 여사와 강제결혼을 하고 다음해인 1921년 8월 18일 첫 아들 이진(李晋)이 태어난다. 하지만 불과 9개월 만인 1922년 5월 11일 원인도 모른 채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임금인 순종은 이를 불쌍하게 여겨 영휘원 옆 자리에다 조촐한 무덤을 만들어 주고 숭인원이라 했다. 영휘원 출입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 쪽에 있는 규모가 좀 작은 무덤이다. 결국 엄귀비는 어린 손자와 같이 묻혀있는 셈이다.
약 열매를 많은 백성들이 나누어 갖기를 바라는 엄귀비의 뜻이 담긴 듯, 오늘날 이 산사나무는 고목나무로서는 보기 드물게 나무 전체가 온통 열매로 뒤덮인다. 줄기도 다른 산사나무와는 달리 굵은 주름이 깊이 패여 있다. 마치 굴곡 많고 처연한 조선왕조 마지막 사람들의 기구한 운명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천연기념물 제506호 서울 영휘원 산사나무
2009.10.15 지정,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2동 205 영휘원
GPS 좌표 : N37°35′21.3″ E127°02′3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