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교가리 느티나무
이 느티나무는 높이 약 11.5m, 가슴높이 둘레 9m, 가지 펼침은 사방 20m쯤 된다. 원래는 높이가 25m이었으나 1947년 폭풍우 때 가운데가 분질러 져 버렸다. 새로 나온 가지가 너무 가늘어 줄기의 굵기와 균형이 맞지 않는다. 작은 로터리의 가운데 자라며 주위는 상가이고 나무 밑은 주차장으로 쓰이기도 한다.
고려 공민왕 4년(1355)에 큰 화재가 있어 거의 죽을 뻔 한 이 나무를 한 도승이 와서 소나무와 느릅나무 뿌리로 나무의 구멍을 채우고 진흙으로 덮어 살렸다고 한다. 따라서 나이는 1200년경부터 자라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므로 거의 800살에 이른다. 다시 조선 고종 22년(1885)에도 나무에 화재가 나서 곧 죽게 생겼으나 역시 ‘나무뿌리’ 처방으로 되살아났다고 전한다. 이 나무에는 신령한 기운이 있어 예부터 이 나무 근처에는 호랑이나 표범 등이 접근하지 못했다고 하며, 마을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던 당산나무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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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 국도를 타고 가다 근덕면 소재지인 근덕에 내려선다. 나무는 읍내의 교가리 옛 장터에 높다랗게 축대를 쌓아 놓은 도로의 가운데 자란다.
강원 기념물 제14호, 1971.12.16, 강원 삼척시 근덕면 교가리 650-15, GPS 좌표 : N37°22′41.0″ E129°13′44.0″
삼척 안의리 모과나무
이 모과나무는 높이 12.5m, 가슴높이 둘레 105cm, 가지 펼침은 동서방향 9.8m, 남북 방향 9.7m에 이른다. 땅위 2m정도까지는 하나의 줄기로 올라가다가 그 위는 여러 갈래로 가지가 뻗어 있다. 가지는 옆으로 퍼지는 것이 아니라 수직에서 약간 벌어져서 자란다. 줄기에는 큰 공동이 생겨 있으며 불에 탄 흔적까지 있다.
언재 누가 어떻게 심었는지는 알려 있지 않다. 화전민이 경작하던 밭 위쪽에 자라며 바로 옆에는 폐가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모과는 예부터 약제로 이용되었으므로 화전민들이 일부러 심었거나, 아니면 일대가 옛날 절터로도 보이므로 스님들이 심었을 가능성도 있다. 나이는 다른 곳의 굵기와 비교하여 보면 대체로 300년 정도가 아닌가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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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시에서 태백으로 가는 38번 국도를 타고 가다 보면 오른 쪽으로 영경묘, 준경묘, 환선굴 입구를 만난다. 환선굴 입구를 지나쳐 태백으로 올라가다 한라시멘트를 지나 금방 오른쪽으로 ‘모과나무 입구’라는 간판을 만난다. 우회전하여 좁은 시멘트도로로 들어서서 약 1km쯤에 안정사란 작은 절을 만난다. 차는 절 주차장에 세워두고 개울을 따라 10분쯤 올라가면 옛 화전민 폐가 옆에 나무가 자란다.
강원 기념물 제85호, 강원 삼척시 신기면 안의리 207, GPS 좌표 : N37°19′39.8″ E129°04′35.1″
정선 봉양리 뽕나무
봉양리의 뽕나무는 높이 25m, 가슴높이 둘레 2.5m로 전국에서도 크고 오래된 뽕나무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나이는 5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나무의 유래에 대하여는 여말선초 경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제주 고씨의 중시조가 관직을 버리고 정선으로 내려오면서 심은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나무는 지방유형문화재 89호로 지정된 고학규씨 가옥 대문 입구 오른 쪽에 2그루가 나란히 자란다. 정선 고학규 가옥은 여말선초(麗末鮮初) 제주 고씨 중시조가 낙향하여 지은 목조(木造) 건축물로 정선읍 내 현존하는 가옥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나무는 낙향 당시에 옮겨 심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대가 고려 때부터 상마십리(桑麻十里)로 불리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부터 자라던 여러 그루의 뽕나무 중 일부가 살아남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예부터 뽕나무를 키워 누에를 치고 비단을 짜는 일은 농업과 함께 농상(農桑)이라 하여 나라의 근본으로 삼았다. 고구려 동명왕 때와 백제 온조왕 때 농상을 권장하였고, 초고왕 때는 양잠법과 직조법을 일본에 전해 주었다한다. 1933년에 일본에서 발견된 신라의 민정문서에도 뽕나무재배 기록이 있다. 고려 때에도 누에치기를 권장하였고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왕비가 친히 누에를 치는 친잠례(親蠶禮)가 거행되었으며, 또한 잠실(蠶室)이라 하여 누에를 키우고 종자를 나누어주던 곳을 따로 설치할 만큼 나라의 귀중한 산업이었다. 뽕나무의 열매인 오디를 상실(桑實) 혹은 상심(桑椹)이라 하는데, 이를 건조시켜 한약재로 쓴다. 이뇨효과와 함께 기침을 멈추게 하고 강장작용이 있으며 기타 여러 질병의 치료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오래된 뽕나무 그루터기에서 자라는 상황(桑黃)버섯을 비롯하여 뽕잎을 먹고 자란 누에 그 자체도 바로 약제로 쓰일 만큼 뽕나무는 양잠에 필요한 나무일뿐만 아니라 약나무로 각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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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읍내의 한 가운데 군청 옆에 자란다.
강원 기념물 제7호, 1971.12.16, 강원 정선군 정선읍 봉양리 217-1, GPS 좌표 : N37°22′.36.7″ E128°39′.49.2″
강릉 운산리 은행나무
강릉 운산동 맨 남쪽 집 몇 채가 겨우 농촌 마을의 명맥을 유지하는 작은 마을과 7번국도 사이의 야산 자락에 자란다. 주위가 우거져 나무는 도로에서 볼 수 없으며 마을로 내려가야 한다. 나무는 높이 24m전후, 가슴높이 둘레 6.8m에 이르나 가지 펼침은 동서남북 방향 모두 10여m 남짓하다. 동쪽으로는 거의 한 아름이나 되는 맹아가 돋아나와 원줄기와 같은 높이로 곧게 자라고 있다.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으나 나무의 규모 등으로 미루어 1600년경부터 자라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암나무이며 전설에는 나무에 큰 구렁이가 있어서 마을의 재앙을 막아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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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길이 간단하지 않다. 미로처럼 생긴 마을농로로 찾아 들어가기가 어렵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7번국도 삼척방향으로 달리다가, 강릉 시내를 벗어나면 오른 편으로 구 도로가 그대로 남아 긴 공터처럼 생긴 곳이 있다. 공터 입구에 차를 세우고 동쪽으로 길을 건너 밭으로 내려가면 야산 자락에서 나무를 만날 수 있다.
강원 기념물 제29호, 강원 강릉시 운산동 432-1, GPS 좌표 : N37°43′42.4″ E128°55′50.9″
삼척 늑구리 은행나무
급경사지 옛날 화전(火田)으로 일군 밭 가운데 나무가 자란다. 주위에 인가는 물론 나무 한 그루 없어서 더 웅장해 보인다. 이 나무는 키 20m, 가슴높이 둘레 12.6m에 이르는 굵은 나무다. 그러나 둘레가 이렇게 굵은 것은 원줄기가 죽고 맹아가 돋아나 사방을 둘러쌓았기 때문이다. 나무 나이는 1,500년이 되었다고 하나 믿기 어렵고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300년짜리 금성단 은행나무와 부부사이라는 전설이 있으니, 이와 비교해 보면 500년 전후가 아닌가 짐작 될 뿐이다.
원래 여기는 절이 있었던 자리라고 하며 관련 전설도 전해진다. 옛날 동자승(童子僧)이 이 은행나무 타기를 좋아하여 자주 나무에 오르니 스님이 나무에 오르지 못하도록 은행나무의 껍질을 벗겼다. 그러자 갑자기 나무에서 피가 흘러나오며 하늘에는 먹구름이 덮이고 비가 쏟아지므로 황급히 부처님께 잘못을 빌었다고 한다. 부처님은 스님에게 "그 나무에서 나오는 피를 먹으라"고 하였다. 스님이 두려움에 떨면서 은행나무 피를 먹자 몸이 점점 변하여 구렁이가 되어 이 나무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예부터 이 나무의 껍질이 기침과 천식에 효험이 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가지를 자르고 껍질을 벗겨가는 통에 나무는 항상 수난을 당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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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시에서 태백으로 가는 38번 국도를 타고 가다 보면 도계읍에 조금 못 미쳐 영동선 철도 고사리역이 있다. 비포장 고사리역 광장을 지나 동쪽으로 내려가면 왼편으로 시멘트 포장된 좁은 산길이 있다. 약 300m쯤 급경사를 올라가면 거의 산중턱에 나무가 자란다. 경사가 굉장하고 길이 좁으므로 운전에 자신이 없다면 고사리역에 차를 두고 걸어 올라가도 된다.
강원 기념물 제59호, 강원 삼척시 도계읍 늑구리 210-2, GPS 좌표 : N37°16′09.6″ E129°03′46.0″
강릉 옥천동 은행나무
강릉에 정착한 안동 권씨 중 권사균(權士鈞)이란 분이 있다. 중종반정 이듬해 열린 사마시에서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진사가 되었는데, 조정이 어수선해 지자 1500년대 초 곧장 낙향하여 강릉 향교 교수직에 머물며 보진당을 세우고 후학양성에만 전념했다. 그는 보진당(葆眞堂)을 세우면서 은행나무 2그루를 심었다고 ‘쌍행서(雙杏序)’란 편액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 중 한 그루는 보진당 서쪽 처마 끝에 심었고 다른 하나는 보진당 대문 밖에 심었다고 한다. 서쪽에 심은 나무는 없어지고 대문 앞에 심은 은행나무 한 그루만 현재 남아 있다. 나이는 약 500년 전후로 짐작되며 크기나 굵기로 보아서도 이 나이가 맞는 것 같으나 소개 간판에는 1000년이라고 적혀 있다.
높이는 29m, 둘레는 6.5m, 가지 펼침은 동서방향 16m, 남북방향 18.5m로 사방이 건물로 둘러싸인 100여 평의 공간에 홀로 자라고 있다. 주변은 도시공원으로 노인들의 쉼터가 되어 있다.
이 나무는 신라시대에 한 사냥꾼이 호랑이를 살려주었는데, 호랑이가 보은을 하기 위하여 은행알을 하나 물어다 주었다고 한다. 호랑이가 은혜를 갚았다는 전설과 함께 그 때 그 은행알이 자라서 지금의 나무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이 은행나무의 다른 이름은 효행(孝杏) 또는 호행(虎杏)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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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시내 가운데 위치한 중앙시장 입구 3층 건물인 공영주차장 바로 앞 길 건너에 있다.
강원 기념물 제64호, 강원 강릉시 옥천동 61, GPS 좌표 : N37°45′07.7″ E128°54′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