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갈산리 곰솔
이 곰솔은 갈산 1리 마을 가운데서 2그루가 동서로 나란히 서로 마주보며 서 있다. 동쪽 곰솔은 높이 16m, 가슴높이 둘레 2.6m이고, 가지 펼침은 동서 및 남북방향 모두 20m정도이다. 서쪽 곰솔은 높이 12.5m, 둘레 2.2m이며 가지 펼침은 사방 15m정도이다. 곰솔 고목으로서는 내륙 깊이 들어와 있는 점이 특색이다.
조선 효종 때 예조판서를 지내던 권육(權育)선생은 나이가 많아지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상소하자 조정에서는 고향 노성의 현감벼슬을 주었다. 이후 예순일곱 살에 그가 죽자 이를 슬퍼한 임금이 직접 나무를 보내어 도래솔로 심은 것이 지금의 갈산리 곰솔이라고 한다. 효종6년(1655) 왕명으로 경기도 수원에 있는 어린 곰솔 두 그루를 보내어 그의 묘소 앞에 심고 ‘쌍군송(雙君松)’이라 하였다는 유서 깊은 나무다. 1996년 4월 권씨 문중에서는 공주의 선산으로 선생의 묘소를 옮겨가고 현재는 곰솔 2그루와 뒤편으로 어린 곰솔 몇 그루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묘소자리는 현재 밭으로 개간되어 있다. 또 매미 태풍 때 1번목의 위 부분이 분질러져 나무의 아름다운 원래 모습을 많이 잃었으나 아직 지나온 역사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나무의 나이는 전설대로 따르면 약 350년이 되는 셈이나 굵기로 보아서는 원래 나무가 아니고 1800년 경 다시 심어 진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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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천안간 고속도로 서논산IC를 빠져나와 바로 좌회전하면 1km남짓한 거리에 갈산리가 있다. 나무는 갈산1리 마을의 한 가운데 자란다.
충남 기념물 제27호, 충남 논산시 광석면 갈산리 산26-22, GPS 좌표 : N36°13′29.4″ E127°03′52.8″
당진 면천 성상리 은행나무
나무는 면천초등학교 운동장 동쪽 끝에 자란다. 크기가 거의 비슷한 은행나무 2그루가 동서 약 5m의 간격을 두고 서 있다. 서쪽나무가 키가 약간 커서 약 21m이고 수관 발달이 덜 되어 훌쭉해 보인다. 동쪽나무는 높이 20m정도이며 수관이 잘 발달되어 있다. 둘다 나무 둘레는 약 6m 정도이다. 나이는 1100여 년 정도로 추정되며, 둘레는 6m, 높이는 각각 20m, 21m이다. 충남 당진군에 있는 면천초등학교 교정 동쪽에 서 있다.
이 은행나무에는 고려의 개국공신 복지겸과 관련된 전설이 서려 있다. 그가 말년에 병을 얻어 앓고 있었는데 잘 낫지 않자 그의 딸 영랑이 아미산에 올라가 백일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마지막 날 꿈에 신선이 나타나 두견주를 빚어 100일 후에 마시고, 그곳에 은행나무를 심으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 그대로 따랐더니 과연 병이 나았다는 것이다. 두견주와 더불어 면천의 명물로 꼽힌다. 따라서 나무의 나이는 복지겸이 900년 경의 사람이니 약 1,100년이 된 셈이다.
이 은행나무는 1910년대 일제강점기 이후 면천초등학교를 건립할 때 터를 닦기 위해 흙으로 2∼3m정도 매웠다고 한다. 깊은 복토가 된 나무치고는 비교적 생장이 좋은 편이나, 줄기의 대부분이 썩어서 충전처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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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 고속도로 서산IC에서 내려 운산을 거쳐 70번 도로를 타면 약 10km쯤에 면천면 소재지다. 나무는 면천초등학교 운동장 동쪽에 자란다.
충남 기념물 제82호, 충남 당진군 면천면 성상리 777 GPS 좌표 : N35°48′52.4″ E126°40′12.7″
논산 성동 개척리 은행나무
이 은행나무는 조선 중종 때의 기인(奇人) 전우치란 인물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원래 송도 사람으로 문장과 시문에 뛰어 났던 그는 중종 때 서울에서 진사를 지내고 있었다. 미관말직에 불과하였지만 사림파의 영수인 조광조, 김안국등과도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곧이어 일어난 기묘사화(1519)에 연루되어 도피 생활을 하면서 이곳에 이르자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두었는데, 싹이 터서 오늘의 이 은행나무가 되었다는 것이다. 매년 음력 정월 보름이면 나무에 금줄을 감아 두르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곳 은행나무는 개척리 개자부락의 낮은 언덕, 넓을 강계평야를 아련히 내려다보는 곳에 자라고 있다. 나무는 축대를 쌓으면서 너무 두껍게 복토가 된 탓에 현재는 두 그루처럼 보이고 줄기 밑 부분이 울퉁불퉁 복잡하게 생겨 있다. 심지어 연리지까지 만날 수 있다. 줄기 밑 부분 둘레가 거의 8m나 이르고 북쪽의 딴 나무 처럼 보이는 줄기는 가슴높이 둘레가 266cm, 남쪽 줄기는 약 1m높이에서 넷으로 갈라졌는데 각각 121, 208, 278, 310cm이다. 높이는 25m이다. 대체로 1520년대에 심겨진 것으로 본다면 나무 나이는 거의 5백년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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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읍에서 부여 쪽으로 올라가는 799번 도로를 4km쯤 달리면 바로 길가, 왼쪽 언덕배기에 자란다.
충남 기념물 제152호, 충남 논산시 성동면 개척리 228-1, GPS 좌표 : N36°11′13.7″ E127°00′47.6″
태안 흥주사 은행나무
이 은행나무는 태안읍 백화산 흥주사 앞에 자란다. 높이 20m, 가슴높이 둘레가 8.5m나는 거목이며 3개의 맹아지(萌芽枝)가 줄기 아래쪽에 붙어 곧게 뻗어 있다. 썩은 부분이 많아 여기 저기 충전처리가 되어 있다. 나무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 근거가 없으나 대체로 1,100년경부터 자라는 것으로 짐작한다.
아득한 옛날 먼 길을 가던 노승이 백화산 산기슭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깜박 잠이 들었다. 꿈속에 하얀 산신령님이 나타나 노승이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가리키며, 이곳은 장차 부처님이 거처할 자리이니 지팡이로 이곳에 표시를 하라고 계시했다. 꿈에서 깨어난 노승은 꿈에 산신령님이 가리킨 지팡이를 그곳에 꽂아두고 불철주야 기도를 하니 신비스럽게도 지팡이에서 은행나무 잎이 피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노승은 예사로운 일이 아닌 것을 짐작하고 더욱더 기도에 전념하였더니 또다시 산신령이 나타나 ‘이 나무에 자식 없는 자가 기도를 하면 자식을 얻게 되고 태어나 자식들이 부귀영화를 얻어 부처님을 모실 것이니라’ 하였다. 이곳에 절을 짓고 부처님의 손길이 자손만대에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 노승은 절의 이름을 흥주사라 하였다고 한다.
이 은행나무에는 특별한 모양새의 유주(乳柱)가 하나 달려 있다. 남성의 심벌처럼 생긴 이 유주는 흥주사의 전설처럼 빌면 아들을 낳는다는 소문이 퍼져 많은 사람이 찾아오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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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읍 문예회관 앞길로 상옥리를 거쳐 동북으로 난 길을 따라 약 3km쯤에 흥주사란 절이 있고 나무는 절 앞에 자란다.
충남 기념물 제156호, 충남 태안군 태안읍 상옥리 1154
연기 양화리 은행나무
임난수(林蘭秀)는 1342년 출생하여 고려말 탐라정벌에 대공을 세우고 공조전서를 지낸 인물로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조선을 건국하고 여러번 벼슬을 주며 부름이 있었지만 부름에 응하지 않고 큰 절의를 지킨 고려 유신이었습니다. 이후 공은 공주목 삼기촌에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는데 이 낙향지에 망국의 고려를 생각하고 임금을 그리며 암수 한쌍 두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었는데 600여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은행나무를 심어 가꾸어 온지 600여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무성하게 자라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충절의 상징으로 인근 마을의 신목으로 여겨지고 있다.
충남 기념물 제157호, 충남 연기군 남면 양화리 88-5, N36°30′05.0″ E127°17′38.5″
부여 수신리 반송
부여 외산면 성태산(631m)이 동쪽으로 뻗은 급경사 산자락에 자란다. 유래나 전설 등은 발굴된 것이 없으나 소유주 김용주씨가 선조로부터 물려받아 오랫동안 관리해오던 반송이다. 줄기 밑 부분 둘레는 370cm이며 땅위 약 50cm에서 8개의 줄기로 갈라진다. 각각의 가슴높이 둘레는 위쪽부터 시계방향으로 165, 158, 145, 190, 140, 155, 186, 123cm이며 높이는 15m쯤 된다. 가지 펼침은 동서방향18m, 남북방향 16m이다.
자라는 곳이 논바닥에서 10여m쯤 위쪽 급경사 산자락으로서 배수가 잘되고 비옥하며 정남향이라 일조량이 풍부하여 나무가 자라는 곳으로는 최상의 조건이다. 줄기의 뻗음이 고르고 가지가 발달하며 줄기는 특히 붉은 색이 강하여 반송으로서도 매우 아름다운 편이다. 다만 일부 가지가 솔잎혹파리의 피해를 받아 잔가지가 고사되고 있어 철저한 보호관리가 요구되고 있다.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으나 나무의 규모로 보아 대체로 1600년 경부터 자라는 것으로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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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에서 부여로 내려가는 29번 도로를 타고 4km쯤 내려가다 보령으로 들어가는 606도로로 바꾸어 탄다. 약 10여km쯤에 반고개 넘어서면서 오른쪽 농로를 따라 500m쯤 들어가면 남쪽 급경사 산비탈에 나무가 자란다.
충남 기념물 제158호, 충남 부여군 외산면 수신리 산9, GPS 좌표 : N36°21′54.2″ E126°44′21.8″
보령 장현리 귀학송(歸鶴松)
조선 명종 때 홍산(지금의 부여군 홍산면)현감을 지낸 이산광(李山光)이란 선비가 광해군이 들어서면서 당쟁에 회의를 느껴 낙향하였다. 토정 이지함의 조카이기도 그는 나무 옆에 정자를 짓고 시를 읊고, 학문에 매진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 마침 정자에 학들이 날아와 ‘귀학정(歸鶴亭)’이라 하였는데, 혼탁해진 중앙 정치무대에서 더럽혀지지 않기 위하여 돌아온 그의 모습이 학처럼 느껴져서 붙인 이름일 터이다.
이곳에 정착한 후손들 중 그의 6대손인 이실(李實, 1777~1841)이 이 반송을 심고 귀학송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따라서 나이는 200년이 조금 넘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이산광이 직접 심었다고 한다. 1550년 경이니 나이는 약 450년 정도인 셈이다. 자람 조건이 매우 좋은 곳이니 나무의 규모로 보아서는 나이 200여년이 맞는 것 같다.
나무는 줄기 밑 부분 둘레가 550cm나 되는 반송 한 그루와 약 3m거리에는 가슴높이 둘레 120cm의 소나무가 같이 자란다. 이 반송은 땅위 40cm쯤에서 5개로 갈라져 있으며 가슴높이 굵기는 각각 200~250cm에 이르며 가지 펼침은 사방 16m정도이다. 작은 소나무 한 그루와 반송을 합쳐서 사람들은 육송(六松)이라 불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최근 작은 소나무는 죽어버리고 반송만 살아남아 어쩔 수 없이 오송(五松)이 되었다. 주위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고 나무의 줄기 뻗음이 자연과 잘 어울린다. 아름다운 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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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고속도로 광천IC를 빠져나와 첫 마주치는 사거리에서 21번 도로 보령 쪽으로 우회전한다. 청소면 소재지에서 610번 도로로 좌회전하여 약 10여km쯤에 장현리, 명대계곡으로 들어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좌회전하면 금방 큰 길가에서 나무를 만날 수 있다.
충남 기념물 제159호,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현리 69, GPS 좌표 : N36°26′24.7″ E126°41′00.9″ 고도 149m
예산 대흥향교 은행나무
이 은행나무는 땅위 약 3m쯤에서 4개의 굵은 가지가 갈라졌고, 전체 나무모양은 둥그스름하며 멀리서 보면 제법 웅장한 느낌을 준다. 가지가 갈라지는 곳의 가운데는 둘레 1m나 되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기생하고 있다. 잎과 껍질 모양이 다른 두 나무가 마치 한 나무처럼 자라 사람들은 매우 신기해한다. 5~60년 전쯤 썩은 은행나무 줄기에 느티나무 종자가 떨어져 이렇게 같이 자라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둘의 관계는 서로 양분을 주고받는 공생관계가 아니라 느티나무의 일방적인 수탈로서 은행나무가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현재 은행나무는 줄기가 쇠약하고 원줄기 끝 부분이 죽어가고 있는데, 느티나무의 영향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흥향교 은행나무는 향교의 개창과 관련되어 있고 대체로 1400경부터 자라는 것으로 보고 있다. 키는 30m정도이고 가지 뻗음은 사방 40m에 이른다. 마을 사람들은 매년 정월 초에 마을의 무사 태평을 기원하는 성황제를 올린다. 나무를 베면 마을에 큰 피해를 입는다는 전설 때문에 지금까지 보호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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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읍에서 홍성으로 내려가는 21번 도로를 타고 약 5km쯤에 예당저수지로 들어가는 619번 도로와 마주친다. 좌회전하여 6km쯤에 대흥면 소재지가 있다. 면소재로 들어가기 전 대흥향교 팻말을 보고 좌회전하면 500m쯤 향교 앞에 나무가 자란다.
충남 기념물 제160호, 충남 예산군 대흥면 교촌리 538
금산 양지리 팽나무 연리목
연리목(連理木)은 나무와 나무가 맞닿아 한 나무가 되는 현상으로서 두 나무를 가까이 심어두면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연리지는 개체가 다른 나무의 가지가 이어지는 현상으로 일어날 확률이 매우 낮으므로 예부터 남녀 간의 변치 않은 사랑의 상징으로 귀하게 여겨 왔다. 그러나 연리목은 이곳 뿐 아니라 숲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연리목과 연리지를 혼동하여 흔히 같이 귀한 것으로 받아드리는 경우가 많다.
이 팽나무 연리목은 1920~30년대부터 자라는 것으로 보이며 높이 17m, 가슴높이 둘레는 굵은 줄기 1.74m, 가는 줄기 1.44m정도이다. 두 나무의 모습을 북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부부가 서로 얼싸안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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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읍에서 동쪽으로 약 5km쯤 양지리 마을회관 옆에 있다.
충남 기념물 제167호, 충남 금산군 남이면 구석리 567
서산 송곡사 향나무
송곡사(松谷祠)는 영조 29년(1753)에 건립되었다고 전하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10년에 다시 세운 서원이다. 원래 이 자리는 조선 세종 2년(1420)사마시에 급제한 유윤이 단종폐위를 보고 낙향하여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이 향나무는 그가 심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나이는 약 550년에 이른다.
나무는 송곡사 앞 홍살문을 들어서면서 좌우로 약 10m간격을 두고 심겨져 있다. 나무의 굵기는 남쪽나무가 더 굵으며 키는 약 12m쯤으로 두 그루가 비슷하다. 특히 북쪽 나무는 1m이상 복토가 되어 줄기 밑 부분이 보이지 않으며 마치 두 나무처럼 되어 있다. 굵기는 가슴높이 둘레가 205, 235cm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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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에서 인지면, 부석면으로 내려가는 649번 도로를 탄다. 인지면 소재지를 지나 약 3km쯤이면 애정리이고 길 옆에 아담한 솔숲이 있다. 작은 쉼터로 길 옆에 주차시설이 있다. 차를 세워두고 오른쪽으로 100m쯤에 송곡사가 있고 입구 양 옆에 두 나무가 마주보고 자란다.
충남 기념물 제170호, 충남 서산시 인지면 애정리 495번지, GPS 좌표 : N36°43′26.8″ E126°24′52.9″
홍성 오관리 느티나무
군청입구에 홍주 아문(衙門)이 있어서 이곳이 옛 동헌 터임을 말해주고 있다. 나무는 군청 건물과 붙어 3.5m간격으로 나란히 2그루가 자란다. 북쪽나무가 약간 크며 높이17.0m, 가슴높이 둘레 6.6m, 가지 펼침은 동서방향 18m, 남북방향 21m이다. 남쪽나무는 높이 11.5m, 가슴높이 둘레 5.2m, 가지 펼침은 동서 방향 18.1m, 남북방향 19.4m정도이다. 그러나 두 나무의 가지는 서로 얽혀 있으며 남쪽나무는 1970년 경 군청에 화재가 나면서 가지의 상당부분이 타버렸다고 한다.
이 나무는 고을에 액운이 낄 때마다 밤새 울어대어 목민관은 서둘러 예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홍주에 부임하는 관리들은 제일먼저 이 나무아래에 제물을 차려놓고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하며 현재에도 제물을 차려놓았던 기대(器臺)가 남아있다.
언재 심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고려 말 공민왕 때 심은 것으로 전해지므로 나이는 거의 650년으로 짐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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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군청 정문을 들어서면 군청건물 마당에 두 그루가 자란다.
충남 기념물 제171호, 충남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98, GPS 좌표 : N36°35′54.3″ E126°39′47.6″
부여 진변리 동매(매화나무)
부여 동매는 진변리 백강마을에 있는 부산서원 입구 왼쪽에 자라고 있다. 줄기 밑 부분 둘레가 약 60cm, 높이 5m정도이며 가지 펼침은 동서 및 남북방향 각각 6m정도이다. 땅위 약 30cm에서 셋으로 갈라지고 서쪽 가지는 또 한 번 더 갈라졌고 위로 가면서 크고 작은 가지가 갈라져 나무는 좌우대칭의 타원형을 만들었다. 백매(白梅)이다.
이 나무는 원래 백강(白江) 이경여 선생이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매화나무 3그루를 가져와 이 자리에 심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2그루는 죽고 나머지 한 그루마저 일제 강점기 말기에 불에 타 죽어 현재 남아있는 나무는 죽은 나무뿌리에서 싹이 나 자란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지금 이 나무의 나이는 60여년 남짓하며 생육상태는 좋아 꽃이 많이 달린다.
일제강점기에 벌써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고 1962년 우리의 천연기념물 105호로 다시 지정되어 있었으나 나무가 훼손되어 곧 해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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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읍 금강에 걸린 백제대교를 건너 바로 우회전하면 전통문화학교 및 백제민속박물관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1km 남짓 거리에 왼편으로 진변리 백강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있고 작은 고개를 하나 넘으면 바로 부산서원이 있고 나무는 서원 앞에 자란다.
문화재자료 제122호, 충남 부여군 규암면 진변리 38-1, GPS 좌표 : N36°16′52.4″ E126°53′43.1″
아산 해암리 형제송(兄弟松)
삽교방조제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인주면 해암리 뒷산 능선에 자라는 2주의 곰솔이다. 약 20m정도 떨어져 남북으로 나란히 자라고 있으며 1600년경부터 자라는 것으로 보아 나이는 400년 정도로 짐작하고 있다. 크기는 둘 다 비슷하며 높이 16m, 둘레 3.5m의 크기로 나뭇가지가 수평으로 길게 뻗어있고 줄기가 이리저리 꼬여있어서 독특한 모양새를 나타낸다. 가지 펼침은 두 나무 각각 동서방향 약 10m, 남북방향 18m정도이다. 동쪽으로 뻗은 가지는 거의 잘려 나갔다.
임진왜란(1592) 때 마을에 살던 장사 청년 형제가 마을에 쳐들어온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여 마을 주민들이 무덤을 만들어 주었는데 그 무덤에서 형제의 혼이 곰솔로 다시 태어났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그래서 두 형제나무가 마을을 지켜준다고 생각하여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이 두 곰솔을 형제송(兄弟松)이라 하였다. 자라는 모습에서도 애틋한 형제의 우의를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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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에서 평택으로 올라가는 39번 도로를 탄다. 약 4km쯤에서 좌회전하여 약 6km쯤이면 ‘정우’라는 회사가 있고 지나서 잠시면 미진Apt가 보이고 모통이를 돌면 절로 들어가는 작은 도로가 있다. 100m쯤의 절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산길로 다시 100m쯤 걸어 올라가면 나무는 산능선에 마주 보고 있다.
문화재자료 제243호, 충남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 산63-1 GPS 좌표 : N36°49′59.9″ E126°53′24.7″
청주 중앙공원 압각수(鴨脚樹, 은행나무)
이 은행나무는 고려시대 청주목 객사문(客舍門)앞에 심었던 나무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압각수는 나이가 9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은행나무로 높이가 30m, 가슴높이 둘레가 8m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목은 이색을 비롯한 어진 신하 10여 명이 모함으로 청주 감옥에 갇혔다가 큰 홍수를 만났을 때 압각수에 올라가 화를 면하였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왕은 이들의 죄가 없음을 하늘이 증명한 것이라 하여 석방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이 은행나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향토사학자 임병무씨가 정리한 내용이 있다.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등에는 은행나무와 물난리와 관련된 고사가 자주 등장하는데, 정리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 공양왕 2년(1390) 5월에 있었던 일이다. 청주목의 객사문 주변에는 수십그루의 은행나무가 있었다. 그 은행나무 가운데 압각수라 불리는 이 은행나무는 옥사(獄事)와 물난리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이성계의 반대파로 지목된 상당수의 학자, 정치인이 청주옥에 갇혔었다. 이색(李穡), 권근(權近), 이림(李琳), 변안렬(邊安烈), 이인민(李仁敏), 정지(鄭地), 이숭인(李崇仁), 이종학(李鍾學), 이귀생(李貴生) 등이 그들이다. 조정에서는 윤호(尹虎), 박경(朴經), 이확(李擴), 신효창(申孝昌), 전시(田時) 등을 보내어 관찰사 유구와 함께 국문케 하였다. 이때, 갑자기 천둥이 치며 큰 비가 내려 냇물(무심천)이 크게 불어났다. 냇물은 읍성의 남문을 허물며 곧바로 북문으로 나가니 성안은 물바다가 되고 관사와 민가가 거의 떠내려가게 되었다.
옥관(獄官)들은 허겁지겁 나무에 올라가 수재(水災)를 면하게 되었다. 이색 등도 압각수로 피신하여 목숨을 건졌다 한다. 조정에서는 이들이 죄 없음을 하늘이 증명한 것이라 하여 다음 달 조온(趙溫)을 보내 가둔 사람을 풀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중앙의 죄수 150명도 풀어 주었다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공민왕때의 일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고려사에 의해 공양왕 2년, 5월 을사(乙巳)일 임이 확인된다. 이 일이 있은후 양촌(陽村) 권근(權近)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한 시 한수를 남겼다.
‘流言不幸及周公/ 忽有嘉禾偃大風/ 聞道西原洪水長/ 是知天意古今同. 근거없는 소문으로 주 무왕의 아우 주공에게 불행이 미치니/ 갑자기 큰 바람이 일어 벼를 쓰러뜨렸네/ 청주에 큰 물이 넘쳤다는 말을 듣고/ 하늘의 뜻이 예나 이제나 같음을 알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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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내 가운데에 있는 중앙공원 안에 자란다.
충북 기념물 제5호,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2가 92-6, N36°37′47.0″ E127°29′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