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신풍동 팔효사 은행나무
팔효사(八孝祠)는 나주 나씨 문중 3대에 걸쳐 배출한 8명의 효자에 대한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인조 7년(1629)에 처음 세워졌다. 그러나 고종 5년(1868)에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65년에 다시 지어졌다. 나무는 팔효사 경내의 출입문 동쪽 구석에 자라며 가지 펼침이 엉성하고 잎이 빈약한 등 상태가 좋지 못하다. 나무 높이 16m, 가슴높이 둘레 3.7m이며 가지 펼침은 동서방향 18m, 남북17m가량이다.
이 은행나무는 여덟 효자의 중심인물인 나안세의 부친 나난중이 어려서 심었다고 전한다. 또한 나씨 문중에 장원급제 등 경사가 있을 때 이 나무에 큰 북을 매달아 쳤다고 하며, 3대에 걸쳐 효자가 날 적에는 잎만 피고, 3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열매를 맺었다고 하여 유명하다. 나무는 팔효사 창건당시에 심었다고 보면 약 400년 정도이다.
찾아가기
김제 시내 남쪽 변두리 김제고등학교 부근 712번 도로 옆에 팔효사를 찾을 수 있다.
전북 기념물 089호 전북 김제시 신풍동 509, GPS 좌표 : N35°47′19.6″ E126°53′26.8″
정읍 화룡리 금동 느티나무
이 느티나무는 화룡리 금동마을 입구, 마을길 옆에 자란다. 위쪽으로는 밭이며 아래로는 논이 이어져 넓은 들판에 홀로 자라면서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나무 높이 18m, 가슴높이 둘레 약 6.1m이다.
예전에는 나무 아래에서 줄다리기, 햇불놀이 등을 했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중단되었고,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여겨져서 매년 백중날(음력 7월 15일)과 칠석날(음력 7월 7일)에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양녕대군이 이곳에서 은둔생활을 했으며, 9대손 이사남(李士男 1635출생)이라는 분이 심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4대손 의손(義孫~1497년 몰)이라는 분이 영목(靈木)으로 이 나무를 지정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무나이는 400년 혹은 550년 정도로 짐작되나 나무의 굵기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서는 나이는 400년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이 나무는 8.15, 4.19, 5.16 등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무에서 피 같은 액체가 흘러내리거나 둘로 갈라졌다고 하며, 잎이 아래에서 피면 풍년, 위에서 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찾아가기
호남고속도로 정읍IC에서 내려 부안으로 들어가는 22번 도로를 탄다. 약 7km쯤의 소성면 소재를 지나면서 우회전하면 고부로 올라가는 이름 없는 지방도이다. 약 2km 쯤에 화룡리 금동 마을로 들어가는 농로가 있다. 나무는 마을에 들어가기 100m쯤 앞 들판에 자란다.
전북 기념물 093호 전북 정읍시 소성면 화룡리 744-1, GPS 좌표 : N35°34′16.1″ E126°45′12.4″
진안 가림리 줄사철나무
진안 은천마을 앞 공동 숲에는 줄사철나무 3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버팀목으로 팽나무와 느티나무에 붙어서 기어오르는 모습이 겨울이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과거형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은 관리 부실로 3그루 중 2그루가 죽어 버리고 지금은 가장 작은 한 그루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서다.
살아 있을 때의 크기는, 하나는 높이 4.6m에 둘레 4.4m로 느티나무 가지를 따라 4∼5개로 갈라져 느티나무를 감고 자라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높이 5.1m, 둘레 3.6m이며, 나머지 하나는 높이 5m, 둘레 2.6m로 각각 팽나무를 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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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장수간 고속도로 진안IC에서 내려 마이산 뒤로 난 30번 도로로 좌회전한다. 약 4km 거리에 가림리가 있고 나무는 마을 앞 도로 왼편에서 만날 수 있다.
전북 기념물095호 전북 진안군 진안읍 가림리 1140, GPS 좌표 : N11°12′38.5″ E222°25′15.5″
순창 강천사 모과나무
강천사 앞으로 난 등산로 옆 개울가에 터를 잡았다. 수많은 등산객이 다니는 곳이라 답압(踏壓)이 심하나 나무는 개울 쪽으로 많은 뿌리를 뻗은 것으로 짐작되어 생장에 별다른 지장은 없다.
나무는 높이 20m, 둘레는 3.1m정도이고 마치 두 나무가 연리가 되어 붙어있는 것처럼 보이며 줄기가 울퉁불퉁하여 모과나무 고목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나무에 관련된 기록이 없어서 나이를 알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1700~1800년경에 심은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약용으로 쓰이는 나무이므로 강천사 스님들이 일부로 심은 나무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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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사 대웅전 앞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강천산 쪽으로 약 100여m 올라간 길 옆에 자란다.
전북 기념물 97호, 전북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995
김제 마현리 은행나무
이 나무는 높이 15m, 가슴높이 둘레 약 4.6m, 가지 펼침은 동서방향 30m, 남북 25m정도이고 줄기는 약간 비스듬하게 자란다. 나이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어서 명확하지 않으나 나무의 규모로 보아 1600년경부터 자라는 것으로 짐작된다. 약 2m높이에서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타원형의 반듯한 수관을 만들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음력 1월 3일 나무 밑에 모여 마을의 안전과 평안을 기원하는 제사(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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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군산 21번 도로와 김제-익산 23번 도로가 만나는 곳이 공덕이다. 내려서면 바로 공덕면 소재지이고 여기서 남쪽으로 1km쯤 떨어진 마현 마을 도로 옆에 자란다.
전북 기념물 106호, 전북 김제시 공덕면 마현리 816-1, GPS 좌표 : N35°52′44.4″ E126°55′16.2″
익산 성당리 은행나무
성당면 은행나무와 관련된 기록이 없어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이곳은『성포 별신제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1662년 조세미(租稅米)의 저장과 운반을 위해 성당창(聖堂倉)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호남평야에서 거두어들인 세곡을 서울로 운반해 가는 출발점이었다. 바로 앞이 금강 하구이다.
옛날 서해안은 잦은 해난 사고로 조운선이 침몰하는 사고가 잦았다. 그래서 출발하기 전 무사항해를 기원하고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바라는 당산제가 필요하였다. 여기는 순풍당이란 건물에서 무당이 주관하는 별신제(別神祭)를 지냈다. 그러나 1895년 성당창의 조창이 폐쇄되고 순풍당이 붕괴되고 경제사정이 약화됨에 따라 별신제 대신마을의 공터에 있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에 치성을 올리는 당산제가 행해졌다고 한다. 당시부터 나무가 있었던 것으로 본다면 나이는 350년 정도로 추정된다. 크기는 높이 약 15m, 둘레 약 2m이고, 가지펼침은 남북방향 18m, 동서 16m에 달한다.
주위에는 여러 그루의 느티나무 고목이 있고 언덕위의 가장 큰 느티나무는 백제시대 황산벌 싸움에서 부상을 입은 도승 한 분이 낙오되어 요양하는 중에 심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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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에서 익산으로 내려가는 23번 도로를 타다보면 약 5km쯤에 익산 용안면소재지다. 706번 도로로 우회전하여 약 4km쯤에 성당리가 있고 작은 사거리를 만난다. 다시 우회전하여 200m쯤에 금강하구와 마주치고 나무는 여러 그루의 느티나무를 주위에 거느리고 바로 넓은 강가에 자란다.
전북 기념물 109호, 전북 익산시 성당면 성당리 포구 GPS 좌표 : N36°07′40.5″ E126°55′22.4″
정읍 두지리 말목 장터와 감나무
정읍시 이평면 면사무소 앞 도로 건너편에 위치한 말목장터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배들평 농민 수천 명이 고부로 가기 전에 모였던 곳으로 제1차 백산기포를 할 때까지 장두청을 두고 진을 설치했던 장소이다.
이곳에는 200여년 정도 된 감나무 한그루가 서 있었는데, 이 나무 아래에서 말목장터에 모여든 농민들에게 전봉준이 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농민 수탈의 실정을 알리고 농민봉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고 전한다. 이곳 주민들은 감을 따지 않을 정도로 아껴온 나무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과거형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은 이 감나무가 2003년경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자그마한 새 감나무를 한 그루가 옛 역사의 현장을 대신하고 있다. 죽은 감나무는 동학농민혁명관 로비에 박제가 되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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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에서 705번 도로를 타고 10여km쯤 올라가면 이평면 소재지다. 면소재지 바로 앞에 공원에 나무가 있다.
전북 기념물 110호, 전북 정읍시 이평면 두지리 191-2 GPS 좌표 : N35°39′42.0″ E126°50′26.0″
익산 원수리 이병기 생가 탱자나무
가람 이병기(李秉岐, 1891∼1968) 선생은 국문학자이자 시조작가이다. 시조의 현대적 혁신과 부활을 위한 새 운동을 전개하며 고전 발굴 연구에 힘쓴 가람은 청소년 교육을 통하여 민족의 말과 글을 보존하는데 노력하였다. 주된 공적은 시조에서 이루어졌지만 서지학과 국문학 분야에도 많은 업적을 남긴 분이다. 선생이 생전에 거처하던 이곳 생가 집은 조선 후기 양반집의 배치를 따르고 있는데 안채와 사랑채, 광채와 모정 등이 남아 있다. 모정 앞쪽에 작은 연못이 2곳 있다. 본디 초가지붕이며 건물 자체에는 특징이 없으나 안채와 사랑채에서 고풍스러움이 묻어나며, 모정과 연못을 배치하는 등 조촐한 느낌을 주고 있다.
선생의 생가 옆에는 탱자나무로서는 보기 드문 고목 한 그루가 심겨져 있다. 탱자나무는 원래 남부지방의 생 울타리로 심고 있으나 이렇게 조경수로 식재된 경우는 드물다. 된다. 이 탱자나무의 수령은 1800년 경부터 자라는 것으로 보아 나이는 약 200여년으로 추정된다. 높이는 5.2m이고, 가슴높이 둘레는 60cm정도이고 땅위 1.6m높이에서 6개의 가지로 나눠지고, 다시 작은 가지가 원추형으로 수관을 형성하고 있는 매우 아름답고 독특한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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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고속도로 익산IC를 빠져나와 왕궁저수지 옆길로 우회전하여 5km남짓 거리에 다시 왼편으로 작은 저수지를 만난다. 속도를 줄여 마을 생가 팻말을 보면서 가운데로 난 작은 길로 우회전하여 들어가야 한다. 좁은 길을 약 200m쯤 들어가면 생가와 마주친다.
전북 기념물 112호, 전북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573, GPS 좌표 : N36°01′58.9″ E127°05′12.9″
익산 동고도리 익산향교 은행나무
화투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고도리’란 이름에 친근감이 갈 것 같다. 그러나 한자 이름은 옛 냄새가 물씬 풍기는 ‘古都里’이며 동,서고도리가 다 있다. 이 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에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후 인조 7년(1627)에 다시 지었다. 창건 당시에 이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말하기도 하나 나무의 규모로 보아서는 중수할 때인 인조 때, 1600년경에 심은 것으로 보인다. 이 처럼 공자의 사당에는 유교교육의 상징인 행단(杏亶)의 의미로 은행나무가 많이 심겨져 있다.
나무 높이 15m, 가슴높이 둘레 5.1m이다. 대성전 담벼락에 거의 붙어 자라고 50cm이상 복토가 되어 있으며 관리 부실로 나무의 상태는 매우 나쁘다. 땅위 약 5m높이에서 굵은 가지 넷으로 갈라져 자라며 가지마다 위 부분은 절단되어 있어서 나무가 영 볼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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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시의 동북쪽, 1번 도로에서 잠시 들어가면 금마면 소재지다. 나무는 동고도리의 익산향교 경내에 자란다.
전북 기념물 113호, 전북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GPS 좌표 : N35°59′37.2″ E127°03′39.0″
김제 심포리 망해사 팽나무
팽나무 2그루가 망해사(望海寺) 건물 바로 옆 서해바다를 발밑에 두고 자란다. 조선 선조 22년(1589)에 진묵대사가 낙서전(樂西殿)을 창건할 때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나무 나이는 400년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낙서전 전면 10m 거리에 있는 팽나무는 높이가 21m, 가지 펼침은 동서방향 25m, 남북 22m로서 가지가 고루 퍼져 웅장하면서도 안정된 느낌을 준다. 또한 낙서전 좌측 15m 거리에 있는 팽나무는 높이가 17m, 가지 펼침은 동서방향 17m, 남북으로도 17m이다
뒤쪽으로 서해를 조망할 수 있는 정자가 있고 망해사의 위치도 바로 바닷가 이므로 풍광이 아름답다. 서해로 떨어지는 낙조가 일품인 곳이다. 그러나 새만금방조제 안에 들어있는 곳이므로 개발이 시작되면 앞 바다가 사라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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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 고속도로 서김제IC에서 29번 도로를 타고 북으로 잠시면 만경읍이다. 702번 도로로 좌회전하여 서쪽으로 넓은 평야를 10km쯤 달리면 오른쪽 언덕길로 망해사 입구 팻말이 보인다.
전북 기념물 114호, 전북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1004, GPS 좌표 : N35°51′21.4″ E126°43′01.1″
익산 여산리 여산동헌 느티나무
여산동헌은 조선시대 여산부(礪山府)의 동헌 건물이다. 근세에 들어 한 때 우체국과 경로당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복원하여 제 모습을 갖추고 있다. 동헌은 대체로 조선 태종 년대에 창건된 것으로 짐작한다.
옛 동헌의 위엄을 상징하듯 이 일대에는 여러 그루의 고목들이 지나온 세월의 무게를 말해주고 있다. 가장 굵은 것은 동헌의 경내에 있는 느티나무이며 가슴높이 둘레 4.2m, 높이 27m에 이르고 가지가 고루 잘 뻗어 넓은 원추형의 아름다운 자태가 당시 동헌 위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가지 펼침은 동서방향 27m, 남북방향으로 22m정도이다.
이 느티나무를 비롯하여 동헌 앞쪽 담장 밖의 경사지, 앞 쪽 시민공원, 옆의 중학교 교정까지 느티나무 7주, 팽나무 1주, 가죽나무 1주 등이 어우러져 작은 숲과 같은 곳이다. 나무의 나이는 동헌을 지을 당시 심은 것으로 추정하여 약 600년으로 보고 있다.
동헌 서쪽 담장 바로 앞에는 조선 고종 때인 1866년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병인박해 당시 대학살이 감행된 ‘백지사(白紙死) 터’이다. 얼굴에 물을 뿜고 백지를 여러 번 붙이기를 거듭하여 질식사 시키는 악랄한 형벌을 가한 슬픈 역사 현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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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고속도로 논산IC에서 빠져나와 연무를 거쳐 1번 국도로 약 8km쯤 내려가면 여산면사무소가 있는 여산이다. 나무는 읍내의 여산동헌 앞마당에서 주민들의 쉼터까지 여러 그루가 자란다.
전북 기념물 116호, 전북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 445-2, GPS 좌표 : N36°03′22.6″ E127°05′15.6″
고창 하고리 왕버들 숲
하고리 삼태마을 앞을 흐르는 개천(대산천)을 보호하고 마을 앞 들판에서 마을 안이 그대로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숲을 조성한 것 같다. 또 풍수지리적으로 비보(裨補)의 성격도 있었다고 한다. 알려지기로는 마을 모습이 꼭 배처럼 생겼는데, 암치마을에서 발원한 개천이 마을 앞을 흘러가고 있어서 배가 거센 물결에 떠내려 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배를 매어 둘 나무을 심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마을에는 큰 재앙 없이 잘 살 수 있었다고 사람들은 믿어오고 있다.
개천 주변의 왕버들을 주를 이루는 숲으로서, 왕버들 82, 용버들 6, 단풍나무 13, 팽나무 8, 은행나무 8, 곰솔 7, 소나무 5, 왕벚나무 4, 물오리나무 4, 단풍버즘나무 3, 이팝나무 2, 배통나무 2, 은사시나무 2, 느티나무 1, 감나무 1, 무궁화 1 그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버들의 나무높이는 가장 굵은 나무가 가슴높이 지름이 약 4m에 이르나 대체로 한 아름 정도가 많고 어린 나무도 섞여있다. 나무 높이는 대체로 8m 전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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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고속도로 영광IC를 빠져나와 고창 쪽으로 23번 2차선 구 도로를 탄다. 대산면 소재지를 지나 2km쯤 도로 바로 왼편에 하고리 삼태마을이 있고 나무는 개울을 따라 줄처럼 늘어서 있다.
전북 기념물 117호, 전북 고창군 성송면 하고리 123외, GPS 좌표 : N35°20′50.6″ E126°37′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