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칠석동 은행나무
이곳 칠석동 옻돌마을은 죽령산 아래 평야를 향해 터를 잡고 있으며 풍수지리설로는 소가 누워있는 모습이라 하는데, 이 소가 매우 사나워 고삐를 메어두기 위하여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알려져 있다. 나무는 높이 23.5m, 가슴높이 둘레 6.5m, 줄기 밑 부분 둘레는 13m에 이른다. 주위에 돋아난 맹아가 굵게 자라 나무를 에워싸고 있어서 이렇게 가슴높이 둘레와 줄기 밑 부분 둘레가 차이가 난다. 나무 주위에 1.5m높이의 석축을 쌓아 두었으나 크게 복토가 된 것 같지는 않다.
이 나무는 할머니당산목이고 뒷산에는 할아버지 소나무 당산목 과 함께 매년 정월 14일 당산제를 지내던 곳이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신령한 나무로 여겨 해마다 정월 대보름 밤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제사가 끝나면 이 마을 고유의 고싸움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33호)가 시작된다. 조선 초의 문신 김문발(金文發, 1359~1418)이 심었다고도 한다. 이를 기준으로 짐작해 보면 나이는 약 600년이 되었다고 한다.
찾아가기
광주에서 나주를 잇은 1번 도로를 타고 내려가다 영산강 지류인 지석천을 건너기 직전, 남평읍으로 들어가기 전에 55번 도로로 우회전한다. 약 3km쯤 오른 쪽에 고싸움 전시관이 있고 앞은 광장이다. 나무는 광장 한편에서 만날 수 있다.
광주 기념물 제10호, 광주 남구 칠석동 120, GPS 좌표 : N35°04′00.1″ E126°50′19.7″
광주 충효동 왕버들
이 나무는 광주호 동쪽 제방과 충효동 마을 사이의 도로가에서 자라고 있다. 원래는 일송·일매·오류(一松·一梅·五柳)라 하여 마을을 상징하던 소나무 1그루, 매화나무 1그루, 왕버들 5그루가 있었으나 현재는 왕버들 3그루만 남아있다. 충효동 일대는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 등의 유서 깊은 정자와 빼어난 풍광이 어우러져 예부터 정자가 많이 있어 선비들의 교류가 끊이지 않던 곳이다.
나무는 줄기가 심하게 비틀리고 울퉁불퉁하며 때로는 가운데 동공이 보이는 특별한 모양을 갖는다. 3그루는 굵기가 거의 비슷하고 높이는 11~14m 전후 굵기는 가슴높이 둘레 6m정도이며 세 나무의 가지가 서로 겹쳐 있어서 한 나무처럼 보인다. 대체로 1700년경부터 자라는 것으로 짐작된다.
찾아가기
호남고속도로 창평IC에 내려 광주 쪽으로 4km쯤 올라오다 광주호로 들어가는 887번 도로로 좌회전 한다. 광주호 옆길로 달리다 식영정 앞에서 무등산으로 올라가는 길로 우회전하면 금방 길가에서 나무를 만날 수 있다.
광주 기념물 제16호, 광주 북구 충효동 1021 GPS 좌표 : N35°10′53.3″ E127°00′12.3″
광주 양림동 호랑가시나무
2001년 2월 마지막 날 새벽, 봄비를 맞으며 대구 광주를 잇는 고속도로를 달렸다. 78년에서 87년까지 10여 년 가까이 재직하였던 전남대학의 정년퇴임식에 참여하기 위함이다. 개인적으로 40대의 한창 왕성한 활동을 할 시기에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신 선배교수가 정년을 맞아 대학을 떠나기 때문이다. 이 호랑가시나무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리 속담에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하였듯이 광주를 가는 김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나무로 알려진 양림동의 호랑가시나무를 잠깐 면회하기로 일정을 잡았다. 주소 만으로 찾기가 어려울 것 같아 시청에 문의 하였더니 나무가 있는 장소는 남구 양림동 230-1 '미국남장로교 한국선교회'라는 이름을 외우기도 힘든 곳에서 관리한다고만 되어 있다. 간신히 광주 기독병원근처라는 것만 알고 찾아갔는데, 온 동네를 다 헤매면서 물어 보아도 아는 이가 없다.
우여곡절 끝에 찾아낸 호랑가시나무는 의외로 찾기가 너무 간단하다. 광주의 명문으로 유명한 수피아 여고의 대강당 옆 산길을 넘어 미국인 선교사 우일선 기념관 쪽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학교입구가 3개씩이나 있다하니 택시를 탄다면 '수피아 대강당' 입구로 바로 찾아가는 것이 쉽게 접근 할 수 있다.
나무는 높이 6.2m, 뿌리목 둘레가 145cm정도이다. 대체로 70cm높이에서 둘로 갈라져 있으며 북쪽 줄기의 둘레는 66cm, 남쪽 줄기의 둘레는 91cm에 이른다. 가지 펼침은 남북 9.2m, 동서 8.2m정도이다. 나무의 아랫부분을 보아서는 두 나무를 가까이 심었는데, 자라면서 붙어버려 한 나무처럼 된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확인 방법이 없다. 우리가 흔히 만나는 호랑가시나무도 이렇게 클 수 있구나하고 감탄이 나올 만큼 크다. 어릴 때 갖는 잎의 날카로운 가시는 이 나무에서 보면 잎에 끝에만 하나 남아있고 나머지는 퇴화되어 있다. 이렇게 커지면 꼭 날카로운 가시로 잎을 보호하지 않아도 자람에 지장이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주변에 어린 나무들이 자생하고 있어서 원래 야생식물로 자라는 것을 관상용으로 보호해 온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가시나무 관과 관련이 있는 나무라 일부러 심은 것인지 알기 어렵다. 나무가 있는 이곳은 1899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배유지(裵裕址), 오원(吳元) 두 사람이 목포에서 광주로 이주하여 전도를 시작했던 본거지라고 한다. 나무의 나이는 400년이라고 하나 굵기와 나무의 규모로 보아서는 150년 전후가 아닌가 짐작된다.
찾아가기
광주시내 가운데 수피아여고 옆에 나무가 자란다.
광주 기념물 17호, 광주시 남구 양림동 230-1, GPS 좌표 : N35°08′05.2″ E126°54′49.2″
광주 학동 느티나무
이 일대는 광주가 도시화되기 이전에 화순으로 넘어 다니는 큰 길목 가에 위치하는 마을이었다. 광주는 동림, 덕림, 유림, 양림, 신림, 운림동의 이름만으로도 수백년된 나무가 숲을 만들고 있었으나 1960년대 도시가 급격히 팽창하면서 모두 없어져 버렸다. 조선시대에는 금남로, 남동을 거쳐 화순으로 통하는 길가에 큰 나무가 즐비하게 서 있었다고 한다. 또 옛 광주읍성의 성터자리이기도 하다. 이 느티나무도 그 당시의 당산목 쉼터나무로 살아남았다. 부근인 서석동에도 큰 느티나무가 있었으나 70년대에 없어져 버렸다. 나무 밑에는 1640년대에 목사를 지낸 동강 신익전(東江申翊全)의 선정비에 천년완골석비(千年頑骨石碑)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따라서 나무의 나이를 대체로 신익전 선생의 목사시절과 같이 본다면 약 350년 전후가 된다.
나무는 높이 19m, 뿌리목 둘레 8.6m, 가슴높이 둘레 5.9m에 이르며 가지 펼침은 동서 26m, 남북 32m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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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동쪽 순환도로인 29번 도로와 시내에서 화순으로 내려가는 역시 29번 도로가 마주치기 전에 전남대 병원이 있으며 나무는 병원의 동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 쪽에 있다.
광주 기념물 제19호, 광주 동구 학동 8(전남대병원 구내), GPS 좌표 : N35°08′22.5″ E126°55′31.1″
광주 원산동 괘고정수(왕버들)
원산동 마을 입구에서 자라고 있는 이 왕버들은 높이 약 15m, 가슴높이 둘레 5.2m에 이른다. 나무는 북쪽으로 약 30도 정도 기울어져 자라며 둘레 1m남짓한 느티나무 한 그루와 붙어서 자란다. 1960~70년대부터 자라는 것으로 짐작되는 생장이 왕성한 젊은 느티나무에 밀려 왕버들은 점점 더 기울어지고 있다.
이 왕버들은 조선초기의 문신 이선재(李先齋, 1389~1454)선생이 심었다고 전해지며, 이 나무가 죽으면 가문도 쇠퇴할 것이라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 뒤 선생의 후손들은 과거에 급제하면 이 나무에 북을 걸어놓고 축하잔치를 열었기 때문에 ‘괘고정수(掛鼓亭樹)’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세월은 흘러 선조22년(1589) 정여립모반사건에 연루된 이선재 선생의 5대손 이발과 그 일족들이 죽임을 당하면서 나무도 말라 죽었다고 한다. 당시 마을에 살던 이주신이란 분이 죽은 나무를 없애려고 불을 질렀으나 타지 않았고 오히려 새싹이 돋아 되살아났다고 알려져 있다. 이것은 바로 광산이씨가 중흥할 징조라고 생각하여 더욱 나무를 아꼈다고 한다.
나무 나이는 이선재 선생이 1500년경 직접 심은 바로 그 나무라면 500년이 된다. 왕버들이 그렇게 오래 살지 않으며 지금의 규모로 보아서는 1700년경부터 자라는 것으로 짐작된다.
찾아가기
광주 나주를 잇는 1번 도로를 타고 내려가다 광주를 벗어날 즈음 표충사 입구를 찾는다. 우회전하여 표충사 직전, 마을 안도로 잠시 들어가면 나무를 만날 수 있다.
광주 기념물 제24호, 광주 남구 원산동 579-3, GPS 좌표 : N35°05′22.0″ E126°51′01.5″
광주 수완동 왕버들
이 왕버들은 광산구 수완동 하완마을(옛 이름 통머리) 앞의 연방죽 가에 자라고 있다. 마을 바로 앞의 정자 옆에 한 그루가 있고 동남쪽으로 200m쯤 떨어진 곳에 또 한 그루가 있다. 이 나무가 서있는 곳은 수완1저수지의 둑 양쪽 끝인데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예전에는 저수지 둑을 따라 열지어서 왕버들이 있었다고 한다.
1879년에 편찬한 광주읍지(光州邑誌)에 기록된 완동방죽(莞洞防築)이 이곳이다. 마을은 효령대군의 후손인 판관공 순빈이 1563년 처음 정착하였다고 하며 현재도 전주이씨가 제일 많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에 저수지를 만들고 이 왕버들을 심었다면 나무 나이는 약 450년이 되는 셈이다.
정자 옆 왕버들은 높이 12.3m, 근원둘레 710cm, 가슴높이 둘레 420cm이며 가지 펼침은 동서 19m, 남북 21m에 이른다. 연방죽 쪽으로 비스듬하게 누워서 자라며 약 2m 높이에서 굵은 가지 셋으로 갈라진다. 동남쪽의 또 다른 왕버들은 이보다 약간 규모가 작으나 곧 바르게 자라며 모양은 더 깔끔하다.
찾아가기
호남고속도로 서광주IC를 빠져나와 우회전하여 하남공단 쪽으로 가다 보면 약 5km쯤에 연방죽이 있다. 주변은 아파트 단지로서 연방죽을 제외하고는 모두 개발되어 있고 2008년 9월 현재도 공사가 진행중이다.
광주 문화재자료 제24호, 광주 광산구 수완동 870-1외, GPS 좌표 : N35°11′56.3″ E126°49′3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