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두양리 은행나무
두양리 은행나무는 강민첨(姜民瞻, ?~1021)장군과 관련이 있다. 강장군은 고려 때 진주 옥봉동에서 태어나 북방 오랑캐의 침입을 막는데 공을 세운 분이다. 특히 현종9년(1018)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으로 쳐들어오자 강감찬 장군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적을 크게 격퇴시킨 고려의 명장이다. 15세 까지 진주향교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나중에 선조들의 사적지가 있는 이곳에 와서 이 은행나무를 심고 무술을 연마하며 학문을 닦았다고 한다.
지금도 은행나무의 동쪽 20m쯤에는 높이 4m의 활쏘기를 하던 사대(射臺)가 대나무 숲속에 있다. 마을 사람들은 대단히 신령스런 나무로 여기고, 이 나무에 지성을 드리면 소원을 들어 준다고 알려져 있다. 치성을 드리려는 사람들이 가끔 찾아온다고 한다. 나무는 산 중턱 대나무 숲이 사방을 둘러싸고 서쪽으로 겨우 접근할 수 있는 좁은 산길이 나 있는 오지에 자란다. 높이 20.3m, 가슴높이 둘레 6.7m, 뿌리목 둘레 8.8m이다. 가지 뻗음은 동서 방향 25m, 남북 22m정도이다. 나무는 굵은 맹아지 둘이 줄기와 거의 붙어 자라며 하나는 가슴높이 둘레 260cm, 또 하나는 180cm이다. 나이는 전설에 따르면 강민첨 장군과 같은 나이로 보아 약 1000년으로 짐작된다. 나무는 건강상태가 좋고 줄기는 미끈하게 쭉 뻗은 모습은 장군의 기상을 보는 듯하다. 암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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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통영 고속도로 단성IC에서 내려 지리산 중산리로 들어가는 20번 도로로 우회전 한다. 약 8km쯤에 1005번 도로와 마주치면 좌회전하여 약 3km쯤의 오른 쪽 마을이 두양리다. 농로를 따라 약 1km쯤 가서 마을 사람을 붙잡고 은행나무로 올라가는 길을 반드시 물어보아야 한다. 오른쪽 산 급경사 시멘트 포장길을 2km쯤 올라가서 다시 오른 쪽 대나무 숲길을 100m쯤 더 들어가야 나무를 만날 수 있다.
경남 기념물 제69호, 1983.12.20 지정, 경남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 GPS 좌표 : N35°14′05.5″ E127°52′42.2″, 표고 236m
통영 충렬사 동백나무
충렬사는 선조 때인 1606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동백나무는 충렬사 입구를 들어서면 왼편에 4그루가 심겨져 있다. 두 그루가 좀 굵으며 가장 굵은 것은 높이 6.3m, 줄기 밑 부분 둘레 170cm, 가슴높이 둘레 100cm정도이다. 1800년 경 심겨진 것으로 짐작된다. 동백꽃이 필 무렵이 되면 옛날 어민들은 한 해 동안 비바람이 순조롭기를 기원하는 풍신제(風神祭)를 지냈다고 한다. 이곳 동백꽃은 유난히 붉고 탐스러워 풍어제를 지낼 때 동네 처녀들이 물동이에 동백꽃잎을 띄워 바쳤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재의 나무 자람은 시원치 않다. 잎의 숫자가 적고 가지 펼침도 잔가지가 많지 않아 전체적으로 엉성해 보인다.
동백나무를 뒤로하고 강한루(江漢樓)로 지나 중문과 마주하면 아름드리 고목 4그루가 찾아간 이를 위압한다. 두 그루는 일본전나무이고 나머지는 미국에서 들여온 태산목이다. 일본전나무의 잎 끝이 凹형으로 찢어져 있으므로 그렇지 않은 우리 전나무와는 쉽게 구별된다. 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사당건물의 바로 옆에는 금목서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지 않나 싶은 나무가 자란다. 건물 앞 한편으로 한 아름을 훌쩍 넘는 일본전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또 솟아있다. 모르긴 하여도 장군이 이런 사실을 알고계신다면 매일 밤 꿈자리가 뒤숭숭하시지 않나 걱정스럽다. 이 이외에도 경내를 아름답게 꾸미려고 심어둔 5월에도 빨간 잎을 달고 있는 노무라단풍, 사잔카로 불리는 애기동백도 눈살이 찌푸려지기는 마찬가지이다.
충렬사를 비롯한 이순신 장군의 유적지에 자라는 여러 종류의 ‘일본나무’에 대하여 이제 우리는 좀 더 깊은 생각을 해볼 시점이다. 어느 나라 나무든 이 땅에 뿌리를 뻗고 살고 있으니 우리 자연의 일부로 봐버리면,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세상살이에 우리나무 일본나무 미국나무하고 따질 필요도 없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는 이유는 당시를 재현하여 오늘의 거울로 삼자는 목적일 것이다. 일본 침략군을 쫓아내기 위하여 목숨까지 받친 장군의 사당에, 일본을 원산지로 하고 일본인들이 가장 아끼는 나무들을 버젓이 심어두고 우리 모두가 태평스럽다는 것은 나무의 내력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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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여객선 터미널의 정 반대 쪽, 통영 외곽도로 길가에 충렬사가 있다.
경남 기념물 제74호, 1985.01.14 지정, 경남 통영시 명정동 213 GPS 좌표 : N34°50′38.5″ E128°25′15.5″
마산 인곡리 모과나무
이곳 모과나무는 의림사(義林寺)란 조용한 사찰의 대웅전 옆 삼성각(三聖閣)이란 자그마한 건물 앞에 자란다. 이 고목 모과나무 한 그루가 최근 지어진 절 건물의 생뚱맞음을 보완해주고 있다.
나무 높이 10m, 가슴높이 둘레 330cm에 이르며, 나무줄기가 근육 모양으로 울퉁불퉁하게 골이 패여 있다. 오래된 모과나무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의 하나이며 잔가지들이 불규칙하게 나 있다. 생육상태가 아주 좋으며 가을이면 모과가 많이 달린다.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는 없으나 대체로 1800년경에 심겨진 것으로 짐작된다.
모과는 예부터 정과(正果)를 만들기도 하며, 기관지 천식, 감기 등의 약제로도 쓰이며 향기가 좋아 실내에 놓아두기도 한다. 절에 모과나무가 있는 것은 찾아오는 신자들에게 열매 보시를 하기 위함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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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통영을 잇는 4차선 국도인 2,14번 국도에서 진북을 조금 지나 의림사로 들어가는 길로 우회전 한다. 약 4km쯤에 근래 새로 중창한 것으로 보이는 웅장한 의림사가 있다.
경남 기념물 제77호, 1985.01.14지정, 경남 마산시 진북면 인곡리 439 GPS 좌표 : N35°08′07.8″ E128°26′30.1″
의령 충익사 모과나무
이 모과나무는 곽재우 장군 휘하에 있던 조사남 장군이 고향인 의령군 가례면 수성마을에 심어 두었던 나무라고 한다. 오랫동안 마을을 지켜주던 당산목으로 토속신앙의 대상이었으나 1978년에 곽재우 장군 유적지 정화사업을 실시할 때 충익사로 옮겨 심었다고 알려져 있다.
충익사의 넓은 잔디 밭 가운데 자라며 땅위 1~2m 높이에서 10여 개의 가지가 갈라져 있어서 전체적인 모습은 단정하고 아름답다. 나무는 높이 10.0m, 줄기 밑 부분 둘레는 404cm이며 가슴높이 둘레도 310cm가 넘는다. 가지 뻗침은 동서방향 9.0m, 남북은 8.0m정도이다. 나무의 줄기가 보디빌더의 근육모양으로 울퉁불퉁하게 골이 패여 있다.
역사적인 근거로 보면 나이가 임진왜란 당시인 1600년경에 심은 나무라고 할 수 있으나 굵기 등으로 감안 할 때 실제로는 1800년 전후에 심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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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고속도로 군북IC에서 빠져나와 의령읍으로 들어간다. 의령읍의 앞산 자락, 곽재우 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익사 사당 안 뜰에 자란다.
경남 기념물 제83호, 1987.05.19 지정, 경남 의령군 의령읍 중리 467-2, GPS 좌표 : N35°18′56.4″ E128°15′39.9″
고성 마암 장산리 장산 숲
고성 장산 숲은 조선 태조 때, 호은 허기(許麒)선생이 마을의 지형적 결함을 보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숲이라고 전해진다. 전설대로라면 1400년 경에 숲이 만들어진 유서 깊은 곳이다. 처음에는 길이가 1000m에 달했다고 하나 지금은 길이 100m, 폭 60m 정도만이 남아있다.
현재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는 약 250여 그루로 우리나라 온대 남부지역에서 주로 자라는 느티나무, 서어나무, 이팝나무, 소태나무, 검노린재나무, 배롱나무, 쥐똥나무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가슴높이 지름 30~50cm가 대부분이며 나이는 100년 전후로 짐작된다. 세월을 지나는 동안 여러 번에 걸쳐 다시 심고 가꾸어 숲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성종 때는 이퇴계 선생의 제자였던 허천수 선생이 이 숲에 정자를 짓고 연못을 만들어 낚시와 산놀이를 즐겼다고 하며, 연못 중앙에는 조그만 섬이 만들어져 있어 숲의 풍경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넓은 들을 가로 지르고 있어서 방풍림의 구실을 한 것으로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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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과 마산을 잇는 4차선 14호 국도, 고성 기점 약 10km쯤에 마암면으로 들어가는 1007번 도로가 있다. 약 5km쯤에 마암 읍소재지가 있고 조금 더 들어가면 길가에 숲이 있다.
기념물 제86호, 1987.05.19 지정, 경남 고성군 마암면 장산리 230-2외, GPS 좌표 : N35°03′20.9″ E128°19′44.8″
거제 장승포 덕포리 이팝나무
나무는 장승포 덕포리 마을 앞을 흐르는 작은 개울 옆 평지에 자란다. 주위에는 매실 농원이 있고 일부는 공장이 들어서 있다. 나무는 이팝나무로서는 비교적 큰 키인 15m에 이르고 가지가 고르게 잘 발달하여 멀리서도 헌칠한 모습이 금방 눈에 들어온다.
가슴높이 둘레는 305cm이고 가지 펼침은 동서방향 16m, 남북방향 14m에 이른다. 나무의 나이는 300년 정도로 짐작된다. 옛날 나무 곁에는 작은 돌무더기로 된 탑이 있었다. 이 작은 탑들은 이곳 사람들이 마을의 평화와 모든 일이 잘 되길 기원하며 쌓았다고 하며, 왜구가 침입할 때 방어용 무기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주위를 정비하면서 아예 없어져 버렸다. 일본 수입종인 홍자단으로 나무 밑을 둘러치기 한 조경이 거슬린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 이팝나무도 꽃이 많이 피고 적게 피는 것으로써 그해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점쳤다고 한다. 5월 8일 전후에 꽃이 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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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거제시를 거쳐 한참을 더 달리면 고개 넘어 조선소로 유명한 옥포이다. 좌회전하여 해안 쪽으로 약 4km쯤 에 덕포해수욕장 가기 직전 좌회전하여 잠시면 왼쪽 마을 가장자리에 자란다.
경남 기념물 제95호, 1990.01.16, 경남 거제시 덕포동 1039, GPS 좌표 : N34°54′24.6″ E128°42′14.9″
진양 정평리 무환자나무
응석사는 신라 진흥왕 15년(554) 연기조사가 창건한 고찰이며 서부 경남에서는 가장 역사가 오래된 절이라고 한다. 신라 말 도선국사는 무환자나무 열매를 먹으면 전염병을 예방하고, 늙지 않고 오래 살며 가정의 나쁜 일을 쫓아준다고 말한 이후 널리 심겨졌다고도 이야기한다. 또 이 무환자나무에 정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나무는 생물학적인 나이는 1750년 경 심은 것으로 짐작되어, 창건당시나 도선국사 때 심었던 나무는 아닌 것 같다. 나무가 자라는 곳은 대웅전 뒤 급경사지이다.
나무높이 15m, 가슴높이 둘레는 215cm이다. 가지 펼침은 동서방향 11.0m, 남북방향 8.0m정도이다. 줄기가 동쪽으로 약 15도 정도 기울어져 있으며 2005년 태풍으로 가지의 상당부분이 분질러져 나무의 바깥 모양이 많이 손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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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와 고령을 잇는 33번 구 도로, 진주 기점 약 4km쯤에 집현면 소재지가 있고 다시 2km쯤 더 올라가면 응석사로 들어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5km쯤에 저수지를 지나면 바로 응석사이다.
경남 기념물 제96호, 1990.01.16, 경남 진주시 집현면 정평리 산77-1, GPS 좌표 : N35°17′37.6″ E128°03′39.0″
진양 동례리 느티나무
마을 한켠, 들판을 내려다보고 자란다. 2층짜리 마을 회관이 너무 나무 가까이 있으나 지금‘까지는 나무 자람에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한 나무처럼 보이지만 나무 가까이 가 보면 1m간격으로 두 나무가 자라면서 수관이 완전히 섞여 있다. 큰 나무는 가슴높이 둘레가 610m, 작은 나무도 315m이다. 가지 펼침은 동서방향 23m, 남북방향18m이다. 나무 밑에는 쉼터로서 기능을 하는 나무 평상이 놓여 있어서 주민들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 대체로 1400년경부터 자라는 것으로 짐작한다.
예전에는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여겨져서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으나 1945년 광복 후 중단되었고, 지금은 마을에 경사가 있을 때만 제사를 지내고 있다. 알려지기로는 동례마을 강안골(현 금곡중학교 뒤편)에서 옮겨 심었다고 한다. 얼마나 큰 나무를 언제 무슨 이유로 옮겨심기를 하였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봄에 모든 가지의 잎이 활짝 피면 풍년이 들고 가지별로 시름시름 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주위에 다른 나무가 없는 탓에 돋보이기도 하지만, 멀리서도 웅장한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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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통영 고속도로 연화산IC에서 내려 금곡면 소재지로 들어간다. 1009번 도로를 타고 진주 쪽으로 3km쯤이면 도로와 붙어서 마을회관 뒤 쪽에 자란다.
경남 기념물 제108호, 1991.12.23, 경남 진주시 금곡면 동례리 1234-16, GPS 좌표 : N35°06′11.7″ E128°11′05.1″
거제 외간리 동백나무
거제도의 전형적인 시골 마을 외간리의 마을 가운데 2그루의 동백나무가 약 50m쯤 떨어져서 동서로 서로 마주 보고 자란다. 우리나라 시골 마을이 다 그러하듯 마을은 빈집이 여기 저기 보이고 나무는 이정묵이란 분의 집터에 자란다. 집은 없어지고 그냥 넓은 터가 밭처럼 이용되고 나무는 나지막한 돌담의 안쪽에 있다. 두 나무의 크기는 비슷하며 나무 높이 7m, 땅위둘레 2m정도로서 남쪽 나무는 밑에서부터 4~5개의 굵은 가지로 갈라져 있고 북쪽나무는 굵은 줄기와 훨씬 가는 줄기가 서로 갈라져 자란다. 가지 펼침은 동서7.0m, 남북 6.0m로서 나무모양은 전체적으로 거의 원형에 가깝다. 나이는 1800년경 심은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두 나무가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것 같아 마을 사람들은 부부나무라고 부른다. 예부터 남쪽에 흔한 늘 푸른 잎 동백나무는 나뭇가지를 혼례상에 올려두고 신랑신부의 무병장수를 빌었다고 한다. 또 늘 푸른 잎처럼 늘 변하지 않은 사람의 징표로 삼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 동백나무 두 그루는 가정의 화목과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수호목으로 신성시 여겨 해마다 12월 마지막 날이면 나무 밑에서 마을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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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고성과 거제시를 잇는 14번 도를 타고 가다 거제시를 5km쯤 남겨놓고 학동해수욕장으로 넘어가는 2번 도로 좌회전한다. 고개를 넘어가 평지에 이를 즈음 우회전하여 외간리 마을로 들어간다.
경남 기념물 제111호 1991.12.23지정, 경남 거제시 거제면 외간리 444, GPS 좌표 : N34°51′28.1″ E128°34′29.5″
거제 한내리 모감주나무 군
숲은 한내리의 서쪽 해안가에 남북방향으로 둘러쳐진 철제 보호책 안에 자란다. 보호책 안에는 36주의 모감주나무와 곰솔 1주, 소나무 2주, 팽나무 2주(흉고둘레 약 2.0m)가 섞여 있으며, 모감주나무의 흉고둘레는 최근에 다시 심은 개체를 제외하면 0.40~1.44m이고 가장 큰 1주(흉고둘레 1.73m)는 최근에 말라 죽어 버렸다. 나무 높이는 작은 것은 3m, 가장 큰 것이 9m 정도 된다. 보호책 밖 남쪽에 어린 모감주나무 20여주가 새로 심겨있고, 북쪽 공간에도 흉고둘레 0.6m 정도의 모감주나무 1주와 곰솔 8주, 팽나무 10여주, 소나무1주, 느티나무 1주가 있어서 전체적으로 작은 숲을 이룬다. 큰 나무는 1850년경에 심은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 말 남해안의 대사찰이었던 거제 하청의 북사를 다녀가던 한 스님이 심었다고 한다. 모감주나무를 심으면 잡귀를 쫓아주고 평안을 가져다준다는 설을 믿고, 당시 심한 해풍과 해일 등으로 고생하던 한내리 주민들의 무사태평을 위해 강원도의 어느 절에서 종자를 가져왔다고 전해진다. 옛날에는 이 숲에서 풍어제를 지냈다고 한다. 모감주나무 숲은 이곳 이외에 안면도, 완도, 포항 등 해안을 따라 분포하며 이는 우리나라가 모감주나무 자생지라는 학설의 근거로서 귀중한 자료이다. 그러나 남해안에서는 유일한 이곳 모감주나무 숲은 다른 곳과 달리 전설이나 지금의 모습으로 보아 자연림이 아니라 심어서 가꾼 인공 숲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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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거제를 잇는 14번 도로, 거제시를 벗어나 옥포 쪽으로 나오다가 한내리 방향 해안도로로 좌회전한다. 약 7km쯤에 한내리가 있고 숲은 바다와 바로 붙어 있다.
경남 기념물 제112호, 1991.12.23지정, 경남 거제시 연초면 한내리 183, GPS 좌표 : N34°55′47.7″ E128°36′02.8″
거제 명진리 느티나무
명진리 마을 앞 들 가운데 서있는 이 나무는 높이 14m, 가슴높이 둘레 7.7m정도이다. 가지 펼침은 동서방향 23m, 남북 20m이며, 대체로 1400년경부터 나무가 자라는 것으로 짐작한다. 지상 1.5m 높이에서 6개의 굵은 가지로 갈라지며 2개는 거의 수직으로 뻗으나 나머지 4개는 수평으로 뻗었다. 그래서 전체적인 나무모양은 마치 우산을 펼쳐 놓은 듯 아름답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정자나무로서 어울림이 좋다. 적어도 50cm이상 복토를 하고 나무줄기에 잇대어 목재 데크 시설을 하여 휴식공간을 만들어 두었다. 잔돌을 밑에 깔고 적어도 50cm이상의 복토를 하였고 나무 바로 옆에는 유치한 디자인의 간이 화장실이 붙어 있다. 문화재의 보호와 활용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할 것인지 깊이 고민하게 하는 사례이다.
이곳 명진리는 신라시대 명진현이 있던 곳이다. 이 나무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목이라 믿고 있다. 그래서 이 마을에 시집오는 새색시는 제일 먼저 이 나무 밑에 와서 제사를 올리고 행운을 빌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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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아는 조선소가 있는 거제시가 아니라 거제섬의 서남쪽에는 거제면이 있다. 나무는 면사무소에서 동쪽으로 난 마을 도로를 타고 약 2km거리에 있는 명진리 마을 남쪽 들판 가운데 자란다.
경남 기념물 제113호, 1991.12.23 지정, 경남 거제시 거제면 명진리 233, GPS 좌표 : N34°50′28.6″ E128°36′43.0″
산청 평지리 은행나무
마을회관 앞 제법 넓은 상법천 가의 다리 옆에 자란다. 마을의 쉼터로서 잘 정비되어 있다. 나무는 높이 15m, 둘레가 4.3m이고 사방 18m로 가지가 퍼져있다. 더 크고 웅장하였으나 몇 년 전 태풍에 위 부분이 분질러져서 나무의 규모가 작아 졌다한다. 바로 옆에 심어둔 젊은 은행나무와 수관이 맞닿아 있다. 줄기에는 길이 2~30cm의 유주(乳柱)가 나와 있어서 특징적이다.
원래 이 은행나무는 마을 앞산에 있었는데, 조선 초 두문동 72현(賢) 중의 한 사람인 김준(金俊)이 이곳에 와서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하도록 심신을 닦던 중에 계시를 받아 마을 안 개울가에 나무를 옮겨 심었다고 한다. 나무를 옮겨 심은 후 마을이 태평하고 번창하게 되어 마을 사람들은 은행나무를 신성시여기며 잘 보호하고 있다. 전설을 그대로 받아 드린다면 은행나무의 나이는 약 600여년이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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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통영 고속도로 산청IC에서 내려 59번 도로를 탄다. 10여km쯤에 차황면 소재지가 있고 1006번 도로로 바꿔타고 다시 10여km를 더 달리다 가회면으로 들어가는 길로 들어선다. 4km정도 달리다가 평지리 법물마을로 들어가는 길로 좌회전한다. 마을 뒤편 마을회관 앞 개울가에 자란다.
경남 기념물 제115호, 1991.12.23 지정, 경남 산청군 신등면 평지리 1295(법물마을), GPS 좌표 : N35°24′37.1″ E128°00′27.0″
밀양 무안리 향나무
사명대사의 땀 흘리는 비석으로 유명한 표충비를 보호하고 있는 표충비각 옆에 향나무가 자란다. 나무 높이는 2.7m남짓하고 가슴높이 둘레는 1.1m, 사방으로 6m쯤 가지 펼침은 동서방향 9.6m, 남북 9.6m이다. 대체로 향나무의 특성은 그대로 두면 곧은 직간성이나 이 나무는 사람 키 높이 정도에서 줄기를 잘라 버리고 맹아를 키워 옆으로 뻗게 하였다. 마치 일본에서 들여온 가이스카 향나무를 둥글둥글하게 전정하여 키운 것처럼 보인다. 전체적인 모양이 너무 인위적이라 고급 정원의 정원수를 보는 느낌이다.
이 나무는 1738년에 사명대사의 5대 제자인 남붕선사가 경북 경산에서 돌을 가져와 이곳에 사명대사의 표충비(表忠碑)를 세운 기념으로 심었다고 알려져 있다. 심을 때 제법 굵은 나무를 캐다 심었다고 보면 지금의 나무는 1700년경에 심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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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시에서 1080번 도로를 타고 마산 방향으로 가다 보면 무안면 소재지인 무안리이다. 무안리 입구 표충비각 옆에서 만날 수 있다.
경남 기념물 제119호, 1992.10.21지정, 경남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903-2, GPS 좌표 : N35°28′06.8″ E128°39′13.1″
하동 범왕리 푸조나무
나무의 크기는 높이 25m, 가슴높이 줄기둘레 6.25m, 가지뻗음 동서방향 25.9m, 남북방향 29.2m에 이른다. 이곳은 지리산의 동쪽 자락으로 화개천의 상류 칠불사 계곡과 의신계곡이 마주치는 개울가에 자란다. 바로 앞이 도로이고 뒤에 주차장, 동쪽은 화개초등학교 왕성분교가 있다. 서쪽은 2007년 봄 오래전부터 있던 초가집을 걷어내고 팔각정 기와 건물이 들어서 있다. 산 쪽으로는 명원(茗園)이란 차 농장이 있으며 나무의 소유자이다. 푸조나무가 자라는 곳은 흔히 우리가 명당으로 말하는 배산임수의 길지이다. 나무는 화개천 옆 약간 언덕바지에 자라므로 위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개울을 내려다보는 풍광이 일품이다. 오랫동안 정자목이면서 신목으로 보존되어 왔다.
나무는 동서남북 고르게 가지를 뻗어 나무의 모습이 단아하면서 깔끔하고 고목으로서 품위도 갖추고 있는 매우 아름다운 수형을 가진 나무이다. 또 뿌리목 부근에는 다른 나무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판근이란 독특한 조직이 발달되어 있다. 판근(板根, buttress root)이란 판자모양의 뿌리란 뜻으로 뿌리목 부근에 생기며 마치 가로수에 삼각 버팀목을 해 준 효과를 내어 나무가 잘 넘어지지 않는다. 이 푸조나무는 고운 최치원선생이 지리산으로 들어가면서 꽂아둔 지팡이에서 움이 나 자랐다고 전해진다. 선생은 제자들에게 ‘이 나무가 살아있으면 나도 살았고 이 나무가 죽으면 나도 죽을 것이다’했다. 천년이 지난 지금 그때 그 나무는 없어지고 다시 자란 나무가 500년이 되었다. 나무 바로 앞을 흐르는 화개천 가에는 최치원 선생이 세상에서 더러워진 귀를 씻었다는 세이암(洗耳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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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화개장터를 거쳐 쌍계사를 올라가는 길을 따라 올라가면 칠불사로 들어가는 삼거리와 마주친다. 우회전하여 잠시면 초등학교 입구 언덕바지에 나무가 자란다.
경남 기념물 123호, 1993.01.08지정,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산37, N35°05′51.1″ E 127°38′15.8″
거창 무촌리 연수사 은행나무
신라 애장왕 때 창건된 절로 알려진 천년 고찰 연수사(演水寺)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왼편에 거대한 은행나무가 자란다. 절은 급경사지의 위쪽에 있고 나무 주위도 경사가 급하다. 주변에 다른 활엽수들이 가까지 자라 숲속에 자라는 나무처럼 보인다. 나무높이 38m, 줄기 밑 부분 둘레는 거의 10m, 가슴높이 둘레 7m에 이르고 가지 펼침은 동서 21m, 남북 20m쯤 된다. 이 나무는 유래에 관하여 몇 가지 전설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고려가 망할 즈음 한 여인은 왕손에게 시집갔으나 남편은 이성계 일파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고 유복자를 낳게 되었다. 아들이 10살이 되자 어머니는 속세를 피하여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될 결심을 한다. 모자는 헤어지면서 아쉬움을 달래고 훗날의 징표로서 아들은 전나무를 심고 어머니는 이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후, 망해버린 왕씨 들의 명복을 빌면서 한 평생을 보낸 어머니와 아들의 운명은 아무도 모른다. 비록 1400년 경 모녀가 따로 따로 심었던 나무는 600년의 세월을 잘 버티었으나, 아들이 심었던 전나무는 최근인 1980년 경 강풍으로 부러져 없어져 버리고 어머니가 심었다는 이 은행나무만 살아남은 가슴 아픈 전설이 있다. 또 다른 전설로는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심은 나무라고 하나 그는 7C사람이니 연수사의 창건연대가 9C이니 맞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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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에서 1084번, 16번 도로를 거쳐 거창학살 사건으로 유명한 신원면 쪽으로 남행한다. 남상면 소재지인 남상을 지나 가파른 고개를 넘으면 바로 연수사로 올라가는 시멘트 포장길이다.
경남 기념물 제124호, 1993.01.08지정, 경남 거창군 남상면 무촌리 40-1, GPS 좌표 : N35°35′42.5″ E127°55′15.6″, 표고 685m
합천 오도리 이팝나무
이 나무는 높이 15m 정도이며 두 나무의 아랫부분이 동서로 마주 붙어 앞에서 보면 Y자 모습이다. 두 나무가 연리가 된 것이 아닌가 의심이 가나 전체적으로 보아 한 나무로 짐작된다. 줄기 밑 부분으로부터 약 70cm쯤 높이에서 갈라졌으며 서쪽나무는 약 70도, 동쪽 나무는 약 45도 기울어 자란다. 가슴높이 둘레는 서쪽나무가 300cm, 동쪽나무가 315cm정도이다. 가지 펼침은 동서 18m, 남북 16m이고 바로 앞은 군립공원인 황매산으로 들어가는 길이라 휴일에는 비교적 교통량이 많다. 줄기 밑 부분 둘레는 약 680cm정도로서 한 나무라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굵은 이팝나무이다. 1700년경부터 자라는 나무로 짐작된다.
특별히 알려진 전설은 없지만 마을에서는 이 나무를 마을을 지켜주는 신령스런 나무로 여기고 있다. 꽃이 피어도 벌과 나비가 날아들지 않은 것도 신기하며 이 나무에 꽃이 활짝 피면 풍년이 든다는 풍습이 전해오고 있다.
우리나라의 크고 오래된 이팝나무에는 거의 한결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것은 이팝나무의 꽃피는 것으로서 그 해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점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나무도 마찬가지로 기상목 겸 정자목으로 오랫동안 보호 받아 온 것으로 짐작된다. 5월 8일 전후에 꽃이 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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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와 고령을 잇는 33번 도로 중간쯤에 삼가면 소재지인 삼가라는 곳이 있다. 여기서 60번 도로로 들어가 약 10km쯤에 가회면 소재지가 있고 다시 3km쯤 도로 가에서 나무를 만날 수 있다. 나무 뒤쪽으로는 제석사란 절 건물이 들어서 있다.
경남 기념물 제134호, 1993.12.07 지정, 경남 합천군 가회면 오도리 619, GPS 좌표 : N35°26′51.2″ E128°01′30.0″
사천 우천리 연천 숲
이 숲은 풍수지리 사상에 따라 마을 앞 돌산의 험하고 강한 기운을 누르기 위하여 앞에 숲을 만들었다고 한다. 와룡산 줄기인 뒷산이 솔개가 날아와 육 고기를 먹는 형상이고 앞산과 뒷산이 대칭이 되어 그 사이에 하천이 흐르고 부락이 형성되어 연천(鳶川)이라 칭한다고 한다. 숲이 언제 만들어 졌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마을이 성립되면서 자연스럽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느티나무 28그루와 팽나무 21그루, 말채나무 8그루 등 57그루의 고목이 자그마한 숲을 이룬다. 지금은 나무 밑에 표고를 제배하기도 하고 방풍림, 풍치림의 기능을 하며 마을 사람들의 쉼터로서도 활용된다. 유원지처럼 여름날이면 수많은 피서객이 몰려와 보호가 차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나무는 대부분 1900년 전후에 심겨진 것으로 짐작되며, 굵은 느티나무는 1700~1800년경에 심겨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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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시에서 삼천포 방향으로 3번 도로를 타고 가다 사남면 소재지에서 고성 쪽으로 가는 1001도로를 5km쯤 가면 우천리 길옆에서 연천 숲을 만날 수 있다.
경남 기념물 제141호, 1994.07.04, 경남 사천시 사남면 우천리, GPS 좌표 : N35°00′58.2″ E128°07′35.9″
창녕 사리 배롱나무 군(群)
이곳 배롱나무 군락은 임진왜란 때 영산과 창녕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신초(辛礎, 1568~1637)장군이 심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절벽 높다란 곳에 문암정이란 정자를 짓고 노후를 보내면서 절벽아래 계성천을 따라 선비의 꽃인 배롱나무를 심었다. 따라서 현재 나무의 나이는 약 350년 정도이며 작은 나무는 다시 심은 것으로 짐작된다.
나무의 크기는 지름 30~50cm에 이르며 키는 4~6m정도이다. 자료에는 35그루가 자라고 있다고 하나 그 사이 많이 없어지고 대체로 20여 그루가 남은 것으로 보인다. 배롱나무 군락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대경목이며 절벽의 좋지 못한 환경에서도 나무가 삶을 비교적 잘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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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에서 마산 쪽으로 4차선 국도인 5번 도로를 타고 4km쯤 거리에 계성리란 제법 큰 마을이 있다 여기서 좌회전하여 계성천을 타고 들어가면 2km쯤 바로 길가에 법성사란 최근 신축한 큰 건물이 있고 나무는 계성천 건너편 절벽 자락, 문암정 정자 아래에 자란다.
경남 기념물 제149호, 1995.05.02지정, 경남 창녕군 계성면 사리 산11, GPS 좌표 : N35°29′20.9″ E128°31′51.5″
거창 원천 느티나무
폐교된 가산초등학교 운동장 남쪽에 자리를 잡았다. 나무 높이 35m, 가슴높이 둘레 7.8m에 이르며 동서 25m, 남북 25m의 원형 수관을 가진다. 한 마디로 저절로 감탄사가 나올 만큼 우람하고 건강하며 아름다운 나무다. 특히 가을 단풍이 시작할 즈음이면 황색계열 단풍이 나무의 품위를 한층 더 높여준다.
원천이란 마을 이름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순사한 뒤 대사헌 벼슬을 받은 전팔고 선생의 호를 땄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이 느티나무는 전팔고(全八顧) 선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이 일대에는 원래 2천여 평에 많은 느티나무가 심겨져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다 베어 버리고 지금의 이 나무만 남았다고 한다.
1970년대 까지도 이 나무는 마을을 수호하는 신목(神木)으로 정월 대보름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냈다고 한다. 나무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가 없으나 굵기와 전팔고 선생 이야기를 중심으로 추정해 보면 보아 1600년 전후에 심겨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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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올림픽 고속도로 가조IC를 빠져나오면 바로 가조면 소재지이다. 서쪽으로 1084,1099 도로를 잠시 달리면 바로 들판 가운데 마을이 장기리이며 나무는 옛 가산초등학교 자리에 자란다. 근처에 오래된 느티나무가 많으므로 초등학교를 찾는 것이 가장 빨리 접근하는 방법이다.
경남 기념물 제197호, 1997.12.31지정, 경남 거창군 가조면 장기리772-1, GPS 좌표 : N35°43′36.8″ E127°59′47.8″
거창 무촌리 은행나무
무촌리 은행나무는 얼핏 보아 3개의 나무가 가까이 붙어 자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무 밑바닥이 상당히 복토되었고 마을 사람들의 증언으로 미루어 원래 한 나무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원줄기는 없어지고 죽은 줄기 주변에서 새싹이 자라 3개의 나무처럼 된 것이며 다시 굵은 가지로 갈라져 전체적으로 8개의 줄기로 보인다. 나무는 밑동부터 옆으로 뻗어나간 것이 아니라 곧 바로 하늘로 뻗어 있다. 대체적인 나무 모양은 훌쭉해 보인다. 마을 회관 앞에 자라며 주변은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어서 답압을 받고 있고, 각종 쓰레기를 가져다 두고 있어 보존에 문제가 많다.
나무의 굵기는 대체로 세 나무 각각 한 아름 정도이며 나무 높이는 목측으로 20m쯤 된다. 나이는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으나 1600년경에 심겨졌다고 보이며 암나무이다. 직선거리 5km남짓에는 수나무인 연수사 은행나무가 있어서 둘은 예부터 서로 관련성이 있지 않았나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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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에서 1084번, 16번 도로를 거쳐 거창학살 사건으로 유명한 신원면 쪽으로 남행한다. 곧 남상면 소재지인 남상이고 나무는 마을 회관 앞에 자란다.
경남 기념물 제198호, 1997.12.31지정, 경남 거창군 남상면 무촌리 1344-38, GPS 좌표 : N35°38′17.1″ E127°54′30.5″
남해 당항리 느티나무
마을 앞 넓은 들판을 가로 지르는 포장 도로 옆에 자란다. 높이가 19m, 가슴높이 둘레 6m나 되며 가지 펼침은 동서 및 남북이 각각 20m되는 거대한 나무다. 주변에 높은 건물이나 다른 나무가 없어서 나무의 모습은 한층 돋보인다. 마을과 마을 사이에 자리 잡고 있어서 두 마을의 경계 역할도 하는 이 나무는 당산목으로 보호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거목을 마을의 수호신처럼 받드는 민간신앙이 얽혀있고 여름이면 마을 사람들의 편안한 쉼터로 사랑받아 왔다. 매년 나무에다 마을의 무사태평과 대풍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내 왔다고 한다.
나무는 대체로 1700년경에 심겨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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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에서 상주 해수욕장으로 내려가는 19,77 도로를 타고 잠시 내려가면 창선으로 들어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이 이동면 소재지이며 여기서 2km쯤 내려가다 남면으로 가는 1024도로로 들어선다. 약 8km쯤 남면 소재지를 조금 못 미쳐 우회전 하여 마을 앞에서 만날 수 있다.
경남 기념물 제199호, 1997.12.31지정, 경남 남해군 남면 당항리 1503-4외 3필, GPS 좌표 : N34°46′13.1″ E127°53′20.1″
남해 죽전 비자나무
이 나무는 죽전마을 앞 작은 개울 바닥에 있는 우물과 붙어서 자란다. 나무뿌리가 반쯤 석축에 묻혀 있으며 비가 와서 개울물이 많아지면 잠기기도 하는 위치이다. 바로 옆으로는 작은 다리가 놓여 있다.
우물 위쪽으로 굵은 뿌리가 뻗어난 것이 보이며 줄기와의 경계가 애매할 만큼 나무는 비틀려져 특별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다. 우물 옆에는 편평한 바위가 있고 주위는 시멘트 시설물을 만들어 여름날이면 시원한 쉼터로도 활용되고 있다. 나무는 높이 12m, 둘레 7m에 이르는 거목이다.
나무는 1400년경부터 자란다고 알려져 있으나 근거자료는 없고 막연한 추정일 뿐이다. 남해는 원래 삼자(三子)라 하여 비자, 유자, 치자가 많이 나던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비자는 현재 단목으로서는 이곳 비자나무 밖에 남아 있지 않아 옛 영광을 짐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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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에서 상주 해수욕장으로 내려가는 19,77 도로를 타고 잠시 내려가면 창선으로 들어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이 이동면 소재지이며 여기서 2km쯤 내려가다 남면으로 가는 1024도로로 들어선다. 약 8km쯤 남면 소재지를 조금 못 미쳐 우회전 하여 마을 앞에서 당항리 느티나무를 만날 수 있다. 비자나무는 여기서 옆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마을 위쪽 개울가에 자란다.
경남 기념물 제200호, 1997.12.31 경남 남해군 남면 당항리 1997외 4필, GPS 좌표 : N34°46′26.0″ E127°53′13.2″
함양 개평리 소나무
이곳은 고유의 전통한옥이 잘 보존돼 있으며 ‘개평마을’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백여 가구에 주민 220여명이 살고 있으며 정여창 고택을 중심으로 60여 채의 전통한옥이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14세기에 하동 정씨와 경주 김씨가 들어와 살다 15세기에 풍천 노씨가 새로 들어와 살았고. 현재는 하동 정씨와 풍천 노씨가 대부분이다. 마을입구 왼쪽으로 우물과 그 우물자리를 표시하기 위한 바위가 있는데, 이 물은 옥계천 자연 암반 위에 있던 샘물 다섯 개 중의 하나다. 마을이 배의 형국이라 우물을 파면 안된다는 전설이 있어 마을사람들은 이 다섯 개의 우물 만 이용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초등학교를 지으면서 지금까지의 금기 사항을 어기고 새로 우물을 판 뒤부터 마을이 점차 기울기 시작했다고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다.
개평리 소나무는 당송으로도 불리며 품종은 처진소나무로서 개울 옆 급경사지 위 밭 가장자라에서 밑으로 가지를 늘어트린 채 자라고 있다. 나무 높이는 16m, 가슴높이 둘레는 295cm이다. 원래 비슷한 크기의 두 그루가 있었으나, 한 그루는 2003년 경 밭두렁을 태우다 불이 옮겨 붙어 죽어 버리고 현재는 한 그루 만 남아있다.
배 모양인 마을의 형상에서 이 처진 소나무가 돛을 연상케 하므로 청하현감을 지낸 정덕재가 종암(鍾巖)이라는 글자를 새겨 어느 누구도 소나무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최근까지도 마을 사람들이 당송 밑에서 마을 제사를 지낸 후 각 가정의 나쁜 기운을 막고, 건강과 평화를 빌기 위해 이 당송 밑에서 지신밟기를 하였다고 한다.
나무는 풍천 노씨가 함양으로 들어와 살게 되면서, 1500년 경 옥계 노진 선생의 선조가 심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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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북고속도로 지곡IC를 빠져 나오면 바로 함양으로 내려가는 24번 도로와 마주친다. 약 4km쯤 거리에 지곡면 소재지가 있는 사거리가 나오고 우회전하면, 이 일대는 전통 한옥 마을이 있다. 나무는 개울가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왼편 언덕에 자란다.
경남 기념물 제211호, 1998.11.13 지정,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262-1
함양 금대암 전나무
금대암은 지리산을 바라보는 3대 길지(吉地)로 알려져 있고 지리산 주능선의 거봉들을 한 눈에 관찰 할 수 있는 곳이다. 주봉인 천왕봉에서 좌로 중봉이 있고 오른 쪽으로 반야봉, 제석봉, 촛대봉 등 해발 1,500m넘는 능선이 금대암에서 마주 대할 수 있는 봉우리 들이다. 전나무는 금대암의 바로 앞 20m쯤 내려간 대나무 숲에 자라고 있다. 얼마 전까지도 2그루가 있었으나 지금은 한 그루만 남아있다.
나무 높이는 ‘40m로서 우리나라 전나무 중 가잔 키 큰 나무’로 알려졌으나 최근 정밀조사에서 높이는 26m, 가슴높이 둘레 299cm, 가지 펼침은 동서방향 7.0m, 남북 7.0m정도이었다. 보는 방향에 따라 모양새가 조금씩 다르나 금대암에서 내려다 볼 때가 전나무의 전형적인 긴 원뿔형 수형으로 가장 아름답다.
금대암은 신라태종 무열왕3년(656년)에 행호조사(行乎祖師)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해인사의 말사(末寺)로서 금대사(金臺寺)라고도 한다. 행호조사의 또 다른 창건 년대가 조선조 초인 태조3년(1403)년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1950년 6.25전란 때 소실된 것을 뒤에 다시 지었다. 금대암은 도선국사도 인정한 유명한 참배지이며 서산대사도 수도했다는 구전이 전해오고 있다. 조선조 김일손이 쓴 기행문(1489년 4월 16일)의 기록에 정여창과 함께 산사를 찾으니 20여명의 스님이 정진도량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 유효인 선생의 시(詩)중에 “잘 있느냐 금대사야 송하문(松下門)이 옛날 같구나, 송풍(松風)에 맑은 꿈 깨어 문득 잠꼬대를 하는구려.” 라는 시가 남겨져 있다.
여기서 말하는 송(松)은 전나무이므로 당시에도 적어도 몇 그루의 전나무가 절 앞에 자라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무 나이는 김일손이 금대암을 찾았을 때 벌써 상당히 자란 나무가 있었으며 금대암의 창건 년대를 조선조 초로 보는 견해를 고려하면 1400년경에 심은 나무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무의 굵기로 다른 곳 전나무와 비교 짐작하여 볼 때 생물학적인 실제 나이는 1800~1850년에 심겨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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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고속도로 지리산IC를 빠져나와 전북 인월읍으로 들어간다. 읍 우회도로가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60번 도로이고 실상사를 지나 전북과 경남 경계를 지나자마자 왼쪽에 금대암 입구 시멘트 포장길이 보인다. 타이어 타는 냄새가 난다는 급경사 길을 3km쯤 올라가면 금대암이 나온다.
경남기념물 제212호, 1998.11.13, 경남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 산17-1 GPS 좌표 : N 35°24′15.8″, E 128°40′23.6″ 표고 690m
함양 도천리 소나무
이곳 도천리는 조선 초기의 문신인 하륜 대감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던 마을이다. 뒤에 후손 중의 한 사람인 하맹보 (河孟寶)선생이 우물 뒤에 터를 잡고 살았다. 그 부인이 매일 새벽 이 우물에 정화수를 떠 놓고 남편과 아들을 위해 빌었는데, 남편은 충·효·예를 갖춘 공신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 하황도 군자감을 지냈다고 한다. 아들 하황은 어머니의 정성을 기리기 위해 우물 위쪽에 한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서 오늘에 이른다는 것이다. 나무가 자라면서 용이 승천하는 모습으로 변해 갔고 우물은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는 춘계 하기현 선생이 살던 집 앞에 나무가 있으며 나무 앞에는 작은 연못이 만들어져 있다. 나무는 약 45도 경사지게 비스듬하게 자라고 높이 10m, 가슴높이 둘레 280cm 정도이며 가지 펼침은 사방 20m에 걸쳐 있다. 용이 우물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형상을 한다하여 용천송(龍天松)이라고도 한다. 나무는 1650년경에 심겨진 것으로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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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상림의 앞, 위천을 따라 새로 난 1001도로를 3km 쯤 달리면 88고속도로가 보이고 삼거리가 나타난다. 좌회전하면 바로 오른 쪽 마을이 도천리이다. 나무는 마을을 관통하여 한참 들어간 마을 뒷산 자락에 자란다.
경남 기념물 제213호, 1998.11.13지정, 경남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 717, GPS 좌표 : N35°32′18.0″ E127°41′50.3″
통영매물도 후박나무
매물도 후박나무는 멀리 앞 바다를 내려다보고, 매물도의 중심 대항 항구 뒷산에서 섬의 지킴이로서 자리 잡고 있다. 나무는 기념물로 지정된 큰 후박나무와 약 5m거리에 작은 후박나무를 합쳐서 두 그루가 같이 자라며 나뭇가지는 서로 이어져 있다. 서쪽 큰 후박나무는 1700년경에 심겨진 것으로 추정되며 땅위 1.4m쯤에서 둘로 갈라져 자란다. 줄기 밑 부분 둘레는 420cm이며 굵은 가지는 둘레가 320cm, 좀 가는 가지는 둘레 280cm에 이른다. 높이는 22m쯤 이다.
동쪽의 좀 작은 나무는 줄기 밑 부분 둘레 210cm, 가슴높이 둘레 180cm, 키 18m쯤 이고 바로 뒤쪽에는 높이 4m, 폭 3m의 커다란 바위가 있다. 대체로 1900년경부터 자라는 것으로 보인다.
이 후박나무는 옆에 있는 큰 바위와 함께 마을을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당산목으로 섬사람들이 아껴 왔으며, 마을의 젊은이들은 군에 입대할 때나 멀리 다른 고장으로 나갈 때는 이 나무 밑에 와서 무사하기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정월보름날이면 마을사람 중에서 집안에 궂은일을 당하지 않은 깨끗한 사람을 제관으로 선정하여 동신제를 지냈다. 행사가 끝나면 온 마을 사람들이 풍물을 올리면서 집집마다 돌아가며 지신밟기를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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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에서 여객선을 타고 1시간정도 만에 대매물도로 데려다 준다. 거제도 저구항에서 들어가면 30분 정도로 갈 수 있다고 한다. 대매물도 대항 항구에 내려 급경사지를 올라가면 나무는 마을 뒤 KT회사 건물과 가까운 뒷산 자락에서 만날 수 있다.
경남 기념물 제214호, 1998.11.13지정, 경남 통영시 한산면 매죽리
합천 학사대 전나무
해인사 대적광전과 대장경을 보관하는 건물인 수다라장 건물 사이의 서쪽 언덕에 높다랗게 자란다. 주위에는 느티나무 1그루 전나무 3그루, 소나무 여러 그루가 같이 자란다. 원 줄기는 곧 바르며 약 5m높이에서 굵은 가지가 나와 45도로 뻗었다가 다시 원줄기와 나란히 자란다. 원래 북쪽으로 뻗은 가지가 하나 더 있었으나 몇 년전 벼락을 맞아 잘려나갔다고 한다. 주위의 다른 나무들과 수관 경쟁 상태에 있은 탓으로 수관발달이 방해를 받고 있다. 수간은 직립했으나 수관이 동쪽으로 치우쳐 발달했기 때문에 북쪽에서 바라본 수형은 경사지 아래쪽으로 치우친 삼각형으로 보인다. 나무의 규모는 높이 30m, 가슴 높이 둘레 5.2m, 가지 뻗음은 동서방향 14.4m, 남북방향 14.0m이다. 지금의 나이는 약 250년 정도이다. 이 나무는 이런 전설이 전해진다.
신라 말의 대학자 고운 최치원 선생은 스물아홉의 나이로 한림학사 벼슬을 하였다. 만년에 모든 공직을 버리고 이곳 홍류동 계곡으로 들어와 유유자적하면서 어느 날 제자들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나는 이곳을 떠날 것이다. 이 지팡이를 꽂고 갈 것이니 만약 싹이 터서 잘 자란다면 내가 살아있는 것이니 학문에 전념하라’면서 홍제암 뒤 진대밭골로 사라져 버렸다. 선생은 이후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지며 그때의 지팡이가 자라 지금의 전나무가 되었다는 것이다. 선생은 서기 857년에 태어났으니 전설대로 라면 886년에 이 나무를 심은 셈이니 지금의 전나무 나이는 1천1백년이 넘었다. 그런데 18C 조선후기의 학자인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1705~1786) 선생은 이 나무에 대한 중요한 기록 하나를 남긴다. 그의 시문집 《백불암집》에는 1757년(영조33) 해인사를 관람하고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을 썼다. 글속에 “최치원 선생이 손수 심은 소나무(실제로는 전나무)가 이미 말라버리고 그 등걸만 남았다. 지금 마침 2월이고 비가 오니 소나무를 심기에 적합하므로 종을 시켜 4그루의 작은 소나무를 캐서 그 곁에 심게 했다.”는 것이다. 이 기록에 나온 대로 지금의 나무는 원래 자라던 학사대 전나무는 죽어버리고 1757년경에 새로 심은 나무임을 알 수 있다. 전나무의 특성으로 볼 때 그렇게 오래 사는 나무는 아니므로 길게 잡아 4~5백년을 살았다면 대체로 지금의 나무는 최치원 선생이 심은 나무의 손자나무쯤 된다.
경남기념물 제215호, 1998.11.13지정,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해인사 경내), GPS좌표 : N 35°48′06.8″, E 126°05′51.5″ 표고 662m
산청 실매리 왕버들 군(群)
실매리 점남마을 앞 단계천을 따라 남북 방향으로 9그루의 왕버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가장 굵은 나무가 가슴높이 둘레 4m정도이며 대부분 둘레 2m를 조금 넘는 정도이다. 높이 15m정도이며 1850년 전후에 심겨진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실매리에 거주한 연일김씨의 선조인 김주(金柱)란 분이 조성한 것이라 전한다. 동쪽으로 향한 마을의 바람막이 나무 겸 홍수를 막기 위한 숲으로 보인다. 원래 이 보다 더 길게 조성되었을 것이나 지금은 길이 50m남짓하다. 근래까지 마을 주민의 휴식처 및 운동장으로 사용되어 왔다.
찾아가기
대전 통영 고속도로 산청IC에서 내려 59번 도로를 탄다. 10여km쯤에 차황면 소재지가 있고 계속 북으로 3km쯤을 더 달리면 실매리 입구이고 숲은 왼편의 점남마을 입구 단계천 변에 있다.
제232호, 2001.02.22, 경남 산청군 차황면 실매리 765-3 GPS 좌표 : N35°29′09.2″ E127°55′58.4″
거제 윤돌섬 상록수림
윤돌섬은 거제의 동쪽 구조라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양지마을 남쪽 500m 바다 가운데 있는 작은 무인도이다. 면적은 11,207m(3,390평)이고 섬의 70∼80%가 상록활엽수로 덮여있다. 구성 수종은 동백나무와 구실잣밤나무가 가장 많고 광나무·팔손이·센달나무·자금우·보리밥나무·남오미자·돈나무 등의 상록수가 자라고 있다. 상록수림 바닥에는 이대가 무성하고 남쪽 절벽 가까이는 해송이 번성하고 있다. 특히 이 섬의 남쪽 높은 곳에는 가슴높이 둘레가 2.5∼3.5m나 되는 구실잣밤나무 노거수 들이 여러 그루 자라고 있다. 낙엽 활엽수로는 팽나무·예덕나무·보리수나무·천선과나무·산검양옻나무·옻나무·자귀나무·칡·사위질빵·개머루·으아리 등이 상록수림 가장자리에 자라고 있다.
옛날 윤돌섬에는 한 과부가 윤씨 성을 가진 삼형제를 데리고 살고 있었고, 건너편 양지 마을에는 바다에서 아내를 잃고 날마다 허공에 뜬 달만 쳐다보고 있다고 해서 주위 사람들이 망월이라고 부르는 홀아비가 살고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은 어느덧 서로 간에 연정을 느끼게 되었고 물이 많이 빠지는 밤이면 윤돌섬의 과부는 발을 걷어 올리고 물을 건너 양지마을 망월 노인을 찾아가게 되었는데 추운 겨울이 되자 이를 몰래 바라보고만 있던 아들 삼형제는 어머니를 위하여 큰 돌을 날라 징검다리를 놓아주니 그 후로는 어머니는 버선을 벗지 아니하고도 양지마을 망월 노인을 수시로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한다. 윤씨 삼형제가 어머니를 위하여 돌다리를 놓았다 해서 윤돌섬 또는 효자섬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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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의 동쪽 14번 해안도로 타고 장승포-외도 유람선 선착장-구조라 해수욕장으로 이어진다. 구조라 앞 바다에 있으며 무인도이고 허락받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 전설과는 달리 걸어서 들어갈 수는 없다.
경남 기념물 제239호, 2002.02.14 지정, 경남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리 산72, GPS 좌표 : N34°48′31.4″ E128°41′07.3″
합천 성산리 느티나무
숲은 황강 둑과 이어진 좁은 면적에 자라고 있다. 이곳은 옛날부터 합천 북부지방 사람들이 황강을 배로 건너서 남쪽의 초계 지방을 오가는 큰 나루터였던 곳이다. 황강다리가 놓인 지금 이 나루터에는 느티나무들만 한가로이 서 있을 뿐이다. 이들 느티나무 남쪽의 황강 제방은 강물의 범람과 느티나무들의 보호를 위하여 현재 4m 높이의 콘크리트 옹벽이 30m 정도 처져 있다.
15세기 중엽 문화 류씨, 장령공의 차남인 류맹지(柳孟智)선생이 황강 변에 정자를 지을 때 심은 나무이다. 그 때 심은 나무 중 가장 굵은 고목은 말라 죽어 버리고 현재는 5그루가 모여 작은 숲을 이루고 있다.
지금 가장 굵은 나무는 가슴높이 둘레가 6m 이상이 되며 높이도 20m쯤 된다. 줄기 안쪽에 누가 불을 질러 까맣게 타 버렸으나 자람은 왕성하다. 전설로 알려진 나이는 1500년경부터 자라는 셈이나 실제로는 1700년 전후에 심겨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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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에서 의령으로 이어지는 24번 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면소재지 ‘초개’가 있다. 좌회전하여 황강하류에 걸린 다리를 건너면 쌍책면 소재지다. 숲은 면사무소 건물 앞, 초등학교와 이어서 있다.
경남 기념물 제240호, 2002.02.14 경남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598, GPS 좌표 : N35°34′19.8″ E128°17′03.4″
함양 개평리 소나무군락지
이곳은 고유의 전통한옥이 잘 보존돼 있으며 ‘개평마을’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다. 이 마을은 백여 가구에 주민 220여명이 살고 있으며 정여창 고택을 중심으로 60여 채의 전통한옥이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14세기에 하동 정씨와 경주 김씨가 살다 15세기에 풍천 노씨가 들어와 살았고, 현재는 하동 정씨와 풍천 노씨가 대부분이다. 마을입구 왼쪽으로 우물과 그 우물자리를 표시하기 위한 바위가 있는데, 이 물은 옥계천 자연 암반 위에 있던 샘물 다섯 개 중의 하나다. 마을이 배의 형국이라 우물을 파면 안 된다는 전설이 있어 마을사람들은 이 다섯 개의 우물 만 이용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초등학교를 지으면서 지금까지의 금기 사항을 어기고 새로 우물을 판 뒤부터 마을이 점차 기울기 시작했다고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다.
이 전통 마을에는 북남으로 흐르는 개울이 있고 기념물로 지정된 나무는 개울 서쪽 둑과 야산의 능선을 따라 자라는 소나무 들이다. 울창한 숲이 아니라 굵은 소나무가 띄엄띄엄 간격을 두고 몇 그루씩 무리를 이루어 길게 뻗어 있을 뿐이다. 마을을 지킨다는 풍수적 의미에 따라 숲을 만들었다고 한다.
나무는 1600~1700년경에 심겨진 것으로 보이며 큰 나무는 높이 15m, 가슴높이 둘레 160~220cm에 이르며 작은 것은 높이 10m, 가슴높이 둘레 80~150cm정도이다. 지금 100여주 정도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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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북고속도로 지곡IC를 빠져 나오면 바로 함양으로 내려가는 24번 도로와 마주친다. 약 4km쯤 거리에 지곡면 소재지가 있는 사거리가 나오고 우회전하면, 전통 한옥 마을이 있다. 나무는 개울 건너편 언덕을 따라 몇 그루 씩 줄을 이루어 자란다.
경남 기념물 제254호, 2004.10.21지정,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251,255,250,256,산11-1
하동 청룡리 은행나무
이 나무는 하동 옥종면 소재지인 청룡리의 마을 가운데 자란다. 높이 약 1m의 석축을 직사각형으로 길게 쌓고 나무 바로 밑을 제외하고는 모두 보드 블록을 깔았다. 주위는 화강석 돌기둥으로 장식을 하고 나무 옆은 의자를 놓아 동네 쉼터로 쓴다. 나무의 자람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런 쓸데없는 복토 때문이다. 나무는 소개 간판에 높이 38m라 하였으나 최신 레이저 측고기로 측정한 실제 높이는 21.2m이다. 뿌리목 둘레 12.3m에 가슴높이 둘레 10.1m나 된다.
은행나무 고목의 대부분은 맹아지가 자라 나중에 줄기와 붙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 나무 역시 이런 경우의 대표적인 나무로 맹아지의 흔적을 나무 주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실제 원줄기는 거의 고사한 형태로 가운데 흔적이 보이고 직립으로 돋아난 8개의 맹아 가지가 붙어 자랐다. 가지 펼침은 동서 19m, 남북 25m정도 된다. 나무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어서 짐작이 어려우나 대체로 4~600년 정도로 짐작할 수 있다.
이 나무는 세상에 큰 변고가 있을 때 마다 울음소리를 낸다고 하며 이외에도 나무에 얽힌 전설이 흥미롭고 다양하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섬기면서 오늘날에도 매년 음력 정월 그믐날이 되면 이 나무 아래에서 동제를 지낸다. 또 옥종면에서는 10월 1일을 은행나무 축제일로 정하여 문화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암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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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통영 고속도로 단성IC에서 내려 지리산 중산리로 들어가는 20번 도로로 우회전 한다.
약 8km쯤에 1005번 도로와 마주치면 좌회전하여 약 8km쯤에 옥종면 사무소가 있는 청룡리다.
나무는 마을을 흐르는 작은 실개천 건너편에 자란다.
제253호, 2004.03.18 경남 옥종면 청룡리 266, GPS 좌표 : N35°10′39.2″ E127°52′43.9″
하동 정금리 차나무
이 차나무는 개인 소유 차밭(도심다원)의 급경사지에 계단상으로 조성된 석축 위에 있으며, 땅위 10cm에서 2개(줄기둘레 30cm, 40cm)로 갈라진 후 다시 30cm 부위에서 5개로 갈라져 자란다. 나무 주위에는 목제 데크와 안내판 및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차밭은 오래전에 조성된 곳으로서 굵은 차나무들이 여러 그루 있었으나 정비하면서 제거되고 현재 한 그루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나무의 크기는 높이 4.2m, 줄기 밑 부분 줄기둘레 62cm, 가지 펼침 동서방향 5.6m, 남북방향 5.3m정도의 자그마한 나무다.
이 차나무의 나이가 100년 전후, 500년, 1,000년 등 여러 가지로 알려져 있어서 혼란스럽다. 특히 나이 1,000년의 근거는 한국양명회 소속 안모씨가 차나무 줄기의 1년간 비대 생장량을 150micron(㎛)으로 보고 줄기의 직경 150mm(실제 이번 조사 자료는 200mm)에 대하여 계산한 것이라고 한다(2002. 5. 26, 차의 날 행사자료). 그러나 소엽종 차나무의 수명이 2백년을 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후는 주간(主幹)이 죽고 맹아가 돋아나서 다간성으로 자라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연간생장량 150micron(㎛)은 안씨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인용문헌이나 실험값이 없어서 믿기가 어렵다. 차나무의 세포크기가 약 50㎛이므로 연간 나이테 하나에 불과 3개의 세포로 천년을 살았다는 결론이나 생리적으로 있을 수 없다. 또 나이테 넓이와 나무 지름으로 나이를 계산 할 때는 반경으로 계산하여야 하므로 계산방식도 기본적으로 오류가 있다. 필자는 2001년 경 이 나무 근처의 다른 굵은 나무를 현미경으로 나이테를 비공식 조사한 바 있다. 당시 측정 나이는 약 80년이며 차나무의 생장상태 등을 고려하여도 1천년은 과도한 계산이다. 연간 생장량을 1~2mm정도로 보면 지제부 반경이 약 100mm이므로 1900년 전후부터 자란다고 생각되며, 최대로 올려 잡아도 자람 시작년도가 1800년경을 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나이는 높게 잡아도 100~200년 정도이다. 2012년 현재 이 나무는 거의 고사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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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를 들어가다 정금리 도심마을 쪽으로 우회전한다. 나무는 도심다원이란 개인 차밭의 급경사지 산 쪽에 자란다.
경남 기념물 제264호, 2006.01.12지정, 경남 하동군 화개면 정금리 산74, GPS 좌표 : N35°13′15.6″ E127°38′53.9″
가덕도 자생 동백군
동백나무 군락은 가덕도의 국수봉과 남산의 동쪽 바다 가까운 중앙계곡을 중심으로 넓이 6,600㎡에 걸쳐 자라고 있다. 동백나무의 나이는 50∼100여 년 정도로 추정되며, 2,500그루 정도가 군락을 이루며 자라고 있다하나 실제 눈에 보이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가슴높이 둘레 20~50cm가 대부분이며 높이는 8m전후이고 나이는 대체로 1900~1950년경부터 자라는 나무로 보인다. 아주 옛날부터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자랐으나 서식지가 파괴되어 근세에 들어와서 숲이 새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굵고 가는 동백나무가 서로 뒤엉켜 숲을 만들고 있으며, 숲 속은 대낮에도 깜깜할 정도로 우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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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신항만 임시선착장에서 출발하는 가덕도 대항리, 외항포 행 배를 타야한다. 약 1시간만에 외항포란 종점 항구에 내린다. 등대 쪽으로 잘 정비된 시멘트도로를 200m쯤 올라가면 해병대 부대 초소가 막아선다. 동백 숲 자체가 국방부 재산이며 출입통제도 군에서 하니 부대로 들어가 찾아가는 이유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어야만 숲에 들어갈 수 있다. 부대 초소 앞으로 난 군 경계용 작은 길을 따라 동쪽으로 20분쯤 내려가면 바다 가까이까지 다 내려간 계곡에 숲이 있다.
부산 기념물 제36호, 1993.02.01 지정, 부산 강서구 (가덕도) 대항동 산13-2, GPS 좌표 : N34°59′50.0″ E128°50′20.1″
기장 죽성리 해송
기장 죽성항 두호마을 뒷산 언덕배기에는 동해바다를 바라보면서 웅장하게 자리 잡은 곰솔 한 그루가 자란다. 죽성리 입구부터 랜드마크 나무로 금방 찾아낼 수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6그루의 나무가 모여 마치 한그루의 큰 나무처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운데 작은 당집을 두고 비스듬하게 자라며 끝 부분이 땅에 닿아 자라는 나무도 있다. 굵기는 북쪽 1번 나무 260cm, 2번 나무 257cm, 3번 나무 370cm, 4번 나무 210cm, 5번 나무 260cm, 6번 나무 290cm로서 나무 하나 하나가 거의 두 아름에 이른다. 나무 높이는 20m정도이며, 가지 펼침은 동서방향 37m, 남북 24m쯤 이다.
이 곰솔의 바로 건너편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쌓은 왜성(倭城)이 있으며 왜성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에 나무가 자란다. 당시부터 나무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면 지금 나이는 거의 4백년에 이른다. 예부터 동네사람들이 음력 정월 보름에 풍어를 기원하는 풍어제를 지냈을 뿐 아니라, 서낭신을 모신 국수당이 있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장소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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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31번 도로를 타고 기장으로 올라간다. 읍에서 우회전하여 동해 쪽 죽성항으로 들어가면 아직은 한가한 어촌마을 죽성리이며 나무는 마을 뒷산에 자란다.
부산 기념물 제50호, 2001.05.16 지정, 부산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249, GPS 좌표 : N35°14′16.3″ E129°14′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