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전읍리 굴피나무
조사일자 : 2008.07.11
1. 수종명 : 굴피나무(Platycarya strobilacea Sieb. et Zucc. (일) ノブノキ (漢) 化香樹, 山樗>
2. 관리등급 및 번호 : 보호수 12-15-9-16-1
3. 소재지 : 울산시 울주군 두서면 전읍리 산 140-2
4. GPS 정보 : N35°40′00.6″, E129°10′10.9″ 고도 160m
1. 크기
수령
(년) |
수고
(m) |
근원둘레
(cm) |
흉고둘레
(cm) |
지하고
(m) |
수관폭(m)
(동-서, 남-북) |
300 |
8.0 |
380 |
360 |
3.1 |
12.0, 14.0 |
2. 수형 및 외관
전체적인 나무의 모습은 원추형의 일반 수형이나 자세히 보면 수관과 줄기의 배분균형이 맞지 않다. 두 아름에 이르는 굵은 줄기의 높이는 약 3m이고, 여기서부터 뻗어 나온 가지는 줄기에 비하여 너무 가늘다.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줄기의 반이 꺾여버리고 그 자리에서 새로운 가지가 돋아 나온 탓이다.
3. 수간 분지 상태
땅위 3m높이에서 6개의 가는 가지가 나와 수관을 형성하고 있다.
1. 주변 생육환경
전형적인 시골 마을 입구, 마을회관 앞의 공터 끝에 정자나무로 자란다. 원래 산자락이었으나 회관을 짓고 정지 작업을 하면서 나무와 회관 사이를 편평하게 만들었다. 나무의 앞쪽(동쪽)은 45° 경사로 석축을 쌓았고, 아래는 마을 진입로이며 바로 논으로 이어진다. 굴피나무 좌우로는 굵기 20~30cm의 다른 나무들이 호위하듯 펼쳐져 있다.
2. 주변 토지 이용
2000년에 건립한 마을 회관 앞마당 끝에 나무가 자란다.
3. 소유자 및 관리자
소유자 : 전읍리 양지 마을 관리자 : 전읍리 양지 마을
1. 훼손상태와 원인
약 3m위의 줄기 및 가지 부분은 오래전에 분질러져 버리고 새로 난 가지가 수관을 형성하고 있다.
2. 수간공동과 충전처리
줄기의 서쪽 부분은 폭 1m, 높이는 지하고(3m) 전체가 충전처리 되어 있다. 최근에 처리하였으므로 비교적 깨끗한 상태이다.
3. 병충해 기타
1. 석축 및 울타리
사방 40~70cm 굵기의 자연석을 사용하여 높이 1~2m정도의 석축을 약간 급경사를 이루게 쌓아 놓았다. 마을회관 앞이며 따로 울타리가 없다.
2. 복토와 답압
나무의 마을 회관 쪽 방향은 정지작업을 하면서 적어도 50cm이상 복토된 것으로 짐작된다. 정자나무이고 마을행사와 노인들의 쉼터로서 나무와 마을회관 사이는 계속해서 답압이 되고 있다. 그러나 나무의 동쪽은 경사지이면서 석축은 아래 일부만 되어 있으며 복토가 거의 되지 않았고 답압도 없다. 즉 생육공간의 1/2이상이 복토와 답압이 없으므로 생육에 크게 지장은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3. 배수상태와 토양 종류
나무의 동쪽이 경사지이므로 배수 상태가 좋고 사질양토이다. 다만 부식토가 거의 없어서 척박한 편이다.
4. 수관아래 포장 및 멀칭여부
해당 사항 없음
5. 경쟁관계 수목
굴피나무 중심으로 남서쪽에는 가슴높이 둘레 167cm의 서어나무 1그루와 굵기 10cm, 15cm의 느티나무 2그루가 자라고, 북쪽으로는 뿌리목 둘레 134cm의 벚나무 1그루가 자란다. 굴피나무를 중심으로 나무가 옆으로 줄로 자라므로 바로 옆 나무와는 수관경쟁이 있으나 생육에 영향을 미칠 만큼은 아니다.
1. 소재지 이용현황
원래는 당산목이었으나 지금은 제사가 없어지고 나무 밑에 평상을 놓아 마을 노인들의 모임방 구실을 한다.
2. 주변 문화재
남쪽 약 6km지점에 천연기념물 64호 울산 구량리 은행나무가 있다.
3.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울산IC에서 빠져나와 경주로 올라가는 42번 4차선 국도를 탄다. 약 7km쯤 왼편에 ‘두남논공단지’가 보일 즈음 좌회전하여 들어가면 바로 전읍리이고 나무는 마을 동쪽 끝에 자란다.
4. 안내정보
울산시청 052-229-3320), 두서면사무소 052-262-6400
5. 전설 및 민속행사
마을의 당산나무로서 오랫동안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올려온 나무이다. 비교적 평야가 넓은 곳이나 강이 없어 항상 가뭄을 걱정한 탓에 충분히 비가 와주기를 빌었다고 한다. 굴피나무는 이 일대에 비교적 많이 자라고 있어서 무성한 잎을 잘라 두엄을 만드는데도 쓰였으며 나무는 노간주나무 대신 소코뚜레로도 이용할 만큼 친숙한 나무이었다.
굴피나무는 먼 옛날 청동기 유적에서도 출토될 정도로 선조들과 가까이 있었던 나무이다. 울산 옥현리의 청동기 유적지, 일산 신도시 지역, 대구 칠곡 아파트 지역 등 대체로 3~4천 년 전의 유적지에서 굴피나무 존재는 확인되기 시작한다. 역사시대로 넘어와서는 전남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에서 출토된 원삼국시대 목관, 해상왕 장보고의 유적지가 있는 완도군 장도를 둘러싼 통나무 목책(木柵)에도 비자나무와 함께 섞여있다. 좀 더 후세로 와서는 1985년 완도군 약산도에서 발견된 고려 초기 화물선을 만드는 선박재의 일부로서 굴피나무는 흔적을 남기고 있다. 대체로 고려 초 이후는 굴피나무의 쓰임에 관련된 실물이나 기록을 찾을 수 없으며, 이는 남용으로 인하여 쓸 만한 굴피나무가 급격히 줄어들었거나 기후 변화에 의한 자원의 고갈일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오늘날 우리는 굴피나무가 산에서 가끔 만나는 나무일뿐이다.
이렇게 굴피나무는 역사속의 나무로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나무이지만 노거수로 남아있는 나무는 이곳 밖에 없다. 이 굴피나무는 50여 년 전 사라호 태풍으로 줄기가 분질러져 버리고 새 가지가 돋아나 수관을 형성한 탓에 외관이 다소 부자연스럽고 웅장한 맛도 좀 모자란다. 그러나 외관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먼 옛날 선조와 함께 있던 ‘역사나무’로서 유일하게 남은 이 나무를 적어도 우선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할 값어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