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판 보존의 신비
(해인사 간행 월간지"海印" 98년 6월호)
부처님의 말씀을 정성스럽게 모으고 다듬어 새겨둔 팔만대장경판은 그 방대한 규모와 완벽함에 오늘의 우리를 다시 한번 감탄하게 한다. 고려 고종 23년인 1236년부터 38년인 1251년까지 16년간에 걸쳐 완성된 후 750년이라는 긴긴 세월을 이어오는 동안 너무나 많은 시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고스란히 우리 앞에 그 성스러움을 내보이고 있다. 민족의 수난과 역사를 함께 하여온 대장경판은 멀리는 경판불사가 끝난 후 고려말기와 이조초기의 왜구침입, 조선중기의 임진왜란, 가까이는 한국동란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순간도 안심할 수 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81,258장에 이르는 경판이 단 한 장의 분실도 없이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게 된 데는 아슬아슬한 몇 번의 위기를 잘 넘겼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를 기록에서 알아보자.
첫 번째 위기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세종 5년 조를 보면(1422) 12월25일 일본의 끈질긴 대장경 하사요구에 시달린 임금은 {....대장경판은 무용지물인데, 이웃나라에서 간절히 청구하므로 이를 주어 버릴려고 하였다. 이에 대신들이 논의를 하여 임금께 말하기를,“경판은 비록 아낄 물건이 아니오나, 일본이 계속 청구하는 것을 지금 만약에 일일이 들어주었다가 뒤에 우리가 줄 수 없는 물건을 청구하는 경우가 있게 된다면, 이는 먼 앞날을 내다보지 못한 것이 됩니다.”고 하여 일본에 경판을 주는 것을 반대하였다. 임금은 신하들의 의견에 따라 대장경판을 달라는 요구에 응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는 대목이 있다. 만약에 그때 세종대왕의 말씀대로 경판을 일본에 주어 버렸더라면 오늘날 얼마나 통탄하였겠는가? 생각만 하여도 끔직하다.
같은 조선왕조실록 세종19년(1436) 4월 28일조에는 {임금이 승지들에게 이르기를, “일본국에서 매양 대장경판을 청하니, 우리 나라에서 불교를 숭상하지 아니하여, 이 판이 도성밖에 멀리 있기 때문에 억지로 청하면 반드시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지난날에 이 판을 구하기에,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전해 내려온 국보를 가벼이 남에게 줄 수 없다.’고 하였더니, 저들이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 판을 도성 근방인 회암사나 개경사 같은 곳에 옮겨 두면, 저들도 이를 듣고 우리 나라의 대대로 전하는 보배라는 뜻을 알고 스스로 청구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수송하는 폐단이 염려되니 그것을 정부에 논의하라.”하니 신하들이 대답하기를, "수송하는 데 어려움이 있사오니 감사로 하여금 감찰하고 수령이 맡아서 더럽히거나 손상시키지 못하게 하고, 수령이 갈릴 때에는 장부에 기록하여 전해서 맡게 함이 마땅하옵니다.”하므로, 그대로 따랐다.}는 대목이 있다.
만약 그때 세종대왕의 의견대로 서울 근교로 옮겨왔더라면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동란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격변기에 남아났을 리가 없다. 우리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왕이셨든 세종대왕께서는 팔만대장경판에 관한 한 잠간씩 정신이 맑지 못하였든 모양이다.
두 번째 위기는 임진왜란 때이었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에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27일에는 해인사 코앞인 성주를 점령해 버렸다. 성주에서 합천 해인사로 들어와 팔만대장경판을 약탈하는 데는 하루 이틀이면 충분한 가까운 거리이다. 일본은 조선 초기부터 우리 팔만대장경의 하사를 180여 회에 걸쳐 줄기차게 해오든 터였으니 마음만 먹으면 약탈은 식은 죽 먹기 보다 더 쉬운 일이다. 그러나 홍의장군 곽재우를 비롯하여 거창에서는 의병장 김면이, 합천에서는 정인홍이 의병을 일으켜, 왜군의 해인사 진입을 가야산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막아내었다. 한편 스님들도 가만있지 않아 서산대사의 제자인 소암대사는 승병을 모아 해인사로 접근하는 왜구들을 막아내어 지금도 왜구치(倭寇峙)라는 고개이름이 생겨있다. 성주성을 점령하여 주변의 여러 고을을 계속 노략질하고 있든 왜군은 8월과 9월, 12월의 대규모 의병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이듬해 1월에 선산 쪽으로 철수함에 따라 낙동강 서쪽 지역이 모두 수복되고 해인사의 팔만대장경도 안전할 수 있었다.
세 번째의 위기는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한국 동란 때이었다.
1950년 6월 25일 남침한 인민군은 불과 3개월도 안되어 낙동강의 동편을 제외한 전 국토가 저들의 수중에 들어가 버렸다. 그해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북쪽으로 퇴각하지 못한 인민군 천 여명이 해인사를 중심으로 게릴라 활동을 하고 있었다. 소탕작전을 벌리고 있든 국군은 미공군에 공중지원을 요청하였고 실제 지원편대의 편대장이 김영환 대령이었다. 51년 12월18일 해인사 폭격명령을 받고 출격하였으나 미군 작전당국의 명령에 불복하고 폭격하지 않았다. 김영환 대령은 서울에서 태어나 연희전문을 거쳐 일본육사를 수료했고 광복후 미군정청 총위부 정보국장대리를 역임한 전투비행사. 공군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그는 49년 공군이 독립되면서 비행단 참모장에 보임됐다. 53년 준장으로 승진한 그는 54년 3월5일 F-51기를 몰고 사천기지를 이륙, 강릉기지로 향하던 중 동해안 묵호 상공에서 실종되어 37세의 짧은 일생을 조국에 받친 참 군인이었다. 그의 쾌거를 기리는 공덕비가 해인사 일주문 앞 세계문화유산지정 기념비 옆에 세워지고 있다.
한편 최근 장지량(張志良) 전 공군 참모총장은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한국동란 당시 공군 중령이었던 장씨가 군인정신만 고집하며 상부의 명령대로 해인사를 폭격했더라면 후손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겠구나 하는 아찔함 때문이다.“51년 7월 어느 날 경남 산청 경찰서에서 해인사가 빨치산에 점령당했다는 신고가 들어왔어요. 이 사실을 보고하자 즉각 미군비행고문단의 폭격명령이 떨어지더군요. 그러나 빨치산 패잔병들이 거점확보를 위해서가 아니라 식량을 구하러 해인사에 들어왔다는 판단이 앞서더군요. 그래서 끝까지 버텼습니다.”미국고문단의 윌슨 장군이 이승만대통령에게 장씨의 명령불복종을 항의하자 이대통령도 총살이 아닌'포살(砲殺)'을 들먹이며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 그러자 김정렬 당시 공군참모총장이 방패역할을 맡고 나섰다. 장지량 장군과 함께 해인사 폭격에 맞섰던 김영환 대령의 형이기도 했던 김정렬씨는 팔만대장경을 지켜야겠다는 장씨의 뜻을 위로 전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장씨가 몰았던 전투기는 5백파운드짜리 폭탄 2개를 적재하는 F-51이어서 만약 폭격이 이뤄졌다면 팔만대장경은 순간 재로 변했을 것이 뻔하다. “불교신자도 아니고 솔직히 말해 팔만대장경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어요. 그런데도 꼭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당초 팔만대장경의 제작이 의도했던 불력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김영환 장군과 출격일자에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해인사 폭격명령을 받은 당시의 군인들이 귀중한 우리의 문화재를 지켜야 되겠다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고 생각된다.
또 해인사 스님들의 구전에 의하면 사찰을 점령하고 있든 인민군들이 철수하면서 불을 질러 태워버리고 갈 것인지 아니면 그냥 철수할 것인지를 놓고 자기들끼리의 견이 분분하여 투표로 결정하기로 하였다 한다. 개표결과 한 표 차이로 장경각을 비롯한 해인사 건물이 살아 날 수 있었다 한다.
마지막으로 화재로 인하여 소실 될 뻔한 기록들을 알아보자.
화재에 관하여는 다행히 1876년 퇴암스님이 해인사 실화적(失火蹟)에다 상세히 기술해 놓았는데 그 내용의 주요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1695년 우연히 불이 나서 동쪽의 여러 요사와 만월당 및 원음각이 타버렸고 이듬해인 1696년 봄에 또 화재가 발생하여 서쪽의 여러 요사와 무설전 등이 불탔다. 150여 년이 지난 1743년과 1763년 및 1780년에 연달아 불이 났으나 뜻 있는 이의 시주를 받아 계속 복구하였으므로 전날의 규모가 사라지지 아니하였다. 다시 40여 년이 지난 1817년에 다시 큰불이 나서 수 천여 칸의 건물이 모두 타버렸는데 관찰사 김노경이 계획을 세우고 영월, 연월 스님이 중건하였으나 전날의 규모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50여 년이 지난 1871년에 또 화재가 나 법성료가 불타버렸다.}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창건된 해인사에, 기록이 남아있는 시기부터 따져서도 불과 3백 여 년 사이에 자그마치 7차례의 화재가 있었다하니 기록에 없는 기간까지 포함한다면 장경각을 지은 후에도 수십 차례의 화재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많은 화재에 특히 불길이 가기 쉬운 산 위쪽에 위치한 장경각이 온전할 수 있었는지는 단순히 기적이라고 만 말하기에는 너무 신비하고 경외스러울 따름이다. 오직 부처님의 가호를 받았다고 밖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