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판의 보존 비밀
경판을 만든 나무란 재료의 특징에서 760년 보존의 비밀을 찾을 수 있다. 나무는 산에서 베어지는 순간 생물학적으로는 죽었지만 경판 나무로서는 수백 수천 년을 살아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나무는 끊임없이 공기 중의 수분을 서로 주고받는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무가 갖고 있는 수분관리만 잘해주면 몇 천 년은 거뜬히 버틴다. 경판을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하여 고려의 장인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하였다. 경판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부터 알아보자.
경판나무의 준비
경판에 쓸 나무는 우선 벌채하여 적어도 1년 이상 산에 그대로 둔다. 이는 나무에 걸려있는 응력(應力)을 제거하여 가공과정 중에 나무가 갈라지고 휘는 것을 막는 1차적인 조치이다. 통나무 그대로는 너무 무거워 운반이 어려우므로 산에 판자로 켜서 판자만 메고 새김장소로 내려온다. 다음은 바로 소금물에 삶은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짐작한다. 이는 벌레 먹음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두꺼운 판자는 나무를 말리는 과정에 쉽게 갈라지므로 이를 예방하기 위한 목적이다. 나무의 표면은 공기 중에 노출되면 금방 마르면서 심한 수축이 되고 판자의 가운데는 아직 수분이 빠져 나오지 못해 덜 마른 상태로 거의 수축되지 않는다. 속과 표면의 수분 차이는 나무의 갈라지는 원인이다. 소금은 흡습성이 있으므로 표면의 빨리 마름을 늦추어 주어 안팎의 수분차이를 줄여주므로 훨씬 덜 갈라진다.
다음은 햇빛이 들지 않고 통풍이 잘되는 자연 상태에 두고 적어도 2~3년을 건조시킨다. 경판은 실제 두께가 약 3cm이므로 판자로 켤 때는 5cm 전후이었을 터이다. 이런 두꺼운 판자는 지금도 대단히 조심스럽게 말리지 않으면 갈라지고 터져서 못쓰게 된다. 아마 가장 조심스럽고 힘든 일이 말리는 과정이었을 것 같다.
경판 만들기
건조가 끝나면 글자를 새길 수 있는 나무판을 만들어야 한다. 경판의 너비는 24cm이므로 이런 판자는 대체로 안으로 휘려는 성질을 갖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휨을 막아주는 일이다. 경판은 이런 휨을 막아 줄 조치로서 마구리를 양 옆에 끼워 넣었다. 휨을 물리적으로 막아주는 구실을 하는 경판의 중요한 구조다. 마구리는 인쇄할 때 경판의 취급이 편하도록 만든 손잡이인 동시에 경판을 보관할 때 다른 경판의 글자 부분과 서로 맞닿지 않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 아울러서 경판을 쌓았을 때 아래위로 공기이동을 쉽게 해주는 굴뚝 효과까지 있다.
경판꽂이의 과학
경판을 판전 안에 어떻게 쌓아두어야 가장 효과적일까? 경판이 갈라지거나 썩고 벌레 먹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다음은 주어진 공간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장수를 쌓아야 한다. 건물의 평수를 함부로 넓히는 일은 건축비도 문제지만 관리가 어렵다.
조상들은 마치 책꽂이처럼 여러 층의 선반을 만들었다. 평면으로 늘어놓기보다 당연히 많이 들어간다. 선반은 무거운 경판을 견뎌내야 하므로 튼튼함이 기본이다. 선반이 넘어지지 않도록 사각 기둥을 세우고 서로 연결했다. 경판꽂이는 판전의 가운데 한줄, 뒤 벽쪽에 한 줄로 건물의 길이방향인 동서로 길게 두 줄로 배치했다. 가운데 경판꽂이의 앞뒤로 지름 110~130cm의 통로가 있다. 벽쪽 경판꽂이는 판전 외부 기둥과 연결되어 있고, 가운데 경판꽂이는 혼자 지탱하고 있다. 한 단은 가로 너비 156~160cm, 세로 너비 160~180cm, 높이 53~55cm의 크기다. 여기에 경판의 너비 방향을 아래로 하여 세워 넣기를 했다. 아래에 한 줄을 채우고 다시 그 위에 한 줄을 더 넣어 한 단에 두 줄 겹치기로 경판을 넣어 두었다. 경판 너비가 24cm이므로 한 단에서 경판을 쌓은 위 부분의 공간은 좁은 경우 높이가 불과 5cm, 좀 넓어도 7cm 남짓하다. 한 줄에 들어 있는 경판은 적게는 34장, 많게는 44장이다. 평균적으로 한 단에는 두 줄 겹치기로 약 80장의 경판이 들어 있는 셈이다.
경판의 두께는 2.8cm이고 마구리의 두께는 4cm이다. 경판꽂이의 앞에서 보면 마구리가 전부 맞닿아 있으므로 거의 틈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마구리 두께와 경판 두께는 1.2cm의 차이가 나므로 위에서 내려다보면 경판과 경판 사이에는 지름 가로 2.4cm, 세로 60~70cm의 긴 직사각형 공간이 있다. 경판꽂이의 맨 위에서 보았을 때는 1단에서 5단까지 직사각형의 배기통이 설치되어 있는 셈이다. 대류 현상으로 판전 안의 공기가 상하로 이동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이는 판전 벽에 붙어 있는 살창로 공기의 수평 이동을 편리하게 해둔 설계와 함께 판전 안의 공기 자연 순환장치를 합리적으로 설치한 것이다.
경판 보관에 들인 정성
8만장이 넘는 경판은 아무리 잘 만들어도 보관 과정 중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다. 썩음과 벌레 먹음, 갈라짐, 휨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760년이란 긴 세월동안 관리하면서 그때그때마다 적절한 조치를 해주어 왔으므로 오늘날 우리는 ‘보존이 완벽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물론 부분적으로 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엄청난 경판의 숫자에 비하면 극히 일부이다.
경판을 만들 당시 한 번 생긴 갈라짐은 그대로 두면 경판의 길이 방향으로 계속 확대된다. 이를 막기 위해 경판을 완성한 후 보관 중에도 수시로 경판을 검사하여 대책을 세운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즉, 갈라짐이 길게 이어진 끝 부분에 칼날로 가로 흠집을 넣어 더 이상 길이로 갈라짐이 연장되는 것을 방지했다. 한 번 칼날 자국을 넣었음에도 계속 갈라지면 또다시 칼날 자국을 넣었다. 경판 한 장 한 장에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그림 갈라짐 방지를 위한 칼날 흠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