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학에 매료 '혼을 캐는 과학자들'
경향신문 1999/06/24일자 09면
과학이 역사를 만나면 안개속에 가리워진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 현대과학은 선사시대 유물의 제작연대 측정은 물론 케케묵은 고서의 내용 연구까지 가능하게 한다. 우리 나라에서 역사속의 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얼마나 될까.
최근 경북 예천에 「나일성천문관」을 개원한 나일성 명예교수(연세대 천문학과)는 고대 천문학에 심취한 인물이다. 그는 고려사의 천문지와 조선시대 승정원일기를 뒤지며 우리나라 고대 천문도와 해시계를 집중 연구했다. 나교수는 외국에서 학회가 열릴 때마다 우리 천문유물을 찾아내거나 과거 기록을 복사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는 이러한 결과들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고대천문학의 우수성을 해외에 알렸다.
올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정년퇴임한 최주박사(66.금속공학)와 95년 작고한 염영하교수(서울대 기계설계학과)는 「종 박사」로 유명하다. 최박사는 다뉴세문경에서 긁어낸 녹으로 원료산지를 추정하고 94년 전남 여수 앞바다에서 발굴된 거북선 도추가 가짜임을 밝혀내 유명해졌다. 염교수는 신라시대 종들의 모양과 설계, 종소리 등을 체계적으로 연구했으며 현재 종각에 있는 보신각종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는 주말마다 부인과 함께 전국 방방곡곡의 절에 있는 종을 찾아다녀 동료 교수들 사이에 기인으로 통했다고 한다. 서울대 정밀기계연구소 3층에는 염박사의 종기념관이 있다.
이들 학자가 자신의 전공에 심취했다면 남천우박사(67.전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는 고고학자들과 논쟁을 벌일 정도로 다양한 분야를 섭렵했다. 그는 충무공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고 살아서 은둔했을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또 거북선, 석굴암, 대왕암, 첨성대 등 다양한 유물들을 연구해 「유물의 재발견」 「긴 칼 옆에 차고 수루에 홀로 앉아」 「석불사」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소장학자들 중에서는 항공우주연구소 채연석박사가 대학시절부터 고대 로켓인 신기전연구에 몰두, 해외학술지에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복원실험에 성공했다. 또 경북대 박상진교수(임산공학과)는 10여년동안 팔만대장경의 재질연구를 하고 있으며 숭실대 배명진교수는 에밀레종의 종소리를 컴퓨터음으로 복원해 벤처기업을 차렸다.
이밖에 온돌연구가 고려대 주남철교수, 고대천문학의 충북대 이용삼교수, 물시계연구가 건국대 남문현교수 등도 관련학계에서 알아주는 인물들이다.
이은정 기자 ejung@kyunghyang.com
(한국의 불가사의)해인사 '팔만대장경'
경향신문 990409경남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사진). 나무판에 글을 새긴 대장경이 7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완벽하게 보존된 것은 신비스럽기만 하다.
팔만대장경의 비밀은 경판을 보관하는 경판전인 「장경각」의 건축법에 있다. 정부는 한때 새로운 건물을 지어 팔만대장경을 옮기려 했었다. 그러나 새 건물에서 경판의 손상조짐이 나타나자 부랴부랴 옛 건물로 다시 옮겨야 했다. 성균관대 이상해교수(건축학과)는 이에 대해 『 현대 과학기술이 조상들이 섭렵했던 자연의 원리를 따라가지 못해 빚어진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이교수는 장경각을 건축학적 관점에서 연구했다. 일단 장경각은 산자락의 골바람이 들어오는 절묘한 위치에 들어섰다. 벽면에는 위아래로 2개의 이중창이 나 있는데 앞면 창은 위가 좁고 아래가 넓으며 뒷면 창은 아래가 좁고 위가 넓다.
이는 큰 창을 통해 건조한 공기가 건물 안으로 흘러들어온 뒤 가능한 한 골고루 퍼진 다음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되어 있다. 또 판전 내부의 흙바닥에는 습기를 조절할 수 있도록 숯.횟가루.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깔아두었다. 경판이 뒤틀리지 않게 설치한 마구리에도 공기가 위아래로 통할 수 있도록 공간을 띄우는 등 세심한 배려를 했다.
경북대 박상진교수(임산공학과)는 전자현미경으로 대장경 목재를 관찰한 결과 산벚나무와 돌배나무로 구성되어 있으며 평균 수분율이 16%에 달함을 알아냈다. 이은정 기자
<팔만대장경의비밀>上.해인사板庫 온.습도 조절에 이상적
중앙일보 1995/12/7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려 팔만대장경은 7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제작과정이나 보존방법 등이 신비의 베일에 싸여있다. 해인사대장경연구소(소장 종림스님. 책임연구원 이태녕 서울대 명예교수)와 중앙일보는 지난해부터 1년여에 걸쳐 대장경에 대해 학술조사를 실시했다.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계기로 팔만대장경 보존의 비밀, 보존현황, 영구보존대책 등을 상.중.하로 나눠 밝힌다.
[편집자註] 이번 조사에서 경판을 새긴 나무의 종류로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 전체의 83%나 차지한 것으로 처음 밝혀졌다. 또 사용된 나무의 종류도 10가지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 동안에는 정확한 조사 없이 막연히 자작나무나 후박나무일 것으로 추정했으나 X선 촬영등 기법을 동원, 조직검사 등의 조사를 한 결과경판의 수종(樹種)이▶산벚나무▶돌배나무▶단풍나무▶자작나무▶박달나무▶후박나무▶층층나무▶소나무▶잣나무 등 10종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表). 그러나 이중에는 단풍나무 와 조직이 비슷한 고로쇠나무나 후박나무와 비슷한 녹나무도 있을 가능성이 있어 현재 진행중인 심층분석결과가 나오면 나무의 종류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수종조사결과 경판의 주종은 산벚나무(70%)와 돌배나무(13%)였으며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정반대로 자작나무의 경우 극히 적은 양(1%)이 경판 마구리용으로만 쓰였다. 또 대부분의 나무들이 우리 나라 전역에 골고루 잘 자라는 종류인데 반해 남해안지방에만 분포하는 후박나무가 적으나마 포함된 것은 강화도 이외의 판각장소로 알려진 남해분사(南海分司)의 실존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주목된다.
***하루 5수량의 습도조절 습도는 특히 목재문화재 보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지금까지는 팔만대장경 판고(板庫)가 있는 해인사지역이 비교적 습기가 적은 지역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번 조사결과 오히려 습도가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表). 목판의 경우 적정한 습도는 최소 60~70%이상으로 너무 높으면 썩기 쉽고 너무 낮아도 뒤틀리는 특성이 있어 적정치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하는데 해인사 주변의 습도는 연중 인근지역에 비해 6~10%가량
높다는 것. 그럼에도 경판이 온전히 보존돼 온 것은 해발 645에 있는 판고가 지역적 특성상 3개의 계곡이 만나는 지점으로부터 1㎞쯤 북쪽에 위치, 바람이 항상 불어 자연적인 습도조절이 이뤄지기 때문인 것으로 조사됐다. 또 판고의 시설자체가 기막히게 조절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경판은 5단으로 된 판가 각 단에 빼곡이 세워져 있는데 이 때문에 밑에서부터 맨 위까지 경판사이 틈을 통해 바람이 지나면서 골고루 습도를 조절해준다는 것이다. 이번 조사에서는 특히 흔히 동원되는 판고 안 공간의 습도를 재는 방법 대신 감지력이 센 습도계를 이용, 경판표면의 습도까지 쟀는데 이 결과 경판 한 장당 하루에 최고 60톤 까지 습도량의 차이가 나는 것으로 드러났다. 다시 말해 판고 전체에 하루 5톤 가량의 물이 경판에 뿌려졌다가 마르는 효과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작용은 특히 한 여름철 수분증발 때 열을 빼앗는
온도조절기능까지 해 곰팡이나 썩음 균등의 서식을 막아주는 역할도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실제로 판고 전체의 온도를 잰 결과 1. 5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아 최신 건축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비결이라는 것이 조사팀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이 같은 온. 습도 조절에는 판고 지붕의 기와도 한몫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는데, 이는 구운 기와(燔瓦)만이 가지는 보습기능 때문으로 지난여름 누수 때 일반기와를 이용해 지붕을 수리하려던 것이 오히려 무모한 정성(?)임이 입증된 셈이다.
***특수비방의 옻칠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의 표면에 옻칠을 했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칠기법이나 사용재료에 대한 과학적 조사가 이뤄진 것은 이번이 처음. 일반적으로 글자를 새기고 교정작업을 마친 목각판은 표면에 먹물을 칠하거나 콩의 전즙과 송연으로 처리한 뒤 판가에 보관하는 것이 보통인데 대장경판의 경우 보존. 치장을 위해 특별히 옻칠을 했으며 이같이 방대한 분량의 목각판에 옻칠한 것은 세계적으로 팔만대장경이 유일무이(有一無二). 옻칠을 한 방법은 목각판 표면에 진한 먹을 발라 바탕인 소지(素地:白骨이라고도 함)를 염색한 뒤 그 위에 다시 안료가 섞이지 않은 생칠(여과와 탈수등 초보적인 정제를 한 생옻)을 2~3차례 한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일반적인 목기와 는 달리 칠공정의 일부가 생략됐는데 이것은 칠재료의 절약과 일손을 덜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경판의 특성상 칠막이 지나치게 두꺼울 경우 양각된 글자의 윤곽이 무디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한
배려 때문으로 분석됐다. 옻칠이 벗겨진 마구리 등이 다른 부분보다 훼손이 심한 것으로 드러나 옻칠 자체가 경판보존에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사결과 칠의 두께는 대부분 55~65㎛가량으로 균일한 편이며 칠면을 깎아내기 위해 숯을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먹으로 밑칠을 한 것은 소지의 염색과 함께 경판표면의 결을 메워 표면을 매끄럽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
***더 풀린 궁금증들
지금까지 경판보존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던 경을 찍어내는 인경(印經)작업이 사실은 작업과정에서 사용되는 풀의 전분성분 때문에 오히려 해를 끼치는 것으로 밝혀진 반면 소금물 세척은 천연소금의 보습효과 때문에 보존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분석됐다. 또 경판의 마구리를 싸고 있는 쇠붙이의 대부분이 순도 99.6%의 구리인 것으로 밝혀져 전기분해기술이 없던 당시로서는 거의 신비에 가까운 야금기술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를 찾아서 (3)- 팔만대장경
경향신문.1997. 1. 17. 金
-佛力에 기원한 나라의 평안-
-몽고침입 막으려는 고려인소망-
해인사 팔만대장경. 13세기 전반 원나라가 대제국을 이루어갈 때 몽고군의 함성과 말발굽 아래에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은 태어났다.
몽고군은 1231년부터 1258년까지 7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했다. 기마민족인 몽고족은 수전(水戰)에 약했다. 고려는 1232년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끈질기고도 필사적인 대몽항쟁을 전개했다. 그리고 불력(佛力)에 힘입어전쟁의 참혹함에서 벗어나고 나라의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을 팔만대장경에 담았다.
-현존 목판대장경중 最古-
고려때의 유명한 문신 이규보는 1237년 대장경판을 새기면서 불력에 기원하는 군신기고문(君臣祈告文)을 썼다. 그 글은 「국왕과 태자 공후백과 문무백관들은 목욕재계하고 분향하며 고합니다. 몽고의 잔인하고 흉포한 것은 말로 형언할 수 없으며 어둠을 다 모은 것 같습니다. 제불보살(諸佛菩薩)은 이 간절한 기원을 들으사 신통의 힘으로 몽고군이 멀리 달아나 다시는 이 강토를 짓밟지 못하게 하시고 나라 안팎이 평안하기를 기원합니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고려는 고종 23년(1236) 대장도감 설치를 시작으로 고종 38년(1251)까지 16년동안 모두 판수 8만1천2백58개에 달하는 팔만대장경을 완성했다. 대승·소승경전 등 불경들을 망라한 규모로 전부 639함, 1,514부, 6,805권이었다.
해인사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 종림스님은 『팔만대장경은 현존하는 목판대장경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인 삼장을 집대성하고 내용이 정확하여 세계 불교학 연구의 텍스트로 활용되는 전인류의 정신적 보물』이라고 설명했다.
경남 합천 가야산 기슭에 자리잡은 천년고찰 해인사. 팔만대장경이 봉안된 법보(法寶)사찰이다. 일주문을 지난후 해탈문을 거쳐 대적광전을 통하면서 모두 108개 계단을 밟으면 팔만대장경판이 봉안된 수다라장(脩多羅藏)과법보전에 도달한다.
팔만대장경은 국보 제52호 대장경판전인 수다라장과 법보전에 나뉘어 봉안돼 있다. 이 두 건물은 모두 전면 15간, 측면 2간 규모로 아무런 첨단 보호장치도 없이 거의 자연상태에서 일정한 온도·습도를 유지하며 경판들을 600여년 동안 과학적이고도 완벽하게 보존해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부인사 초판 몽고군이 불살라-
경판들은 가로 70㎝, 세로 25㎝ 정도의 크기로 양면에 23행 14자씩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판면에는 옻칠을 했고 양끝에 마구리를 대서 판목의 뒤틀림을 방지하고 있다. 이들 경판은 강화성 남쪽 해안가에 설치된 간경도감과 진주 부근 분사에서 판각된 것들이다. 판각용 나무로 자작나무를 비롯, 벚나무 후박나무 등이 사용됐다. 제주도 완도 거제도 등에서 베어 안전한 뱃길로 운송되어온 목재들은 오랫동안 바닷물에 넣어 부패를 방지하고 충분히 말린후 경판에 한자 한자 정성들여 경문을 새겼다.
경판들은 강화도 선원사에 보존되다가 조선 태조 6년(1398) 서울 서대문밖 지천사로 옮겨진후 다시 심심산골인 해인사로 이운됐다. 대장경 이운장면은 태조실록에 「2,000인으로 하여금 경판을 지천사로 옮기게 하고 행향(行香)하며 오교양종의 승도가 경을 외우며 의장을 갖추어 북을 치고 법라를불며 선두에 섰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대장경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가득담긴 엄숙한 행사였다.
-화재잦아 24시간 경비-
대장경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것이다. 가르침의 근간이 되는 경(經), 제자들이 지켜야할 윤리와 규범을 말한 율(律), 경과 율에대한 학자들의 논의를 담은 논(論) 등 삼장(三藏)의 결집을 말한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후 인도에서 결집된 불경들은 중국으로 건너와 한자로 번역됐다. 북송때인 983년에 처음 목판으로 불경들을 망라한 북송관판대장경이 완성됐다. 고려에서는 현종때인 1011∼1029년쯤에 초판 대장경이 판각되었으나 몽고군이 대구 부인사에 봉안돼 있던
이 대장경을 불살라버렸다.
팔만대장경이 봉안된 해인사는 역사적으로 화재가 자주 발생했다. 그러나 대장경 판전은 한번도 피해를 입지 않아 불자들은 신기하고 영험한 일로여기고 있다. 팔만대장경과 관련해 해인사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역시 화재이다. 이를위해 24시간 판전을 비롯한 사찰 경내를 경비하고 있다.
해인사 진화스님은 『팔만대장경의 보존과 보호는 세계의 정신적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이다. 그러나 관광객들이 몰려 먼지가 판전안에 스며들고 있고 인근의 합천댐으로 환경변화가
염려된다. 여기에 골프장까지 건설되면 가야산 주변의 생태계 변화 등 많은 문제점들이 노출될 것 같다』고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이연재기자>
[우리 문화유산 기행-17] 해인사와 팔만대장경-
조선일보 97.05.12
5천여 만자 15년 대불사…조선의 보관술도 신비 .
한국적 자연의 아름다움, 그 원형이 무엇인지, 그러한 것이 아직도 실재하는지 의문을 품는 사람들. 한 민족의 문화적 역량, 그 문화 창조의 저력 이 무엇인지, 그러한 것이 정말로 실재하는 것인지 의문을 품는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은 가야산의 해인사를 찾아가 보고, 그곳에서 팔만대장경판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산, 산, 산…. 산악국가 한국. 그 만고강산의 잘생긴 산용과 기암절벽. 그 기암절벽에 어우러져 때로는 그를 드러내고 때로는 그를 덮고 있는 육송, 적송, 노송. 한국의 춤사위처럼 능청스럽게 팔을 펴는 노송 들의 가지 뻗음, 거무튀튀한 상록의 송림에는 다시 그 사이를 수놓고 있는 5월 활엽수의 싱싱한 신록의 줄무늬…. 산이 깊으면 골짜기도 깊어지고, 골짜기 가 깊으면 물도 맑아지는 계천…. 그리고 그 위를 덮 고 있는 때묻지 않은 푸른 하늘….
지금은 거의 볼 수 없게 된 이러한 한국적 자연의 본래적인 아름다움 이 해인사를 찾아가는 가야산의 품안에는 그대로 간직돼 있어 예나 지금 이나 찾아오는 손들을 맞아준다.
부처의 가르침인 불교의 교리를 집대성한 불전을 법보라 한다. 해인사는 그러한 법보의 종찰이다. 재조 고려대장경(속칭 팔만대장경, 국보 32 호)의 원판을 해인사의 장경판전(국보 52호)이 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장경'이란 무엇인가. '세 개의 광주리'란 뜻의 산스크리트어 '트리피타카'를 번역한 삼장경 또는 '일체경'이라고도 일컫고 있는 대장경은 부처가 직접 설법한 것으로 알려진 '경'과 '율'은 물론이고 그에 대한 주 석인 '논' 등 일체를 집합한 총서이다. '삼장경'은 옛날 인도에서 불전을 나뭇잎에 새겨 '패엽경'이라 불렀는데, 그것을 경장 율장 논장으로 분류하여 세 광주리에 나눠 보관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전이 전화나 재해 등으로 상실되는 경우가 잦고 보니 일찍부터 이를 돌이나 나무에 새겨 영구 보존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대장경의 조조가 착수되었다. 중국 송나라의 '촉판 대장경'을 필 두로 그뒤 동양에서는 20여종의 '대장경'이 만들어졌다. 해인사가 보관하고 있는 '고려대장경' 은 그 가운데서도 질에 있어서나 양에 있어서나 단연 으뜸가는 것으로 세계는 알고 있다.
우선 고려대장경 조조의 배경과 동기부터 심상치가 않다. 서기 1011년 고려의 현종때 만주의 거란병이 서울 송악성까지 쳐들어오자 왕은 남쪽으로 피난가서 적병을 불법의 가피력(부처나 보살이 사람들에게 주는 힘)으로 퇴치하려는 신앙으로 대장경 판각을 발원하였다. 그러자 거란병은 제발로 물러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때 조조한 것이 18년에 걸쳐 완성한 이른바 '초조 고려대장경'이다. 그것은 송의 촉판대장경에 이어 사상 두 번째의 것이다. 그러나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했던 초조대장경은 고종 19년(1232년) 몽골병이 쳐들어오면서 불을 질러 소실되고 말았다.
'재조 고려대장경'이라고도 일컫고 있는 현존하는 해인사의 대장경 또 한 몽골병의 침략을 불력에 의해서 퇴치하려는 발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로 파천한 임시 수도에서 1236년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이듬해부터 판각에 착수한 재조대장경은 1251년에 15년 동안의 대 불 사를 완성시켰다. 당시 경판의 총수가 8만1천1백37판이 재조대장경은 조 선조에 들어와 강화도의 선원사에서 지천사
로 옮겼다가 그 막대한 양 의 경판을 다시 영남의 해인사로 운반 봉안하게 된 것이 아마도 태조 7년 (1398년). 내년은 그 6백 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현재 해인사에 있는 경판은 1천5백16종에 총 8만1 천2백58판(이 안에는 후대에 판각된 15종의 문헌이 포함되어 있다). 8만여 판에 8만4천 번뇌에 해당하는 법문이 실려있다 해서 흔히 '팔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경판의 목재는 자작나무다. 제주도, 거제도, 울릉도 등지에서 생산되는 자작나무를 벌채해서 3년 동안 바닷물에 담갔다가 꺼내어 조각을 낸다. 그 조각을 다시 소금물에 삶은 뒤, 그늘에서 말려 대패질을 하고 나서 경문을 한 자 한 자 새겨 판각을 마친 뒤에는 경판 양쪽 끝에 경판보다는 약간 높고 약간 두꺼운 각목으로 마구리를 만들어 그 네 귀퉁이에 구리판의 장식을 붙인다. 이 동제 장식의 마구리는 경판의 뒤틀림이나 터짐을 방지 할 뿐만 아니라 판가에 경판을 찍찍하게 꽂아 두어도 마구리가 두껍기 때문에 경판끼리 서로 부딪치는 것을 막고 통풍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것도 부족해서 8만여 판의 경판마다 에는 다시 옻칠을 해서 부식을 방지하도록 대비해 두고 있다. 스트라디바리우스나 슈타인웨이 등 유럽의 명품 악기를 만들어 내는 장인들처럼 꼼꼼함과 정성과 그리고 '시간'을 쏟아 부었던 것들이다.
대충 세로 30센티에 가로 70센티의 경판에는 평균 14자씩 23행의 경문이 새겨져 있다. 게다가 경판은 1 면만이 아니라 앞뒷면에 판각이 되어 있기 때문에 팔만대장경에 세긴 글자 수는 줄잡아 16만3천 쪽에 5 천3백만자(!). 천자도 아니요 만자도 아닌 5천3백만 자를 마치 한 사람의 글씨인 듯 처음부터 똑같은 필체의 정자로, 그것도 붓글씨가 아니라 칼로 나무판에 새겨 놓은 것이 팔만대장경이다. 더욱이 해인사의
재조대장경은 지금은 소실된 송의 '촉판대장경'이나 '거란판대장경'의 내용을 아는데도 중요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른 어떤 대장경에도 수록되지 않은, 중요한 12종의 대승경론이 포함되어 있어 한층 그 가치를 드높이고 있다.
특히 우리들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것은 외국군 침략 하의 한계 상황 속에서 임시수도로 피난 중에 착수한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대장경판의 편찬과 판각에 있어서는 한자의 오자도 탈자도 내지 않기 위해 여러 차례의 교열을 거쳐 완벽을 기했다는 사실이다. 기막히게 훌륭한 유물을 발굴하면 우선 중국서 건너 온 것이 아니냐고 지레 짐작해 보고, 좋은 것은 덮 어놓고 '외제'라 믿고 있는 오늘날의 한심스런 문화적 열등의식의 만연에 상도 한다면 그러한 '세기말병 '의 치유를 위해서도 해인사 순례를 통해 '적당주의나 '대강대강주의'가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전통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오직 현 대한민국의 당대 병임을 깨닫는 것은 약이 될 것이다.
그러나 팔만대장경의 경판은 해인사가 자랑하는 국보의 한쪽밖에 되지 않는다. 또 다른 자랑, 또 다른 국보는 그러한 대장경판을 여러 백년의 세월과 전란 많던 역사를 뚫고 보존케한, 기술과 정성의 집결체인 '장경판전' 이다.
대장경이 고려조 문화의 한 금자탑이라면 장경판전은 조선조 문화의 한 금자탑이다.
수다라장과 법보전의 앞 뒤 두 채로 이뤄진 장경판전은 각각 앞면 15간, 옆면 2간으로 도합 60간이다. 경판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선 적당한 환기와 온도로 부식을 방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를 위해 장경판전에는 건물의 외벽에 붙박이 살창을 마련해 두었는데 벽면의 아래와 위의 살창, 그리고 건물의 앞면과 뒷면의 살창 크기를 서로 달리해 엇갈리게 함으로써 공기가 실내에 들어가서 아래위로 돌아나가도록 계
획한 절묘한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건물의 바닥도 맨 흙바닥으로 두고 천장도 반자가 없이 지붕 구조가 드러나 보이도록 해서 습기가 바닥과 지붕 밑에서 조정이 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그건 어떻든 사시사철 창문이 개방된 장경판전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 백년 동안 날짐승이 침범하지 못하고 쥐새끼도 들락거리지 않을 뿐만아니라 천장에 거미줄이 쳐진 일조차 없었다고 한다. '선험적 직관에 의한 과학적 합리성'의 소산이라고
불교연구원의 '해인사'편 에선 설명하고 있지만 오늘의 우리가 고려조-조선조의 선대에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기 위해선 장경판전의 비밀을 현대과학으로 풀이 해 놓아야 될 것이다.
팔만대장경의 '신비스러운 영험'은 또 있다. 장경판전을 세운 이후 해인사에는 전후 일곱 차례의 화재가 일어나 모든 당우를 태워 버렸으나 장경판전만은 온존하게 보존되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노략질로 부터도 무사할 수 있었다.
불력의 가피, 가야산의 지리, 대장경을 판각한 사람들의 지성. 삼재가 하나된 은덕의 기적이라고나 할 것인가….
<최정호·연세대교수>.
팔만대장경 전산화 추진 종림 스님
서울신문 970928 11면(문화) 기획 836자
◎“2000년까지 통합대장경 완성”/자연보존 한계… 디지털로 영상화
“팔만대장경은 우리 민족이 남긴 세계의 문화유산이며 미래로 향한 우리 정신문화의 비전이기도 합니다.금세기가 가기 전에 전산화를 완성해서 디지털 팔만대장경으로 재탄생시켜야 합니다”
고려대장경 연구소장 종림 스님은 28일 부산 사직공원에서 열리는 21세기 디지털팔만대장경 불사를 위한 법회를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지난 93년 3월 발족된 고려대장경연구소는 94년 10월부터 대장경의 컴퓨터 입력작업을 추진,2년간에 걸쳐 5천2백80여만장의 이르는 본문을 모두 입력했다.그러나 앞으로 전산작업은 교정과 표점작업·검색프로그램 개발 등 앞으로도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실정이다.
“현재 해인사 장경각에 보관되어 있는 대장경은 1251년에 완성되어 강화도에서 서울의 지천사를 거쳐 1398년에 해인사로 옮겨온 것입니다.경판의 자연상태 보존이 한계에 이르러 현대과학의 힘을 빌려 영구보존의 한 방법으로 영상화 작업을 추진하게 됐습니다”
종림스님은 문화재로 잠자고 있는 대장경을 학생들이 컴퓨터로 불러 공부방에서 볼 수 있도록 하며 인터넷으로 옮겨 전세계 불교인들이 모두 읽을수 있게 하는 작업이야말로 우리 문화유산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2천년까지 고려대장경과 한글대장경을 함께 검색할 수 있는 통합대장경을 완성할 계획입니다.통합대장경이 완성된다면 일본어 중국어 범어 팔리어 티베트어 등으로 된 전세계의 불교경전들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종림스님은 해인사의 보물이자 국가의 보물인 대장경이 세계 불교도의 보물이자 인류의 보물로 탈바꿈하고 있다고 말했다.<김원홍 기자>
팔만대장경 남북 공동번역 추진 배경
중앙일보 970922 03면(종합) 기획 1180자
◎민족문화유산 교류 물꼬 전산화 작업도 협력 기대
팔만대장경 한글 번역작업의 남북 공동추진은 7백년 역사를 지닌 경판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다.
더구나 민족 문화유산을 통일세대에 물려주기 위한 노력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끌만하다.
21세기 정보화시대의 팔만대장경이라 부를 수 있는 ‘팔만대장경 CD롬’ 제작에 남북이 함께 힘을 쏟을 수 있다면 학술·문화 부문과 첨단기술의 교류·협력에도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팔만대장경의 한글 번역과 전산화는 불교연구뿐 아니라 민족사상의 체계를 정립하고 역사연구를 한차원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그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특히팔만대장경은 중국의 ‘송판대장경’이나 일본의 ‘신수대장경’보다 뛰어나 동양 3국의 불교전을 대표하는 대장경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그러나 워낙 방대한 분량이어서 단순 교정작업에만 5백명이 2년간 매달려야 하는등 예산과 전문인력이 걸림돌이라고 우리 학계는 지적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북측은 나름대로 사회주의 체제의 특성을 활용,연구인력을 총동원해 상당 부분 작업을 마치고 ‘팔만대장경 해제’ 전16권을 발간한 상태다.
일본과 대만도 이미 자신들의 장경을 먼저 세계에 알리기 위해 국가차원에서 작업을 서둘러왔다.그 동안 우리측은 북한의 장경 번역이 지나치게 대중성에 치우친
나머지 학문적 접근에 소홀했다고 평가해왔다. 우리측은 전산화와 번역작업을 동시에 추진, 한자 코드번역과 데이터 베이스 작업에는 앞서갔다.바로 이때 이뤄진 북한의 제의는 쉽게 말해 남측의 첨단기술과 자본을 공동 활용하자는 것이다. 우리로서도 북한측 번역 작업이 일정수준 성과가 있다고 보고 공동작업을 추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실제로 자체 연구인력에다 김일성종합대·김형직사범대·외국문출판사의 학자·번역가들로 방대한 작업을 벌여온 북한 사회과학원은 최근 경제난으로 인해 연구결과물을 출판하거나 전산화할 엄두를 내지 못해 먼지가 쌓여가고 있다.
남북한 언어와 문화가 이질화돼 같은 경전의 해석에도 상당한 차이가 나타남에 따라 제각각 작업을 끝내면 통일 이후 막대한 자본과 인력을 투입해 역사를 다시 벌여야 하는 문제도 나타날 수 있다.한 관계자는 “특히 북한의 표점(한자 장경을 이해하기 쉽게 구분한 기호) 체계등은 우리 장경 번역작업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라고 말했다.<이영종 기자>
김수철 「대장경 음반」 구상/팔만대장경 대중화에 나서
동아일보 970725 15면(문화) 기획 649자
「장경아 장경아 대장경아…」.
팔만대장경을 가요로 노래하겠다는 김수철의 구상이다.가수 겸 작곡가인 그는 세계문화유산인 해인사 팔만대장경의「대중화」에 나섰다. 부처의 법문을 로큰롤과 록, 메탈 등으로 대중 앞에 세우는 것.이 작업은 해인사 고려대장경 연구소(소장 종림)가 추진하고 있는 대장경 전산화 및 장경판전 건립 6백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 고려대장경 연구소는 특히 김수철을 대장경 주제음반 공식 작곡가로 선정, 4장의 CD 작업을 의뢰했다.
「대장경 가요음반」은 이 4장 중 하나다. 김수철은 『대장경의 정신과 대중의 어울림을 한국의 소리로 표현할 것』이라며 『10여년간 국악과 양악의 접목을 시도해온 나로서는 행운』이라고 말했다. 또 한국의 세계적 문화유산을 외국에 제대로 알린다는 취지에서 종교적 색채는 가급적 배제할 것이라고. 김수철은 「대장경 가요음반」에 10여곡을 수록할 예정. 특히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댄스 장르도 한곡 정도 구상중이며 록과 레게, 헤비메탈 등으로 꾸민다.김수철의 대장경 주제 음반은 「대장경 가요음반」을 비롯해 대장경의 역사를 소리로 표현한 1집, 청소년을 위한 연주음반과
외국인을 겨냥한 한국의 소리를 담은 연주음반 등이다. 내년 봄에 첫선을 보인다.〈허엽 기자〉
장경 디지털화 과거미래 잇는 징검다리/소흥렬(특별기고)
중앙일보 970627 16면 칼럼 1975자
◎8만 마은 하나로 묶어 새시대 선언/전산화 지휘 종림스님 유산 지킴이
“왜 팔만대장경인가?”
“8만의 마음들이 모여서 한마음이 된다는 뜻이겠지!”
심리철학 전공 대학원 제자들의 대화였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제각기 8만 마음들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중요하지만8만 마음들이 모여 하나의 마음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붓다의 마음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한 것이 팔만대장경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조각 조각의 정보를 모아 하나의 전체구조를 만듦으로써 그 내용을 이해하게 된다.부분 부분으로 아는 것은 전체를 이해하는 것과 다르다.공간적 전체구조만이 아니라 시간적 전후관계,즉 역사적 과정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도 이해를 위한 필수조건이다.
마음의 능력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세계와 앞으로 살아갈 세계를 시간적으로 또는 공간적으로 모의해 볼 수 있게 한다.끊임없이 정보의 연결망을 새롭게 만들고 넓혀감으로써 모의의 능력을 향상시켜가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다.이런 마음의 능력에 있어 붓다의 마음은 가장 훌륭한 마음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이 없다.팔만대장경이 그것을 입증해주고 있지만 8만가지 마음들로 묘사된 붓다의 마음이라고 한들 언어적 표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으므로 붓다 자신의 마음에 견줄 수는 없는 것이다.하지만 직접 붓다의 마음을 체험할 수 없는 우리에게는 팔만대장경이 그의 마음에 이르기 위한 최선의 방편이다.8만 마음들로써도 충분히 표현될 수 없는 붓다의 깊고 넓은 마음에 이르고자 하는 수행의 길은 우선 팔만대장경의 마음들을 거쳐 갈 수밖에 없다.
종교적 경전이나 문학·철학·과학·예술에서의 고전적 작품들이 문화유산으로 보존되는 것은 그 모든 것에 하나같이 위대한 인간의 마음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이들 문화유산은 우리 인간의 마음이 다른 동물의 마음과는 특이하게 다른 진화의 산물임을 입증해 준다.정보이론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정보를 발신하고 수신하는 정보교환의 매체를 사용하는데 있어 다른 동물보다 우수하게 진화한 것이다.말의 정교함이라든지 특히 문자를 사용함으로써 정보를 기록해 둘 수 있는 정보저장의 수단에서 새로운 단계로 비약적 발전을 하게 된 것이다.우리 인간처럼 도서관을 더 크게 만들어가고 박물관을 계속 넓혀가는 동물은 없다. 인간의 이러한 정보교환능력과 정보저장능력을 또한번 새롭게 해준 것이 컴퓨터의 등장이다.많은 정보를 디지털화할 수 있다는것,그런 정보를 계산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것,따라서 발신과 수신 및 저장방법도 다양화되고 용이하게 되었다는 것은 ‘정보혁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인터넷을 비롯한 온갖 정보기술의 개발은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새로운 마음의 세계를 가능하게 했다.8만 마음들이 한마음으로 정보기능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시공간의 세계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다원화되고 개별화되고 파편화되는 변화 속에서 그런 조각 조각들을 연결시켜 줄 수 있는 정보기술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우연한 것으로만 볼 수 없다.다원화 추세 속에서 전체적인 조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전산화된 정보기술이 등장했다고 봐야 한다.8만의 마음들이 모여 하나의 마음으로 기능해야 하는 역사적 필요성이 정보기술의 혁명을 수반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15년전께라고 생각되는데 내가 처음 종림스님을 만났을 때 ‘ 컴퓨터를 만지는 스님’이라는 소개를 받고“큰 일을 저지를 스님 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얼마전 팔만대장경의 전산화 작업을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그러면 그렇지!”라고 했다. 그 옛날 팔만대장경을 목판에 새겨두고자 결심했던 마음이나 오늘날 그것을 전산화하겠다고 나선 마음은 다같은 마음이다.8만의 마음들이 한 마음이 되게 하는 역사의 부름에 겸허하게 응답하는 불심이다.모든 마음들이 불성으로 하나되게 하는 역사적 과업에 동참하는 마음이다.오늘의 이 역사에 동참하는 8만의 마음들이 한마음을 이루게 될 때 인류역사는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이대 철학과 교수>
'팔만대장경에 새 생명을’ 캠페인/심재룡 서울대 교수 특별기고
중앙일보 970511 23면(문화) 칼럼 1652자
◎문화유산 전산화는 시대적 요청
대장경의 전산화는 시대적 요청이다.21세기는 정보화시대요,국제화시대다.해인사가 보관하고 있는 세계의 문화유산인 팔만여장의 목판본 대장경은 불교정보의 총집합으로서 한국문화의 세계성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산 증거다.
이제 우리 시대에 맡겨진 대장경 전산화는 저 불교정보의 총집합을 전세계에 선양하고,한국문화의 촌티를 벗겨내 국제화의 선봉에 서는 첩경이라 할 수 있다.정보화시대의 역사적 도래를 필연으로 인식하고 그에 충실하려는 인사는 모두 대장경의 전산화를 신속 정확하게 실현해야 한다는 시대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
국제적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우리의 문화를 개방해 민주화시대를 앞당겨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데 불교문화의 보급이 필요하다.한갓 불교문화 유산의 보전차원을 넘어 정보화시대를 선도할 팔만대장경의 전산화 불사는 시대의 요청이다.
우리 문화의 특성을 국제경쟁력에 연결시키는 방안을 마련하는데 대장경만큼 훌륭한 소재가 또 있을까.국제적인 것은 전통적인 것이다.문화의 전통을 상실한 소위 국제표준규격의 문화란 이 세상에 발을 붙일 수 없다.다행히 우리는 5천년의 역사와 전통을 담지한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다.일제의 악랄한 한민족 전통문화 말살정책도 이를 없애지 못했고,계급투쟁의 역사의식으로 민족혼을 지워버리려는 북한의 체제도 한국문화의 동질성만은 바꾸지 못할 것이다.상업화된 일본불교,정치도구로 전락한 중국불교에 비해 한국불교는 문화유산의 보존과 환경 친화적 수행방법등으로 국제화시대의 전통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그 상징적 불사가 곧 대장경의 전산화다.
문화에 대한 모든 정보는 일부에게만 공개될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이를 필요로 하는 모두에게 접근이 가능해야 한다.정보화가 민주화를 촉진하는 촉매역할을 하는 까닭은 누구나 정보에 접근하는 기회균등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보를 대다수 대중에게 전달하려면 일부 안락의자를 돌리는 학자나 전문가에게 독점돼온 지식과 정보를 모든 중생들에게 골고루 어느 때나 똑같이 균분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산사에 깊이 파묻힌 팔만대장경은 전산화해 중생에게 되돌려줘야 한다.전자대장경은 세계화·민주화·정보화시대를 선도할 수 있다.
국제경쟁력,그중에도 문화경쟁력을 논하면 주눅이 들었던 한국문화에 활력을 불어넣는 일은 문화유산의 정보화·전산화다.박물관의 유산이 아니라 살아 숨쉬며 활용되는 전자대장경이야말로 정보화의 밑거름이다.팔만대장경의 전산화는 한국 출판문화의 우수성과
그 보존에 기울인 과학기술의 탁월성을 다시 한번 세계 만방에 알리는 절호의 기회다.
대장경을 전산화함으로써 우리가 차지할 문화경쟁력의 비교우위는 이미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도쿠가와 막부는 귀찮으리만큼 팔만대장경의 복사본을 요청하다 못해 엉뚱하게도 일본으로 이전할 흉계를 꾸미다 이를 성사치 못하고 급기야 이를 저본으로 하여 대정연간에 활자판 신수대장경을 만들어 종이에 찍어 1백권의 책으로 출판,현재 전세계 불교학의 정본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제 그 책의 원본인 팔만대장경이 전산화됨으로써 우리는 일본에 빼앗겼던 대장경 정본의 위치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몽고의 침략속에서도 고려청자와 고려대장경을 창출한 문화민족의 후예답게 우리는 또 한번 팔만대장경의 전산화 정본을 계기로 한국의 문화창조에 앞장설 수 있을 것이다.〈철학〉
해인사/팔만대장경판전(천년건축:29)
동아일보 961226 15면 기획 2955자
◎「500년 풍상」 이겨온 「통풍신비」/앞뒤벽에 서로 다른 크기 붙박이살창/바람 들어와 한바퀴 돌아나가게 만들어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인 경남 합천 해인사. 법보종찰로도 유명하지만 우리 정신문화의 정수인 팔만대장경(국보 제32호)이 자리한 곳이다. 팔만대장경을 완벽하게 보존해오고 있는 해인사의 목조건축물 팔만대장경판전(국보 제52호)이야말로 「자연과의 합일로 자연을 극복」하는 우리 전통 건축의 「신비」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표적 「천년건축물」이다.
통일 신라 애장왕 때인 802년에 창건된 해인사는 조선 태조 때인 1399년 강화도에 보관중이던 대장경을 옮겨와 지금까지 보관해오고 있다. 조선 성종때인 1481년 이후 해인사는 지금의 규모를 갖추었으며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현재의 경판전은 1488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해인사로 가려면 우선 오르막길을 지나야 한다. 일주문에서 봉황문 해탈문까지의 조금씩 상승하는 길은 사람에게 긴장감과 탈속의 분위기를 제공한다. 그 긴장감은 해탈문에서 절정에 달하고 구광루 밑을 통과해 대적광전 앞의 넓은 마당에 이르면 상승 공간은 없어지고 평정을 되찾는다. 이러한 역동적인 공간 배치는 해인사 가람배치의 특징이면서 깨달음의 과정과도 통하는 것이다.
해인사는 밖에서 보면 폐쇄적인 공간이지만 대적광전 앞에서 보면 주변 산세를 안으로 끌어들여 개방적인 공간을 만들고 있으며 이는 정적인 것을 동적인 것으로 확장하는 탁월한 건축기법이다.
대적광전 뒤로 돌아가면 신라 당시의 1천여년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채 고졸한 멋을 보여주는 높은 석축 기단이 있다. 가파른 계단을 통해 석축기단 위로 올라가 보안문(일명 보안당)을 지나면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수다라장과 법보전이 나타난다.
바로 해인사의 압권인 대장경판전. 서로 마주보는 두개의 긴 일자형 건물로 남쪽의 것이 수다라장(하판당), 북쪽의 것이 법보전(상판당)이다. 이 대장경판전이야말로 법보사찰인 해인사를상징하는 대표적 건물. 앞뒤벽에 서로 다른 크기의 붙박이살창(환기창)을 만들어 바람이 들어와 한바퀴 돌아나가게 했다. 겉으로는 그저 숭숭 뚫어놓은, 무심한 창인 듯 싶지만 이 환기창의 통풍구조가 바로 경판전 신비의 비밀로 당시 건축기술의 탁월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벽을 상하로 나누어 붙박이살창을 위아래로 배치했는데 그 크기가 각각 다르다. 수다라장 앞벽의 경우 상부창은 하부창의 4분의 1 크기밖에 안되고(상소하대) 뒷벽은 상부가 하부창의 두배 크기(상대하소)다. 법보전 앞벽은 상부창이 하부창보다 작지만 앞뒷벽 하부창 모두 수다라장의 하부창보다 크게 설계돼 있다.
창의 크기가 모두 다른 것은 자연을 그대로 살리고 자연의 변화에 맞추어 온습도를 조절하기 위한 것이다. 이같이 당대의 건축인들은 경험과 직관에 의해 환기창의 크기와 위치를 잘 고안,건물 내에 합리적인 환기작용을 유도해냈고 그로 인해 팔만대장경은 지금까지 완벽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경판 보관 기능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건물 내부는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게 만들었으나 이 단순함이야말로 치밀하게 계산된, 그러면서도 자연과의 완벽한 조화를 염두에 둔 고도의 건축기술인 셈이다.
자연에 그냥 두면 멸해버릴 목판을 자연 속에서 멸하지 않도록 자연에 의존하고 귀의하면서도 자연을 극복해낸 건축물 팔만대장경 판전. 현대의 건축가들은 아직도 이 「천년건축물」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볼 따름이다.<이광표 기자>
◎전문가가 본 해인사김석철씨·아키반 대표/자연과 하나되어 「해탈의 세계」로 하늘에서 해인사를 내려다보면 참으로 놀랍다. 땅에서 보던 형상의 원리가 하늘에서 보이는 것이다. 하늘에서 느끼는 일을 땅위에 이룬다는 일은 자연과 건축이 혼연일치가 될 때 가능한 것이다. 세계 어디에도 공간형식에 있어서 한국의 자연만한 것이 없다. 자연이 이미 스스로의 건축적 형상을 이루고 있으므로 한국의 건축은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형국이 될 때 최고의 것이 되는 것이다.
건물이 자연에 서는 일은 인간이 세상에 서는 일과 같다. 한 인간이 세상에 서는 일은 인문적 사건이지만 인간집합이 세상에서는 일은 사회적 사건이다. 해인사는 어떻게 건축집합이 대자연에 서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하늘에서 보는 해인사는 바로 한국인의 역사 그것이었다.
해인사는 짓기 시작한지 일천이백년이 되었다. 신라때 창건되고 고려 조선조때 수 차례 다시 지었다. 건축원리를 기반으로 천년의 공간을 천년의 시간 위에 이어온 것이다. 일본건축의 정수라하는 이세신궁은 이십년마다 다시 지어 이천년동안 원래의 모습을 유지한 것이다. 해인사는 이세신궁같이 동일형식의 반복으로 천년을 이어온 것이 아니라 본래의 원리를 기반으로 천년동안의 건축형식이 이루어온 인간의 역사 같은 것이다. 해인사 가람배치의 원리는 육계 색계 무색계가 진입공간 수도생활공간 예불 및 법보공간으로 이어지는 중심축에 있다. 배치의 축은 산아래 홍류동 계곡에서 시작하여 대적광전 대장경판전을 지나 수미 정상탑 뒤 가야산 정상까지 연결된다. 넓고 깊은 가야산 전체가 길이 3백m, 폭 1백50m인 해인사 가람 속에 들어와 있다. 해인사로 들어서는 일은 세상을 벗어나 불법의 세계인 해탈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을 암시한다.
해인사는 불국사와 함께 한국 천년건축의 가장 완성된 도시적 스케일의 건축군이다. 자연의 흐름과 하나가 되어 인공속에 자연의 질서를 담고 불가의 논리를 건축공간으로 구상화하여 천년의 공간을 이룬 것이다. 해인사의 가장 높은 곳에는 인류의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이 극도로 절제된 공간형식 속에 현대의 공학도 이루지 못한 불변의 상태를 이룬 대장경판 안에 정신과 물질이 하나가 된 고답적 정경을 이루고 있다. 하늘에서야 알 수 있을 정신적 깨달음의 상징적 공간을 해인사는 땅위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해인사는 그 이름대로 온갖 사물의 그림자가 바다에 인영처럼 비치듯 부처의 깨달음이 땅위에 구체적 공간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위대한 천년건축이다. 하늘에서 볼 수 있는 것을 땅에서 느낄 수 있는 사람이면 이미 해인사를 아는 것이다.
가야산 골프장 건설싸고 2년째 진통
중앙일보 961007 16면 기획 2873자
◎경북 고령군·해인사성주군·건설업체 대립/성주군지역개발 재
정 수입 위해 건설 마땅/고령군상수원 오염·산사태 우려 적극반대
국립공원 가야산 자락을 생활터전으로 삼아 오순도순 정겹게 살던 경북 고령·성주 군민들은 요즘 바로 그 가야산 때문에 틈이 벌어져 있다.성주군이 산허리에 골프장을 유치하려는 데서 시작돼 1년반째 계속되고 있다.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이 서남쪽으로 달리다 잠깐 멈춘듯 우뚝 솟아 오른 가야산은 자락에 고령·성주·합천·창녕·거창군등 경남북의 5개군을 거느리고 서남쪽 산허리에는 해인사를껴안은 명산.
이 산자락에 골프장 건설이 추진되자 예정지 바로 아랫마을인 고령군덕곡면 주민 7백가구 2천5백여명은 골프장반대위원회(회장 도영환·57·농업)까지 구성,반대운동에 나서고 있다.또 이곳에 자리잡은 종찰 해인사측과 고령군내 24개 사회단체협의회(회장 50)회원들도 가세하고 있다.
『돈은 성주에서 벌고 오염된 물은 고령으로 흘려 보내는 골프장건설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해인골프장 건설 반대운동·시위에 참여했던 고령군민 이동구(61·경북 고령군 덕곡면 노리)씨는 골프장건설을 추진중인 성주지역을 보는 눈이 곱지 않다.주민들은 우선 골프장에 뿌리게 될 맹독성 농약으로 인한 상수원 오염과 공사중 흙더미 유출이나 산사태로 마을이 피해를 보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개발을 추진중인 성주군과 이 지역 주민들은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골프장 건설을 무조건 반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면서 『지역개발과 재정수입을 늘리기 위해 골프장 건설은 반드시 추진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성주 주민들은 고령 주민들이 지난해 4월 반대위원회를 구성하자 이에 대응해 같은해 10월 개발추진위원회를 구성,각계에 개발건의서를 보내는 등 맞대결을 벌이고 있는 상태다.
한편 양쪽 자치단체는 골프장 건설을 둘러싼 갈등이 사업주체인 민간업체와 지역주민들간의 법적다툼으로 진행되자 직접 접촉을 피하면서 대리전을 벌이고 있는 양상이다.이진환 고령군수는 『골프장등 지역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행정협의회를 가질 것을 성주군측에 요구했으나 이유없이 미루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대해 김건영 성주군수는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합리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자치단체간의 불편한 만남은 가급적 피하고 있다』고 말했다.<성주=김선왕 기자>
◎양측 대립 경과/고법선 가야개발 승소/연말께 최종 판결 날듯
경북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가야산 일대의 해인골프장 건설을 둘러싼 지역주민들과 업체측의 분쟁의 불씨는 성주군이 87년 수립한 장기종합개발계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주군은 이 계획에 따라 민간자본으로 가야산을 개발할 목적으로 90년 건설부로부터 가야산 국립공원안의 체육시설(골프장)건설승인을 받아 ㈜가야개발(대표 김선국)에 맡겼다. 이후 가야개발은 91년6월 국립공원관리공단으로부터 사업 시행허가를 받아 92년 환경영향평가를 마쳤다.
94년12월에는 경북지사로부터 최종 사업계획 승인을 받아 공사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그러나 이때까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던 골프장 문제는 95년4월 환경오염을 우려,골프장건설을 반대하는 고령군민들이 반대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사업계획 승인취소」 행정심판을 제기하면서 불거졌다.
이를 계기로 같은 해 7월 문화체육부에 의해 골프장건설 승인이 취소되면서 양측은 극한대립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그러나 가야개발측은 이에 불복,고등법원에 행정심판재결 취소소송을 제기,올 6월19일 승소했다.그러자 이에 반발한 고령군민 들과 환경단체·해인사측이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대법원에 상고하는 한편 골프장건설저지 「백만인 서명운동」과 반대 집회를 갖는 등 실력행사에 나섰다.
골프장은 현재 착공도 못한 상태에서 올 연말께 나올 대법원의 최종판결만을 기다리고 있다.
◎반대운동 앞장 해인사 입장/“물 부족·생태계 변화 우려”/농약으로 팔만대장경 훼손 가능
팔만대장경을 소장해 법보종찰로 불리는 가야산 해인사도 해인골프장 건설 반대운동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지난해 6월부터 건설 반대운동을 위해 「해인총림 대책위원회」를 만든 해인사는 그동안 전국 4백여 조계종 사찰에 「반대운동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하는 한편 두차례에 걸쳐 2백여명의 스님이 모인 가운데 「골프장 반대를 위한 산중 결의대회」도가졌다.
「골프장에서 엄청난 양의 지하수를 뽑아 올려 물 부족 현상과 농약으로 인한 생태계 변화 등의 우려가 높다」는게 반대 이유다.
특히 『연간 사용량이 7.5 정도나 될 것으로 보이는 농약이 바람을 타고 절 쪽(직선거리 3.5㎞정도)으로 날아들 경우 국보인 팔만대장경이 휘어지거나 갈라질 염려도 높다』고 주장한다.
대책위 일진스님은 『이 같은 문제들은 제쳐둔다 하더라도 국립공원에 골프장이 들어서는 것 자체를 국민 정서상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합천=김선왕 기자>
◎건설업체 가야개발 입장/“대법원 판결만 기다릴 뿐”/이미 200억 투자… 못 물러서
『지금으로선 대법원의 판결만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좋은 결과를 확신합니다.』
가야개발 김선국(54) 사장은 『그 동안 골프장 사업에 투자한 자금만 해도 무려 2백억원에 이르고 있다』며 『회사의 사활이 걸린 문제인 만큼 골프장 건설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 사장은 『혹시라도 대법원에서 패소하게 된다면 골프장 허가를 내준 국가를 상대로 배상을 청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골프장 건설을 추진해온 가야개발은 지역간의 갈등 때문에 삽 한번 떠보지 못한 채 사장과 직원 4명이 사무실만 지키고 있다.
가야개발측은 고령군민들이 문제삼는 환경오염에 대해서는 『유효미생물군(EM)을 이용한 신유기농법을 쓰면 농약사용을 거의 하지 않고 골프장 잔디를 관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또 『골프장에서 사용한 물도 모두 처리해 재사용하기 때문에 고령군 덕곡면 주민들이 우려하는 덕곡면의 노리저수지 오염도 막을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대구=최익재 기자>
팔만대장경 경판 모두 몇 장인가
한국일보 960903 15면(문화) 기획 1036자
◎정확한 숫자도 모른채 「세계문화유산」 지정/1915년 조사 81,258장 1975년엔 81,240장 발표/8만여장 추정…소실땐 피해 파악조차 안될판
국보인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지난해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세계적 문화재로 유명해졌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경판이 모두 몇장인지 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팔만대장경의 경판은 국보 32호, 경판을 보관한 판고는 국보 52호로 지정돼
있으나 「고려 불교문화의 정수」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기 위해 총력홍보를 했던 문화재관리국도 「8만여장」이라고만 말할 뿐 정확한 숫자는 모른다. 화재나 침수로 피해를 당할 경우 어떤 경판이 소실됐으며 몇 장이나 없어졌는지도 파악할 수 없는 실정이다.
지금까지 팔만대장경 경판에 대한 조사는 단 2차례 실시됐다.1915년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경판수는 8만1,258장이었다. 그러나 75년 문화재관리국의 조사의뢰를 받은서수생 교수(경북대 한문학과)는 경판수가 총 8만1,348장이며 이 가운데 108장은 중복된 것이므로 실제로는 8만1,240장이라고 보고했다. 학계에서는 문화재관리국의 조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지적, 일제가 파악한 숫자를 비교적 공신력있는 기록으로 보고 있지만 80여년이 지난 조사기록에 대한 신뢰성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박상국 예능민속연구실장은 『우리나라는 보물창고에 무슨 보물이 있는지 조차 모르는 셈』이라며 『현재로서는 대장경의 체계적 보존관리가 어렵고 대장경을 이용한 학문발전도 요원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그동안의 보존관리가 경판의 소실 예방과 판고 복원에만 치중돼 왔다고 지적,『경판마다 바코드를 부착, 기본자료를 전산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94년부터 해인사 대장경연구소와 함께 대장경 주변환경에 대한 조사연구를 실시한 문화재관리국은 『경판숫자 조사는 많은 예산이 필요한 방대한 작업이어서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예산이 확보되는대로 경판의 종류, 숫자 등을 파악하는 2차 실사에 나설 계획』이라고 밝혔다.<박천호 기자>
1996/12/25 20:18 (동아일보)
[천년건축/해인사 팔만대장경판전]
「글〓李光杓기자」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인 경남 합천 해인사. 법보종찰(法寶宗刹)로도 유명하지만 우리 정신문화의 정수인 팔만대장경(국보 제32호)이 자리한 곳이다. 팔만대장경을 완벽하게 보존해오고 있는 해인사의 목조건축물 팔만대장경판전(八萬大藏經板殿·국보 제52호)이야말로 「자연과의 합일로 자연을 극복」하는 우리 전통 건축의 「신비」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표적 「천년건축물」이다.
통일 신라 애장왕 때인 802년에 창건된 해인사는 조선 태조때인 1399년 강화도에 보관중이던 대장경을 옮겨와 지금까지 보관해오고 있다. 조선 성종때인 1481년 이후 해인사는 지금의 규모를 갖추었으며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현재의 경판전(經板殿)은 1488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해인사로 가려면 우선 오르막길을 지나야 한다. 일주문에서 봉황문 해탈문까지의 조금씩 상승하는 길은 사람에게 긴장감과 탈속(脫俗)의 분위기를 제공한다. 그 긴장감은 해탈문에서 절정에 달하고 구광루 밑을 통과해 대적광전(大寂光殿) 앞의 넓은 마당에 이르면 상승 공간은 없어지고 평정을 되찾는다. 이러한 역동적인 공간 배치는 해인사 가람(伽藍)배치의 특징이면서 깨달음의 과정과도 통하는 것이다.
대적광전 뒤로 돌아가면 신라당시의 1천여년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채 고졸(古拙)한 멋을 보여주는 높은 석축 기단이 있다. 가파른 계단을 통해 석축기단 위로 올라가 보안문(일명 보안당)을 지나면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수다라장(修多羅藏)과 법보전(法寶殿)이 나타난다. 바로 해인사의 압권인 대장경판전. 서로 마주보는 두개의 긴 일자형 건물로 남쪽의 것이 수다라장(下板堂·하판당), 북쪽의 것이 법보전(上板堂·상판당)이다. 이 대장경판전이야말로 법보사찰인 해인사를 상징하는 대표적 건물. 앞뒤벽에 서로 다른 크기의 붙박이살창(환기창)을 만들어 바람이 들어와 한바퀴 돌아나가게 했다. 겉으로는 그저 숭숭 뚫어놓은, 무심한 창인듯 싶지만 이 환기창의 통풍구조가 바로 경판전 신비의 비밀로 당시 건축기술의 탁월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벽을 상하로 나누어 붙박이살창을 위아래로 배치했는데 그 크기가 각각 다르다. 수다라장 앞벽의 경우 상부창은 하부창의 4분의1 크기밖에 안되고(上小下大·상소하대) 뒷벽은 상부가 하부창의 두배 크기(上大下小·상대하소)다. 법보전 앞벽은 상부창이 하부창보다 작지만 앞뒷벽 하부창 모두 수다라장의 하부창보다 크게 설계돼 있다. 창의 크기가 모두 다른 것은 자연을 그대로 살리고 자연의 변화에 맞추어 온습도를 조절하기 위한 것이다. 이같이 당대의 건축인들은 경험과 직관에 의해 환기창의 크기와 위치를 잘 고안, 건물 내에 합리적인 환기작용을 유도해냈고 그로 인해 팔만대장경은 지금까지 완벽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경판 보관 기능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건물 내부는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게 만들었으나 이 단순함이야말로 치밀하게 계산된, 그러면서도 자연과의 완벽한 조화를 염두에 둔 고도의 건축 기술인 셈이다.
―「千年건축」 끝―
1997/03/05 08:02 (동아일보)
팔만대장경 「화려한 외출」…5월 서울서 전시회
[이광표기자] 팔만대장경이 해인사를 떠나 서울 나들이길에 오른다. 국보 제32호이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이 해인사를 떠나는 것은 6백년만에 두번째. 지난 93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던 책의 해 기념 「한국의 책문화 특별전」 출품 이후 4년 만이다.
이번 나들이는 해인사와 호암미술관이 5월1일부터 28일까지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개최하는 「해인사와 대장경판 전시회」(가칭)를 위해서다.
이번 전시회는 팔만대장경 전산화를 추진중인 고려대장경연구소가 문화유산의 해를 맞아 대장경 전산화 작업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고 기금을 모으기 위한 취지로 마련됐다.
출품되는 경판(經板)은 팔만대장경의 첫번째 경(經)인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 권1의 첫 장과 대장도감(大藏都監·대장경 제작을 주관한 관청)의 분사(分司)에서 제작한 경판, 간행 연대가 기록된 경판중 맨 처음과 맨 나중에 만들어진 것 등 모두 네장.
대장경 외에 대장경의 탁본과 모형, 경판전(經板殿·팔만대장경이 보관된 건물·국보 제52호)의 대형 사진, 통도사 화엄사 소장의 석경판(石經板), 해인사와 동국대가 소장중인 패엽경(貝葉經) 등 각종 불교경전 등도 함께 전시한다. 팔만대장경판 제작 과정도 재현할 예정이다.
해인사측은 팔만대장경의 나들이를 알리고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이운법회(移運法會)를 해인사와 서울 조계사 경내에서 성대하게 치를 계획도 세우고 있다. 그러나 팔만대장경의 안전을 고려, 조계사에서 전시장까지의 이운행사 실시 여부는 신중히 검토 중이다.
팔만대장경은 초조(初雕)대장경이 1232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불타자 불력(佛力)을 통해 몽골 침입을 격퇴하려는 염원으로 1237년 간행에 착수해 1251년에 완성한 것이다. 대장경은 강화도 선원사에 봉안돼 오다 조선초 1398년 해인사로 옮겨왔으며 현재의 보관 장소인 경판전은 1488년 만들어진 것이다.
대장경은 이후 단 한번도 경판전 밖으로 나오지 않다 93년 경판 석장이 처음으로 외출, 책문화 특별전에 참가하고 팔만대장경이 제작됐던 강화도를 찾은 바 있다.
1997/12/30 19:53 (동아일보)
[문화유산 돋보기 답사]해인사 팔만대장경
해인사 팔만대장경판(국보 제32호)은 자랑스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그러나 이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목조건축물 팔만대장경판전(국보 제52호·1488년 건축)역시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경판전 없는 팔만대장경은 있을 수 없다. 경판전이 없다면 대장경을 제대로 보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 단순 투박하고 엉성해보이는 이 경판전이 팔만대장경을 5백년 넘도록 완벽하게 지켜온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 바로 신비의 환기창이다.
경판전은 마주보는 두개의 긴 일자형 건물과 그 좌우의 작은 건물로 이뤄져 있다. 긴 건물중 앞쪽이 수다라장(修多羅藏), 뒤쪽이 법보전(法寶殿). 두 건물의 앞뒷벽 위아래엔 각각 붙박이살 환기창이 있는데 이것이 비밀의 실체다. 특히 창의 크기가 모두 다르다는 점이 그 핵심. 수다라장 앞쪽벽 남향창은 아래창이 위창의 4배이고 뒤쪽벽의 북향창은 위창이 아래창의 1.5배 정도. 법보전도 각각의 크기는 좀 다르지만 비율은 비슷하다. 내부로 들어온 공기가 아래 위로 돌아나가도록 하고 동시에 공기유입량과 유출량을 조절함으로써 적정 습도를
유지하도록 절묘하게 고안한 것이다.
각 건물 앞쪽벽창과 뒤쪽벽창 전체의 크기(위아래창 모두 합친 것)를 비교해보면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법보전은 뒤쪽벽 위아래창 전체 면적이 앞쪽보다 1.38배 넓고 수다라장은 뒤쪽이 앞쪽보다 1.85배 넓다. 이는 법보전이 수다라장에 비해 뒤창으로 들어온 공기가 앞창으로 많이 빠져나가고 내부에 남는 양은 적다는 것을 뜻한다. 왜 그랬을까. 김동현 국립문화재연구소장(한국건축사)은 『법보전이 수다라장보다 뒤쪽 계곡에 가까이 있어 주변 습기가 많은 점을 고려, 공기의 잔량을 적게함으로써 습기 피해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당시 건축인들은 이처럼 경험과 직관을 바탕으로 창의 크기와 위치를 조절,완벽한 통풍구조를 만들어낸 것이다. 겉보기엔 그저 숭숭 구멍 뚫어놓은, 무심한 창같아 보이지만 당시의 탁월한 건축술이 살아있음을 알아챌 수 있다.
또 건물 내부 장식을 피하고 지붕 바로밑 공간을 크게 만들어 놓은 것도 공기가 충분히 돌아나가고 불필요한 습기가 남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것만이 아니다. 건물을 서남향으로 배치, 건물 주변 어느 곳에도 영구적인 그림자가 생기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건물 내부 바닥엔 숯 횟가루 소금 등을 뿌려 습도를 조절하고 해충을 막아내고 있다. 2, 3중의 안전장치를 통해 통풍과 습도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한 것이다.
자연에 의지하고 귀의하면서도 자연을 극복해낸 신비의 건축물 팔만대장경판전. 그 비밀은 결국 자연과 인간, 정신과 기술의 조화였던 셈이다.
〈이광표기자〉
팔만대장경판 板架도 없이 보관
문화일보 97년 12월 5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불교문화재이자 지난 9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남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판 및 판전의 보존·관리에 비상이 걸렸다. 해인사가 지난달 2일부터 사찰 직영사업으로 판전내 東寺刊庫 (동사간고)의 지붕 교체와 西 (서)사간고의 지붕 기와 고르기 공사(14일 완료예정)를 하면서 경판관리를 소홀히하는 등 각종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동사간고의 경판을 서사간고로 옮기면서 공간이 부족하자 板架(판가)에 세워놓아야 할 경판 1천6백여 판을 밑바닥에서부터 2∼3m 높이로 아무렇게나 겹겹이 쌓아올려 두었고, 겨울에 무리하게 공사를 강행하느라 강회나 흙 등이 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동사간고 바깥에 보온막을 둘러씌우고 안에는 연탄난로를 피워놓는 등 문화재 전문가들은 물론 일반인들의 상식으로도 납득하기 힘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또 해인사 측과 문화재관리국은 문제점을 인정하면서도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문화유산의 해를 마감하는 시점의 이번 공사는 사찰 및 문화재 당국의 불교문화재 관리의 수준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충격을 주고 있다. 보수공사 중인 15평 남짓의 동서 사간고는 정면에 앞뒤로 배치된 法寶殿(법보전) 修多羅藏(수다라장)과 함께 해인사 대장경판전 (국보 제52호)의 양 측면에 위치한 건물이다. 법보전과 수다라장이 팔만대장경(국보 제32호) 또는 국가기관인 대장도감에서 새겼다고 해 國刊(국간)으로 불리는 경판을 보관하고 있는데 비해 동·서 사간고는 고려시대 사찰 또는 지방관서에서 새긴 54종 2천8백35판의 경판을 수장하고 있다. 그러나 국간이 아니라고 해 중요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어서 이 중 98종 2천진125판은 국보 제206호로, 25종 1백10관은 보물 제734호로 지정되있다.
문화재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동서사간고 보수공사의 문제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번 보수공사의 비용은 지난해 국가보조금 형식으로 4천2백 만원의 예산이 배정돼 경남도와 합천군청을 거쳐 해인사 측에 전달됐다. 지난해와 올해 초 공사가 진행돼야 했으나 해인사 측의 내부갈등 등의 문제로 지연돼 오다 지난달 갑자기 공사가 착공됐다. 문화재 전문가들도 최근에야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정도다. 겨울을 앞두고 공사를 강행한 이유는 정부 회계법상 올해에도 공사가 진행되지 않으면 공사비가 국고에 환수되기 때문이다. 결국 문화재를 보호하기보다는 배정된 예산의 국고환수가 아까워 웬만한 건축공사에서도 기피하는 겨울공사가 강행된 것이다. 문화재관리국은 공사지연과 겨울공사의 책임을 해인사 측에 돌리고 있는 반면 해인사 측은 지난달 안에 공사를 완료하려했으나 비가 오고 문화재관리국과의 의견조정 과정에서 1주일 이상 공기가 지연됐다고 준장하고 있다. 해인사 고려대장경연구소 보존부장인 南日(남일)스님은 "일찌감치 공사를 하거나 예산이 환수되더라도 내년 봄에 했어야 했다"면서도 "그러나 내년에 법보전과 수다라장의 보수공사가 예정돼 있어 사전 지식을 갖추자는 의미에서 할 수 없이 공사를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겨울 문화재보수공사는 문화재 전문가들이 가장 꺼려하는 것이다. 해인사는 요즘 아침 평균기온이 영하 6∼7도 이하로 떨어지고 있으며 얼마 전에는 강회가 언 적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보온용 비닐을 씌우고 연탄난로를 피워 실내온도를 영상으로 올려놓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문화재관리국 보수과는"가스나 석유에 비해 연탄난로가 안전한 편이어서 소화기 등의 시설만 완벽하게 갖추어 놓으면 겨울에 연탄난로를 켜놓고 보수공사를 하는 경우가 상당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문화재 전문가들은 "혹시라도 휴지 등을 통해 불똥이'옮겨 붙으면 어떻게 하려는지 모르겠다"며 현대건축에서도 기피하는 겨울공사를 전통목조건물에 강행하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번 공사의 또 다른 문제점은 국보이자 세계유산의 보수공사를 사찰 직영사업으로 맡겨놓고 문화재관리국은 전혀 책임이 없는 듯 행동하고 있는 점이다. 문화재전문가들은 특히 다른 문화재도 아닌 데 장경판전의 보수공사를 사찰과 시행청인 합천 군청에다 만 맡겨놓은 것은 직무유기라고 지적하고 있다. 문화재관리국은 경판이 언제 옮겨졌는지, 어떻게 보존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경판의 관리는 이번 공사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그렇찮아도 국간판에 비해 상태가 좋지않은 사간판을 마구잡이로 쌓아놓아 경판이 손상됐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南日스님은 "대장경판은 스님들에게는 法寶(법보)로서 남다른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지난달 2일 옮기는 과정이나 쌓아놓은 과정에서 각별한 신경을 썼다"며 "그러나 스님들도 경판을 저렇게까지 밖에 비치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해인사 측은 공사시 판가 위에 덧 집을 씌워 경판을 옮기지 않고 보호하려 했으나 예산부족으로 못했고 경판을 다른 곳에 옮겨 잘 보존하려 했으나 문화재관리국이 경판의 판전 외 유출은 절대 안된다고 해 할 수 없이 서사간고로 옮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문화재관리국 측은 이번 공사의 중요성을 인정해서 일찌감치 문화재연구소장을 단장으로 한 기술지도단을 구성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지난여름 기술지도단이 구성된 뒤 한번도 회의를 연 적이 없었다. 사건이 심각해지자 4일 처음으로 기술지도단 회의를 열었을 뿐이다.
<海印寺=崔永昌기자>
<한국의 성지> 해인사 경판전 -조선일보 1997
-고려재조 대장경으로 법보사찰 명명...1398년 옮겨와-한국불교의 대표적 성지인 삼보사찰중 두 번째는 경남 합천군에 자리 잡은 가야산 해인사이다.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서기 802년)에 창건된 고찰 해인사를「법보사찰」로 만든 것은 이곳에 소장된 고려재조 대장경이 다. 흔히 경판의 수를 따라 팔만대장경으로 불리는 고려대장경 은 전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규모와 정교함으로 민족의 최고 문화유산으로 꼽히며, 불교계에서는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간직하고 있는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다.
해인사 는 신라 중기의 고승 의상의 손제자인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이 신라왕실의 전폭적인 후원 하에 세웠으며, 조선 성종 19년(1488)에 이르러 대형불사를 통해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고 오늘날 가람배치의 기본틀이 이루어진다. 학조대사가 지휘한 이때의 중창불사는 해인사 에 큰 관심을 기울였던 세조와 그 부인 정희왕후의 뜻을 받들어 며느리인 인수-인혜왕후 가 적극 후원했으며, 이 때문에 해인사에는 세조의 영정이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해인사 역시 다른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소실과 중창을 거듭 했으며,중심법당인 대적광전 등 해인사 의 현재건물들은 1818년(순조 18년)의 중건 때 만들어졌다.
고려대장경 을 보관하는 경판전은 대적광전 뒤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수다라장과 법보전 등 두 동의 주건물과 동서사간고 등 두 채의 보조 건물로 구성돼 있다. 이들 건물 역시 1488년의 중건 때 처음 세워졌으며,1622년과 1624년 각각 중수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4동의 경판전은 모두 건물의 외벽에 붙박이 살창을 두고 있으며, 이 때문에 내부의 통풍과 온도가 경판보 호에 최고의 상태를 유지한다. 수다라장과
법보전에는 국보 제32호인 고려대장경 8만1천258매가 소장돼 있으며, 동서사간고에는 해인사 등 사찰에 서 만들어진 불경경판들이 보관돼 있다.
몽고군의 침입을 부처님의 힘을 빌려 물리치려는 고려조정과 국민들 의 염원을 담아 만들어진 고려대장경 이 해인사에 자리잡은 것은 조선태조 7년(1398년)이다. 1236년(고종 23년)부터 1251년(고종 39년)까지 16년간에 걸친 판각후 강화도 선원사에 보관되던 고려대장경 은 태조의 명에 의해 해인사로 옮겨지게 됐던 것이다.
고려대장경 경판은 세로 25㎝, 가로 70㎝로 1면에 23행, 1행에 14자 가 새겨져있다. 판면에는 옻칠을 하였고, 양쪽에 마구리를 대어 뒤틀림을 방지했다. 동아시아에서 앞서 만들어진 다른 대장경들의 내용을 비교-검토하여 탈자-오자 등을 바로 잡았기 때문에 내용이 가장 정확할 뿐 아니라, 수천만자의 글자가 한결같이 고르고 정밀한 서체여서 예술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6백년이 넘게 가야산자락에 묻혀 있던 고려대장경 은 최근 거듭 경사를 맞았다. 목판이라는 특성때문에 널리 전파하는데 한계를 갖고 있던 고려대장경을 CD-ROM에 담아 전자시대에 걸맞게 재창조하는 작업이 입력을 끝낸 것이다. 또 지난 연말에는 석굴암, 종묘 등과 함께 유네스코 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됨으로써 해인사 경판전은 이제 인류의 문화재로 위상이 높아지기도 했다.
해인사대장경판고
부산일보-1996 해인사는 통도사, 송광사와 함께 삼보 사찰의 하나이며, 당에서 수도한 순응, 이정 두 대사가 신라말 애장왕 3년(802)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경내에는 대소의 많은 법당이 있으나 그 대부분은 근세에 세워진 것이고 장경판고 만이 조선 초기에 세워진 건물이다. 이 건물의 건립연대는 건물에 사용되었던 와당 또는 평와에 나타난 홍치 원년(1488)이라는 각명 등으로 추정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도 무사하였으나 오랜 세월에 낡았던 것을 광해군 14년(1622)에 수다라장을 중수하고 1624년에는 법보전도 중수하였다.
장경판고는 건물 자체가 특수할 뿐 아니라 고려대장경의 판고로서 유명하며, 똑같은 규모 양식을 가진 두 건물이 남북으로 나란히 세워져 있어 남쪽을 수다라장, 북쪽을 법보전이라 한다. 건물은 간단한 방식으로 가구하였고 세부 역시 간결하여 판고에 요구되는 기능을 충족시킬 목적 이외에는 아무런 장식적 의장을 가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모양의 자연석 주춧돌 위에 배흘림이 큰 기둥을 세웠고, 기둥 위에는 기둥 머리에 해당되는 주두를 올려놓았다. 이 주두 위에는 대들보를 얹어 그것 이 직접 주심도리를 받으며, 그 밑에는 간단한 익공이 있을 뿐이다. 마주보는 대들보 위에 놓인 동자주 위에 놓고 중앙에 같은 양식의 동자주를 놓아 마루 도리를 받게 하였다. 이 동자주들은 모두 아랫부분에 간단한 화반으로 고정시켰다. 몸통 부분은 짧은 모기둥이고, 머리 부분에는 포작을 꾸몄다. 이 포작의 참차는 보밑을 받치는 쪽이 초공모양으로 되고, 도리 밑 장혀를 받치고 있는 것은 다포 양식의 첨차 밑 소누와 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다.
장경판고는 정면 15칸, 측면 2칸 규모의 수다라장, 법보전과 정면 2칸, 측면 1칸의 사간고인 동, 서고 등 4동이 장방형의 입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수다라장과 법보전은 우진 각 지붕이고 동,서사간고는 맞배지붕인데 그 가구는 창고 건물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통풍을 배려하여 창의 크기를 남쪽과 북쪽이 서로 다르게 하였으며 매칸마다 광창을 설치하고 장식적인 요소는 모두 없애 버렸다.
집의 가구 형식은 오량가이며, 대들보는 고주에서 함량되고 대공은 동자주 모양이나 복화반과 초공을 받쳤고 대공에는 솟을 합장을 끼웠다. 판고 내부는 흙바닥이며, 판가가 설치되어 있고 천정은 연등천정이다.
해인사대장경판
부산일보-1996해인사 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판이라 하며, 또한 판수가 8만여판에 이르고 팔만 사천 번뇌에 대치하는 법문을 수록하였다하여 팔만대장경판이라고도 한다. 몽고의 침입으로 현종 때의 초조대장경판이 불타버려 다시 새긴 대장경으로 재조대장경판이라고 하며, 현재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해인사 대장경판이라 불리고 있다.
이 대장경판은 해인사 법보전과 수다라장에 보관되어 있다. 대장경판의 수는 일제 때 조사한 81,258장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여기에는 대장경판이 아닌 조선조 때 판각된 것도 포함된 통계이다. 경판의 크기는 세로 24㎝ 내외, 가로 70㎝ 내외이고 두께는 2.6㎝ 내지 4㎝이다. 무게는 3㎏ 내지 4㎏이다. 대장경의 판각을 위해서는 국가에서 대장도감이란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총괄하고 실제적인 판각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이러한 것은 경판의 간기와 경판에 새겨져 있는 가수를 조사하여 얻어낸 결론이다. 대장경판의 권말에는 "을사세 고려국대장도감봉칙조조"등으로 간기가 기록되어 있고 각 경판의 권수제나 권미제 아래의 광곽밖에 각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대장경판은 간행기록을 조사해 보면 고려 고종 24년(1237)부터 35년(1248) 까지 12년 동안 새겼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에 16년이 걸린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은 준비기간을 합산한 것이며, 고려대장경각판각 사업은 초조대장경이 불타 버린 이듬해인 고종 20년(1233) 경에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새긴 대장경판은 모두 1,496종 6,568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대장경판의 특징은 무엇보다 이 사업을 주관했던 당시 개태사 승통인 수기대사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 등을 참고하여 내용을 비교하여 오류를 바로 잡은 데에 있다. 이때 수정한 내용은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에 수록되어 있다. 이 대장경판은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다가 선원사를 거쳐 태조 7년(1398) 5월에 해인사로 옮겨져 오늘까지 보관되고 있다.
이 대장경판은 현재 없어진 송나라 북송관판이나 거란판 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일 뿐 아니라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대장경판이다. 또 한 이 대장경은 대장경 간행 역사에 있어 내용이 가장 정확하고 완벽한 대장경판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일본에서는 1614년 이 대장경을 바탕으로하여 대장경 <종존판>을 새기다가 중도에 포기한 일이 있고 그 후 신연활자로 「대일본 교정숙축쇄판대장경;1880∼1885,「대일본속장경:1902∼1912」,「대정신수대장경;1924∼1934」의 바탕이 되었으며 중국에서 「불교대장경;1979」과 현재 간행하고 있는 「불광재장경;1983∼현재」의바탕을 삼고 있을 정도로 그 내용이 세계에서 가장 정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대장경판은 수천만개의 글자가 하나같이 그 새림이 고르고 정밀한 서각 예술품으로 우리 민족이 남긴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