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CD으로 본 팔만대장경
고려사(高麗史)는 1449년(세종 31)에 편찬하기 시작하여 51년(문종 1)에 완성되었는데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연표(年表)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 총139권의 고려시대의 역사·문화 등의 내용을 기전체(紀傳體)로 정리한 책으로 고려시대 역사연구의 기본자료이다.
아래 자료는 북한 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에서 번역하고 열린데이타베이스연구원에서 개발 하였으며 (주)누리미디어(전화 02-761-1661)에서 제작한 고려사 CD에서 대장경 관련 부분을 검색한 내용이다. 검색어는 "대장경"과 "장경"이다.
1. 검색어 "대장경"으로 검색된 자료
● 태조 무자 11년(928)
8월에 왕이 충주(忠州)로 갔다. 그때에 견훤이 장군 관흔을 시켜 양산(陽山)에 성을 쌓았기 때문에 왕은 명지성(命旨城-경기도 포천) 원보 왕충(王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쳐서 패주케 하였다. 관흔은 퇴각하여 대량성(大良城)을 확보하고 군사를 풀어서 대목군(大木郡) 벼를 베었다. 또 그 다음에는 오어곡(烏於谷)에 군사를 나누어 주둔하니 죽령(竹嶺) 길이 막히였다. 왕이 왕충(王忠) 등에게 명령하여 조물성(曹物城)에 가서 형세를 정찰하게 하였다.
신라의 중 홍경(洪慶)이 당나라 민부로부터 대장경 1부를 배에 싣고 예성강(禮成江)으로 들어왔으므로 왕이 친히 그를 영접하였고 대장경은 제석원(帝釋院)에 보관하였다.
● 성종 신묘 10년(991)
여름 4월 경인일에 한 언공(韓彦恭)이 송(宋)나라로부터 돌아와 대장경(大藏經)을 드렸다. 왕이 내전으로 그를 맞아들이고 중을 초청하여 대장경을 읽게 하고 또 교서를 내리어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겨울 10월 한림학사 백사유(白思柔)를 송나라에 보내 대장경과 어제(御製-황제의 저작)를 준 데 대하여 사례하게 하였다.
● 문종 무술 12년(1058)
겨울 11월 경오일에 명령을 내려 정종(靖宗)의 혼당(魂堂)에 있는 금은 기명과 거란에서 조제(弔祭) 예물로 보내온 비단으로 대장경을 만들어서 정종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 문종 계묘 17년(1063)
3월 병오일에 거란에서 대장경을 보내왔다. 왕이 의식을 갖추어 가지고 서쪽 교외에서 거란의 사절을 영접하였다. 신해일에 탐라의 새 성주 두량(豆良)이 내조하였다. 그에게 특별히 명위(明威) 장군이라는 관직을 주었다.
● 문종 계해 37년(1083)
3월 기축일에 왕이 태자에게 명령하여 송나라에서 보내온 대장경을 접수하여 개국사(開國寺)에 보관하도록 하고 겸하여 도량을 베풀었다. 신묘일에 왕이 개국사에 갔다.
● 선종 정묘 4년(1087)
2월 갑오일에 왕이 개국사(開國寺)에 가서 대장경의 완성을 경축하였다.
정유일에 연등회를 열고 왕이 봉은사에 갔다.
3월 병진일에 왕이 구산사(龜山寺)에 가서 승려들에게 음식을 먹였다.
기미일에 왕이 흥왕사에 가서 대장경의 완성을 경축하였다.
● 선종 정묘 4년(1087)
여름 4월 경자일에 왕이 귀법사에 가서 대장경의 완성을 경축하였다.
을사일에 금강경 도량을 건덕전에 베풀고 7일간 비를 빌었다.
● 예종 정해 2년(1107)
정해 2년(1107) 경인일에 요나라에서 고존수(高存壽)를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동시에 대장경(大藏經)을 보내왔다.
● 의종 경진 14년(1160)
9월 갑신일에 왕이 새로 지은 장당(藏堂-대장경을 둔 곳) 후원(後苑)에 가서 주연을 베풀고 국화를 감상하였다.
● 명종 신축 11년(1181)
봄 정월 신해일에 사경원(寫經院)이 불에 탔다. 이에 앞서 왕이 은(銀) 글자로 대장경을 필사하게 했는데 공사(公私)간에 앞을 다투어 많은 돈과 재물을 희사하여 이 사업을 협조하였었다. 무뢰배들이 그것을 훔쳐 내기 위하여 불을 질렀던 것이다.
● 고종 신해 38년(1251)
9월 임오일에 왕이 성 서문 밖에 있는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에 가서 백관을 거느리고 분향을 하였다. 현종 때에 새겼던 판본은 임진년 몽고 병화에 타 버렸으므로 왕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다시 발원을 하여 도감을 설치하였었는데 16년 만에 준공되었던 것이다.
● 고종 41년(1253)
최항은 자기 집에 각 고관들을 초대하고 연회를 하면서 격구(擊毬)를 구경했는데 마별초(馬別抄) 중에는 금으로 안장의 아래끝을 장식하고 금엽(今葉)으로 만든 꽃을 말 머리와 꼬리에 꽂은 자도 있었다.
최항은 일찍이 하루 동안에 여러 차례 종친들과 재추들, 승선 문, 무 4품 이상의 관원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는바 이때부터 연회가 때 없이 벌어졌다.
그 다음해 왕이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옛날에 주공 단(周公旦)과 소공 석(召公奭)이 주나라(周)를 도왔고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이 한나라(漢)를 도왔는데 임금과 신하가 서로 의지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진양공 최이는 나의 선친이 왕위에 있을 때에 그리고 내가 즉위한 이후 충성을 다하여 사직을 보위했고 보좌의 사명을 다했다. 신묘년에 변방의 장수가 국토를 수비 못해서 몽고병이 침입했을 때에는 현명한 전략을 홀로 결정하고 뭇사람의 시비를 물리치면서 몸소 승여(乘與)를 받들고 터를 잡아 천도하였다. 그리고 수년 사이에 궁궐과 관아를 모두 건설했으며 국법을 진흥시켜 우리 나라를 다시금 바로잡히게 하였다. 또 역대로 전해 내려오던 진병 대장경(鎭兵大藏經) 판각이 적병에 의하여 모두 불타 버리고 나라에서는 사고가 많아서 다시 만들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최이는 도감(都監)을 따로 두고 자기 재산을 바쳐서 판각 조각을 거의 절반이나 완료하여 나라에 복을 주었으니 그 공적은 잊기 어렵다.
그 아들 시중(侍中) 최항은 가업(家業)을 이어 임금을 돕고 국난을 제어하였으며 대장경에 대하여는 재물을 내놓고 역사를 감독해서 완성하고 봉납(奉納)의 식전을 거행함으로써 온 나라가 복을 받게 하였다. 또 수도 요해지이 병선을 배치했고 또 강 밖에 궁궐을 건설하였으며 강화 도읍의 중성(中城)을 축성함으로써 견고한 요새를 더욱 견고히 하였으니 만대에 길이 그 힘을 입게 될 것이다. 황차 태묘는 초창이라 미비된 것이 많아서 실로 조상을 받들어 모시는 본의에 어긋나서 나의 마음이 불안했는데 최항은 문객 박성자를 시켜서 태묘 건축을 감역했고 모든 비용을 다 자기 재산에서 지출하여 며칠 사이에 준공되니 그 제도가 적절하다. 이것은 실로 세상에 드문 큰 공이다. 내가 심히 가상히 여겨 유사(有司)에 명령해서 최항에게 부(府)를 세워 주고 식읍을 더 주며 그 부모에게 관작(官爵)을 더 추증하고 두 아들의 직품을 올려 주노라!”라고 했다. 박성재 이하 공쟁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그러나 최항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 원종 임신 13년(1272)
3월 계묘일에 연등회가 있으므로 왕이 봉은사에 갔다. 큰 바람이 마을을 싸고돌면서 세차게 불어서 1백여 호(戶)가 불에 탔다.
갑진일에 전함, 변량 도감(戰艦兵糧都監)을 설치하였다. 또 전함 조성 도감(鈿函造成都監)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황후(皇后)가 대장경(大藏經)을 넣어 둘 함을 구하기 때문이었다.
● 충렬왕 기축 15년(1289)
겨울 10월 윤달 을유일에 왕이 금자원(金字院)에 가서 대장경(大藏經)을 경찬(慶讚)하는 불교 의식을거행하였다. 기축일에 원나라 상서성 및 추밀원에서 관원을 보내 동쪽 일본을 정벌할 때에 사용하던 무기로서 합포에 보관해 둔 것을 검열하였다.
● 충렬왕 을미 21년(1295)
3월 경오일에 원나라에서 백첩목아(伯帖木兒)를 보내 탐라에서 말을 선택하여 갔다.
신미일에 왕이 강안전에서 친히 대장경을 읽었다(轉經).
● 충렬왕 22년(1296)
왕과 공주가 원나라에 갔다. 이듬해에 진왕(晉王)이 자기 나라로 귀환할 때 황제가 그의 관저로 가서 전송하였는바 왕과 공주도 그 연회에 참가하였으며 술자리가 흥겨웁게 되자 공주가 노래를 부르니 왕은 일어나 춤을 추었다. 이해 5월에 귀국하였는데 때 마침 수녕궁(壽寧宮)의 작약 꽃이 만발하였다. 공주가 꽃 한 가지를 꺾어 오라 하여 오래 동안 손에 잡고 완상하더니 감회를 못이겨 눈물을 흘렸다. 그 후 얼마 아니 가서 병이 들어 현성사(賢聖寺)에서 죽었는데 향년 39세였다.
부지밀직(副知密直) 원경(元卿)을 원나라에 파견하여 부고를 전하였더니 원나라에서는 화로홀손(火魯忽孫)을 파견하여 조상하였고 황태후가 부의를 보냈으며 또 대장경을 전경하여 공주의 명복을 빌었다. 공주가 일찍이 원나라에 갔을 때에 친히 화공을 시켜서 자기 화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이때에 그 초상화가 원나라로부터 도착되어 인화전(仁和殿)에 안치하였다. 9월에 고릉(高陵)에 매장하였고 시호는 장목 인명(莊穆仁明) 왕후(王后)라고 하였다. 충렬왕 24년에 진왕(晉王)이 사람을 보내 제사하였으며 고당왕(高唐王)도 사람을 시켜 부의를 보내 왔다. 이 해에 충선왕(忠宣王)이 선위 받아 왕위에 오르자 인명(仁明) 태후(太后)로 추존하였다
● 충선왕 후(後) 원년(1308)
3월에 충선왕이 명령을 전달하기를 “전 농사(典農司)에서 거두어들인 여러 절(寺)의 토지 및 문서가 있는 공신전의 도조(田租)는 모두 되돌려 주게 하라. 기타의 도조는 용문창(龍門倉-개성 선의문 밖에 있던 창고)에 옮겨 넣게 하고 쌀 3백과 백 섬을 대장도감(大藏都監-대장경의 필사를 위한 임시적 관악)과 선원사(禪源社)에 나누어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 충선왕 경술 2년(1310)
6월 임자일에 원나라에서 환자 방신우(方臣祐)를 우리 나라에 보내 금자(金字)로 대장경을 필사하는 것을 감독하게 하고 황태후가 금박(金薄) 60여 정(錠)을 보내었다.
11월에 재추(宰樞)들이 여러 도(道)들에 채방사(採訪使)를 보내 세법(稅法)을 개정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어떤 자가 말하기를 “지금 군, 현들에서 논과 밭들이 모조리 개간되었으니 마땅히 땅을 재어 세납을 늘리어 국가 비용을 충족시키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였더니 재추들은 자기들이 차지한 전원(田園)이 국가에 회수될까 두려워하여서 그 일이 드디어 중지되고 말았다.
후(後) 원년 3월에 (충선)왕이 명령을 전달하기를 “전 농사(典農司)에서 거두어들인 여러 절(寺)의 토지 및 문서가 있는 공신전의 도조(田租)는 모두 되돌려 주게 하라. 기타의 도조는 용문창(龍門倉-개성 선의문 밖에 있던 창고)에 옮겨 넣게 하고 쌀 3백과 백 섬을 대장도감(大藏都監-대장경의 필사를 위한 임시적 관악)과 선원사(禪源社)에 나누어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 충선왕 신해 3년(1311)
11월 임자일에 찬성사 권보(權溥) 등이 대장경을 가지고 원나라에 갔다.
● 충선왕 임자 4년(1312)
임자 4년(1312) 봄 정월 초하루 정유일에 왕이 원나라에 있었다. 원나라 황제와 태후가 충선왕에게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하였으나 왕이 귀국할 의사가 없어서 박경량을 시켜 당시 권세를 잡은 대신에게 말하기를 “이제 한창 농사철인데 추수기나 되면 돌아가겠다”라고 하였더니 황제가 이를 승낙하였다.
왕의 명령으로 중들을 연경궁(延慶宮)에 모아 놓고 대장경을 전경(轉)하되 1년간 계속하게 하였다.
병진일에 왕의 명령으로 양광도와 서해도의 장정 1천 명을 징발하여 연경궁 건축 공사에 보내었다.
● 충숙왕 신유 8년(1321)
5월 갑오일에 전 익성군(益城君) 홍약이 원나라 황제의 글을 가지고 와서 대장경을 쓸 종이를 요구하였다.
● 우왕 무진 14년(1388)
일본국 사신 묘파, 관서성(關西省) 탐제(探題) 원요준(源了俊)이 사람을 보내 그 지방의 토산물을 바치고 납치되었던 우리 사람 2백50 명을 돌려 보내었다. 그리고 대장경(大藏經)을 청구하였다.
● 한언공(940,태조23-1004,목종6)
한언공은 단주 사람이니 부친 한총례(韓聰禮)는 광록 소경(光祿少卿)이었다. 한언공은 성품이 명민하고 학문을 즐겼다. 광종 초에 나이 15세였는데 광문원(光文院) 서생으로 속하여 있다가 미구에 본원의 승사랑(承事郞)으로 되고 또 내승지(內承旨)로 전임되었다. 진사 시험에 응시할 것을 청원하고 수험하였으나 낙제하였으며 누차 승진되어 내의(內議) 승지(承旨) 사인(舍人)으로 되었다. 성종 때에 형(刑), 병(兵) 두관(二官)의 시랑(侍郞)으로 전임되었고 송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갔었는데 송나라에서는 한언공의 태도와 행동이 법도에 맞았으므로 금자 광록 대부(金紫光祿大夫), 검교(檢校) 병부상서, 겸 어사대부의 벼슬을 주었다.
한언공이 황제에게 대장경을 줄 것을 청하였더니 황제는 대장경 481함(函)을 주었는데 대략 2천5백 권이나 되었다. 또 어제(御製) 비장(秘藏)인 전소요련화 심륜(詮逍遙蓮花心輪)을 주었다. 귀국하자 왕은 그를 어사, 예관 시랑, 판 예빈성사(判禮賓省事)로 임명하였다.
● 임유(1119,의종3-1212,강종1)
임유(濡)는 처음에는 극인(克仁)이란 이름을 가졌으며 명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이 여러 번 승진되어 참지정사까지 지냈다. 신종 초년에 중서 시랑 평장사로 임명되고 수 태부 문하시랑평장사로 승진되었다. 강종(康宗) 원년(1212년)에 64세로 죽었는데 시호를 양숙(良淑)이라 하였다.
임유는 성질이 담박하고 인자하며 문벌과 권세를 믿고 남을 깔보는 일이 없으며 하인이나 종들에 대해서도 욕설로 꾸짖는 일이 없었다. 5대의 왕조를 섬기면서 근실하게 복무하였고 직무상 처결이 공명 정대하였다. 제고(制誥)를 맡아 본 지 16년 동안에 당시 유명한 조칙들이 모두 그의 손에 의하여 기초되었으며 네 차례나 과거 시험을 주관하였는데 그가 선출한 인재들은 모두 다 당시의 명사로 되었다. 예하면 조충(趙沖), 이규보(李奎報), 김창(金敞), 유승단(兪升旦) 같은 인사들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늘그막에 가서 불교를 독신하여 대장경을 거의 절반이나 금자로 필사하였으므로 식자들은 이것을 비난하였다.
● 이색 (1328,충숙왕15-1396,태조5)
신우 3년(1377)에 또 다시 추충, 보절 동덕, 찬화 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 칭호를 받았다. 신우는 이색을 사부(師傅)로 삼았다. 이색은 아버지 곡(穀)의 뜻에 이어 《대장경(大藏經)》을 완성하였다. 신우가 이 말을 듣고 지신사(知申事) 노숭(盧崇)을 보내 향을 선사(降香)하였다. 8년에 판삼사사(判三司使)로 되었으나 병을 칭탁하고 집무하지 않았다. 이듬해에 다시 한산군을 봉하였다가 이어 다시 판삼사사로 되었다. 10년에 병으로 사직하자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으로 올려 봉하였다.
이색은 신우의 사부(師傅)로 되어 몇 번이나 상을 받고 젖내 나는 그 자제들을 모두 과거에 급제시켜 국가 요직에 배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우가 포학한 짓을 함부로 하여 무고한 사람을 살육해도 이색은 그 잘못을 바로잡지 않았고 신우가 분별없이 군대를 동원해 명나라의 국경을 침범함으로써 우리 나라에 큰 화근을 조성한데 대하여 이색은 또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라에서 사전(私田)으로 인하여 국고는 텅 비어지고 민생은 해를 받으며 소송은 크게 일어나서 풍속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토지법을 개혁하자는 의논이 있었을 때 이색은 수상으로서 완강히 반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종학으로 하여금 외부에 선포시켜 귀족 대가들의 원망과 비방의 발단을 터놓았습니다.
이림이 한없이 탐욕스럽고 비열함은 온나라 사람이 아는 바인데 이색은 또 왕의 외척과 결탁해 자기의 보전을 도모하려고 이림을 추천해 자기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또 유생(儒生)의 영수로서 불교를 숭상해 《대장경(大藏經)》을 인쇄 발간하였습니다. 이때 온나라에서 앞을 다투어 그를 본받게 되어 풍속에 나쁜 영향을 주었는데 그는 도리어 자제들을 시켜 남에게 말하기를 ‘아버지의 본의가 아니요 할아버지 이곡(李穀)의 뜻을 따랐을 따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아버지를 이단(異端)으로 몰아넣고도 불쌍히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또 신창을 명나라 조정에 예빙하게 하고 신우를 맞어다 왕으로 세우려던 계책이 성취되지 못하자 이숭인이 탄핵당한 것을 빙자하고 장단(長端)으로 돌아가서 추세를 관망하다가 전하가 즉위하자 뻔뻔스럽게 나와서 판 문하부사의 관직을 받고 백관의 우두머리에 서서 전혀 부끄러운 기색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학문을 악용하며 세속에 아첨하고 허식과 매명을 일삼았습니다. 해당 기관에 회부해 이색의 부자와 조민수를 단죄해 후세에 남의 신하로 되어서 충성치 못한 자를 경계하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 방신우(?-1343,충혜왕4)
방신우의 아명은 소공(小公)이요 상주(尙州) 중모(中牟) 사람이다. 충렬왕 때 궁중에서 심부름하다가 안평 공주(安平公主)를 따라 원나라로 가서 유성 황후(裕聖皇后)를 만나 보았던바 그것이 인연으로 되어 그를 머물러 두고 망고대(忙古台)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원나라 선종(宣宗)이 그에게 장알승(掌謁丞) 벼슬을 주고 또 천부대경(泉府大卿)을 더 가첨하여 주었으며 무종(武宗) 때는 수원 황태후(壽元皇太后)를 섬기였다. 그 후 그는 흥성궁(興聖宮) 원사에서 장작원(將作院) 원사(院使)로 되었다가 평장정사(平章政事)로 승진하였다.
원나라가 방신우를 보내 그의 감독 하에 금자(金字) 대장경(大藏經)을 만들었다. 이때 황태후는 금박(金薄) 60여 정(錠)을 보냈으며 방신우는 중과 속인(俗人) 3백 명을 모아서 불경을 베꼈다. 개성 판관(開城判官) 이광시(李光時)는 자기 딸을 방신우의 처로 주었다. 그 후 방신우가 대장경을 신효사(神孝寺)에 바치고 황태후의 수복을 기도하였을 때 해당 기관에 지시하여 죄수를 석방케 하였으나 그 기관들은 방신우의 사적 옹간이라는 것을 알고 석방시키려 하지 않았다
● 염승익
염승익의 처음 이름은 유직(惟直)이며 정당문학(政堂文學) 염신약(廉信若)의 후손이다. 일찍이 나쁜 병을 얻어서 신불(神佛)의 축문(祝文)을 외우며 손바닥을 뚫어서 새끼를 꿰는 등의 고행(苦行)으로 정성을 들여서 병이 나았다. 그 후부터는 타인의 병 치료하는 기도를 일삼고 다니다가 이지저의 추천으로 충렬왕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염승익에게 온 나라의 권세가 집중되어 대간(臺諫)들도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 일찍이 기인(其人) 50명을 사적으로 부려서 큰집을 지었는데 공주의 견책이 두려워서 대장경(大藏經)을 필사하는 장소로 하겠다고 청원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 박승중(인종,1122-1146)
박승중의 자는 자천(子千)이요 나주 무안(羅州務安)현 사람이다. 그 증조 박섬(朴暹)은 현종(顯宗)을 섬겨서 남행 호종 공신(南幸扈從功臣)으로 되었다.
하루는 대장경(大藏經)을 안치하고 행향(行香)하면서 홍관(洪瓘), 이숙(李璹)과 함께 시신반(侍臣班)에서 웃고 이야기하는 소리가 임금이 있는 곳까지 들렸으므로 대관(臺官)의 규탄을 받고 면직되었다가 이어 한림학사 승지(承旨)로 임명되었다.
2. 검색어 "장경"으로 검색된 자료
● 현종 기사 20년(1029)
여름 4월 경자일에 장경 도량(藏經道場)을 회경전(會慶殿)에 설치하고 구정(毬庭)에서 1만 명의 중들에게 음식을 먹였다.
● 정종 신사 7년(1041)
여름 4월 계사일에 장경 도량(藏經道場)을 회경전(會慶殿)에 설치하였다. 원래 장경 도량은 매년 춘추로 두 차례씩 설치하게 되어 있는바 봄에는 6일이요 가을에는 7일이었다
● 선종 신미 8년(1091)
윤 8월 갑자일에 회응전(會應殿)에 장경(藏經) 도량을 베풀고 왕이 친히 분향을 한 다음 시를 지어 부처를 신봉한다는 뜻을 표시하였다.
● 선종 계유 10년(1093)
여름 4월 계축일에 6일간에 걸쳐 장경 도량을 회경전에 베풀고 왕이 친히 찬삼보시(贊三寶詩)를 지었다.
● 숙종 기묘 4년(1099)
여름 4월 정해일에 요나라에서 영주(寧州) 관내 관찰사 소랑(蕭朗)을 횡선사(橫宣使)로 파견하고 겸하여 장경(藏經)을 보내왔다.
● 숙종 신사 6년(1101)
3월 병자일에 회경전(會慶殿)에서 장경(藏經) 도량을 베풀고 왕이 친히 경찬시(慶讚詩)를 지었다.
● 예종 무술 13년(1118)
9월 기유일에 장경 도량을 회경전에 베풀고 왕이 친히 분향을 하였다.
●인종 임자 10년(1132)
여름 4월 임신일에 천성전(天成殿)에서 장경(藏經) 도량을 베풀었다.
● 의종 병자 10년(1156)
겨울 10월 을해일에 선경전에서 장경(藏經) 도량을 베풀었다. 임오일에 내전(內殿)에서 중 5백 명에게 음식을 먹였다.
● 명종 무술 8년 (1178)
9월 계미일에 명인전(明仁殿)에 장경 도량을 베풀어 7일간 계속하였다
● 명종 계묘 13년(1183)
2월 기미일에 명인전(明仁殿)에 장경(藏經) 도량을 베풀고 왕이 분향을 하였으며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 문극겸(文克謙)에게 주고 화답시를 지어 바치게 하였다.
● 명종 을사 15년(1185)
3월 초하루 갑신일에 왕이 영통사(靈通寺)에 갔다. 정미일에 왕이 친히 명인전(明仁殿)에 장경(藏經) 도량을 베풀었다.
● 명종 을사 15년(1185)
9월 丙申일에 명인전(明仁殿)에 장경(藏經) 도량을 베풀었다.
● 고종 병자 3년(1216)
3월 무진일에 왕이 처음으로 건성사(乾聖寺)에 가서 제석(帝釋)에게 재를 울렸으며 또 선경전(宣慶殿)에서 장경회(藏經會)를 열었다.
● 원종 경오 11년(1270)
9월 계해일에 궁궐에서 장경(藏經) 도량을 베풀었다. 왕이 비로소 법가(法駕)를 타고 갔으나 따라가는 인원들은 아주 적었고 악관(樂官)도 아직 없었으며 문무의 관원들 중에 걸어가는 자들이 많았다
● 충렬왕 을해 원년(1275)
3월 을미일에 왕이 친히 장경(藏經) 도량을 베풀었다.
● 충렬왕 병자 2년(1276)
2월 경인일에 왕이 강안전에 가서 장경 도량을 베풀었다.
● 충렬왕 병자 2년(1276)
9월 임진일에 왕과 공주가 왕륜사에 갔다. 갑오일에 왕이 궁궐로 가서 장경 도량을 베풀었다.
● 충렬왕 경진 6년(1280)
3월 병진일에 왕이 본 궁궐에 가서 장경 도량을 베풀었다. 왕이 궁전 뒤에 진달래꽃이 만발한 것을 보고 사운시(四韻詩) 1편을 짓고 사신(詞臣) 백문절(白文節), 반부(潘阜), 곽여(郭預), 민지 등 18명으로 하여금 화답하는 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문절 등이 왕에게 진언하여 심양의 죄를 용서해 줄 것을 청하였더니 왕이 즉시 명령하여 석방케 하였으며 얼마 있다가 또 척, 응 등도 석방케 하였다.
● 충렬왕 병술 12년(1286)
3월 경인일에 왕이 장경 도량에서 행향(行香)하였다.
● 충렬왕 경인 16년(1290)
9월 계축일에 위위부윤(衛尉府尹) 민훤(閔萱)을 전라도 지휘사로, 판 사재시사(判司宰寺事) 엄수안(嚴守安)을 충청도 지휘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장경(藏經)을 보수(補修)하였다
● 충렬왕 을미 21년(1295)
윤 4월 기유일에 원나라에서 왕경(王敬), 탑실불화(塔失不花)로 하여금 향폐(香幣)를 가지고 와서 장경(藏經)을 읽게(轉經)하였다. 왕경은 우리 나라의 종성(宗姓)의 출신이다.
● 충렬왕 정유 23년(1297)
6월 임자일에 원나라에서 화로홀손(火魯忽孫)을 보내 공주의 사망을 조문(弔問)하였고 태후가 부조, 저폐(楮幣)를 보내고 장경을 전경(轉經)하여 공주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 충렬왕 기해 25년(1299)
기해 25년(1299) 봄 정월 임진일에 태백성(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왕이 외원으로 가서 장경 도량을 베풀었다.
● 충렬왕 경자 26년(1300)
12월 갑오일에 원나라에서 백안 홀독 불화(伯顔忽篤不花)를 보내 향(香) 15근, 필단(匹段) 30필, 견(絹) 3백 필, 초 8백 64 정(錠)을 가지고 와서 장경(藏經)을 전경(轉經)하게 하였다.
기해일에 왕이 백안 홀독 불화와 더불어 묘련사에 가서 장경을 전경하였다.
경자일에 왕이 자운사(慈雲寺)에 가서 장경을 전경하였다.
● 충렬왕 신축 27년(1301)
신축 27년(1301) 봄 정월 갑진일에 왕이 원나라 사신과 더불어 흥왕사에 가서 장경(藏經)을 전경(轉經)하였다.
● 충렬왕 계묘 29년(1303)
2월 정해일에 원나라에서 겁리마 적월아 홀도(怯里馬赤月兒忽都)에게 관소(官素) 15표리(表裏)와 점경이아견 3백 필, 황향(黃香) 15근, 초 6백 10정(錠) 25냥(兩)을 보내 장경(藏經)을 전경하게 하였다.
3월 갑오일에 백관이 의례를 갖추고 어향(御香)을 받아 가지고 장경을 전경하였다
● 충렬왕 을사 31년(1305)
여름 4월 계미일에 원나라에서 돌렬(突烈)을 보내 장경을 전경하였다.
● 충선왕 신해 3년(1311)
3월 계묘일에 본 대궐에 장경(藏經) 도량을 베풀었는바 옛 규례에는 봄(春)에 6일간, 가을(秋)에 7일간 행사하던 것을 이제부터 왕의 명령으로 모두 10일간 행사하기로 개정하였다
● 충목왕 정해 3년(1347)
9월 정미일에 왕이 친히 강안전에 장경(藏經) 도량을 베풀었다. 정묘일에 민천사에서 중 4천 1백 명에게 음식을 먹였다.
● 유공권
유택은 과거에 급제한 후 벼슬이 상서 우복야 한림학사 승지에 이르렀었다. 고종(高宗)이 일찍이 선경전(宣慶殿)에서 장경회(藏經會)를 베풀었는데 유택이 지은 소문(疏)에 이르기를
“전하가 아무리 독실히 근면한 생각을 가지고서 혹이나 태만하고 안일할세라 노력을 하고 있으나 불행히 다난한 때를 당하였는지라 하부를 능히 제어하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간의대부 박현규(諫議大夫朴玄圭)가 말하기를 “이른바 ‘능히 제어하지 못한다’는 대상자는 틀림없이 진강공(晋康公)을 의미한 문구이다”라고 하고 사람을 시켜 최충헌(즉 진강공)에게 통보하였으므로 최충헌이 즉시로 유택을 불러서 질문한즉 유택은 태연 자약한 태도로 크게 웃었다. 이것은 박현규가 유택과 숙감(宿憾)이 있었으므로 이 일로써 최충헌을 경동시킨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유택의 아들은 유경(璥)인데 따로 전기가 있다.
● 경대승
경대승은 청주(淸州) 사람이니 그의 부친 경 진(珍)은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벼슬을 지냈다. 경대승은 힘이 절등하게 세었다. 일찍이 큰 뜻을 품고 살림살이는 돌보지 않았다. 나이 15세여 문음(門蔭)으로 교위(校尉)에 보용되었고 여러 번 승직되어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부친 경진은 본래 탐욕스러워서 타인의 토지를 많이 강탈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 경대승은 강탈한 토지 문건을 선군(選軍)에 바치고 한 뙈기의 땅도 남기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의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명종 8년에 청주 사람들이 청주 사람으로서 서울에 적(籍)을 두고 살다가 청주로 퇴거하는 사람들과의 사이가 좋지 못하여 서울서 살던 사람들을 거의 다 잡아 죽였다. 그리하여 서울에 남아 있는 그들의 일당들이 이 소문을 듣고 복수하기 위하여 왕의 지시를 위조하고 결사대원을 모집하여 청주로 내려 보냈다. 왕이 장군 한경뢰(韓慶賴) 등을 뒤쫓아 보내 제지하려 하였으나 시간이 불급하여 그들이 청주 사람들과 싸워 이기지 못하고 백여 명이 죽었다. 그때에 경대승이 대장군 박순필(朴純弼)과 함께 청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되었었는데 이것을 제지하지 못하였다. 하여 면직되었으며 부사 조온서(趙溫舒)도 파면 되었다. 경대승 온 일찍이 정중부의 독판치는 행동을 분히 여겨 그를 죽이려 생각하였으나 그 일이 지극히 크고 간난하기 때문에 참고 발동하지 않았었다. 마침 그때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공주(公主)에게 장가 들려는 욕망을 음모하고 있었으므로 왕의 걱정거리로 되었다. 이에 경대승이 정중부를 죽일 결심은 치열하게 가졌으나 정중부의 사위 송유인(宋有仁)의 존재가 두려워서 틈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자 송유인이 문극겸(文克謙)과 한문준(韓文俊)을 내쫓고 난 후로 몹시 인심을 잃었으며 조정 관리들도 모두 그를 눈 흘겨보게 되었다. 견룡 허승(牽龍許升)은 용역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복종하게 되었으며 정균도 그를 사랑하였다. 그런데 허승과 대정 김광립(大正金光立), 김준익(俊翼) 등은 모두 경대승과도 사이가 좋았다. 9년에 경대승이 허승에게 말하기를
“내가 흉적들을 처치하려는데 네가 내 말을 들으면 성사가 되겠다.”라고 하니 허승이 승낙하였다. 경대승이 말하기를
“장경회(藏經會)가 끝나는 날 밤에 야간 숙위(宿衛)하는 사람들이 필시 피곤하여 잠들 것이니 내가 결사대원 30여 명을 화의문(和義門) 밖에 매복하여 두었다가 네가 먼저 안에서 정균을 죽이고 휘파람을 불어 신호하면 내가 매복조를 발동시켜 호응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밤 4경(四鼓)에 허승이 정균의 숙직하는 집으로 들어가 그를 죽이고 휘파람으로 신호하니 경대승이 경사대원을 인솔하고 왕궁담을 넘어 들어가서 대장군(大將軍) 이경백(李景伯)과 지유 문공려(文公呂)를 죽이고 사람을 보는 대로 죽이니 궁중이 소란하여지며 무기로써 서로 싸우게 되어 왕이 몹시 놀랐다. 경대승이 왕의 침전 밖에 이르려 큰 소리로 외치기를다음 페이지
● 안유발
안유발은 명종(明宗) 때에 벼슬이 여러 번 올라 시어사(侍御史)로 되었다. 장경 도량(藏經道場) 때에 참지정사 송유인(參知政事宋有仁)이 행향(行香)하였는데 지후 최영유(祗侯崔永濡)가 찬인(贊引-안내자)으로서 행사에 늦게 왔었다. 대감(臺監) 어사(御史)가 그를 탄핵하려 하니 최영유가 안유발에게 요청하기를 “내가 이미 참정의 양해를 얻었으니 그대는 왕에게 아뢰지 말라”고 하였다. 안유발이 말하기를 “나로서는 참정의 의향을 알 수 없으나 일은 왕에게 아뢰어야 한다. 그러나 그대가 왕에게 아뢰어 무사하게 해버리면 그만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최영유가 왕의 아우인 중 충희(沖曦)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고하니 왕이 말하기를 “이것은 대단치 않은 과오이니 용서해도 좋다. 그러나 참정이 노한다면 딱한 일이니 여러 참정들에게 말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후에 안유발은 이부 낭중(吏部郞中)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이부에서 관리를 임명할 때는 임관 후보자 명단에 점을 찍어서 왕에게 보고하고 이것을 점주(點奏)라고 불렀다. 임관된 자들은 반드시 은(白金) 몇 근(斤) 씩을 뇌물로 바치는 습관이 있었다. 그리하여 판사(判事) 이하 영사(令史)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상례로 여기고 서로 다투어 점을 찍고는 “아무개 아무개는 모두 내가 추천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안유발만은 엄정한 태도를 취하고 점(點)을 찍지 않으며 “나는 아는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그의 청백에 탄복하였다. 벼슬이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이르러서 죽었다.
● 민제
민제의 자는 중회(仲晦)니 성질이 온화, 인자, 청백, 소박하여 화려하고 사치한 것을 즐기지 않았고 글읽기를 좋아하였으며 한 번 본 글은 잊지 않았고 특히 역사에 능하였다.
공민왕 때 나이 19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국자 직학(國子直學)으로 피임되었다가 춘추 검열(春秋檢閱)로 선발되고 전리 정랑(典理正郞), 지제교(知製敎), 성균 사예(成均司藝), 전교 부령(典校副令) 등을 역임하였다. 신우 때에 판전 의사(判典儀事)로 되었다가 지 춘주사(知春州事)로 되어 외직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은혜로운 정치를 하고 소환되어 판소부 사사(判少府寺事)로 되었다가 다시 전공, 예의 판서(典工禮儀判書)로 전임되었다.
신창 때에 개성윤(開城尹), 상의 밀직 사사(商議密直司事)로 임명되고 공양왕 원년에 예문관제학(藝文館 提學)이 되었다가 첨서 밀직 사사(僉書密直司事),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전직하였다.
민제는 소시로부터 예의(禮儀)를 잘 알기로 알려져 있었으므로 추부(樞府)에 올라 가서도 언제나 예조(禮曹)를 겸임하였다. 또 잡된 종교와 미신을 배격하였다. 화공을 시켜 “하인이 막대기를 들고 중치는 그림과 개를 시켜 중 무당을 쫓아내는 형상도”를 그리라 하여 벽에다 붙여놓고 보고 있었다. 어느날 왕이 경연(經筵)에 가서 민제에게 묻기를 “들으니 예조(禮曹)에서 복색을 제안하고 불교 행사를 줄인다 하니 그러한가”라고 하였다. 민제가 대답하기를“복색은 외국 물건을 금하려는 것이요 불교 행사는 봄과 가을의 장경(藏經) 모임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만둬야 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외국 물건을 숭상하지 않는 것은 좋은 일이니 나 역시 면포를 입겠거니와 불교 행사는 선왕들이 실시해 온 것인데 내 어찌 함부로 그만둘 수 있느냐?”라고 하였다. 다시 개성윤(開城尹)으로 임명되었다가 한양윤(漢陽尹)으로 나갔다. 이로부터의 기사는 이조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