西餘 閔 泳 珪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박사의 글이다. 그는 고려대장경이 실지로 조성된 지점을 남해도와 그 대안(對岸) 진양군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대장경판의 수종구성으로 볼 때 이 학설은 상당한 근거가 있다고 생각된다.
고려대장경신탐(高麗大藏經新探)
- 바로 잡아야 할, 그리고 새로운 몇가지 사실들 -
(1)
삼국유사 말고도, 일연 스님에게 또 하나의 저술, 중편조동오위(重篇曺洞五位) 3권이 있어서, 우리는 이미 그것을 상실한지 오래지만, 다행히 316년전 일본이 그것을 복간하고 일본조동종 중요한 전적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기까지 외로운 추적을 계속하기는 나로서 극히 근자 일에 속한다. 오늘에 살아남게 된 그 고마움을 이를 진데 이루 표현키 어려울 만큼이 지만, 또한 일본불교의 한계를 여기서 발견한 것 같은 무연한 느낌을 금하지 못한다. 그 진정한 저자가 누구이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또 무엇을 거기서 호소하려 했었던가에 대하여 끝내 그것을 밝혀 주려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연이 경상도 남해도에 머물기는 1249년에서 1291년까지, 나이로 쳐서 마흔 셋에서 쉰 여덟에 이르기까지 12년 동안이다. 일연이 그 서문(1290)에서 이르기를 당시 고려불교의 됨됨을 개탄한 나머지 가까스로 틈을 얻어 이 책을 지었노라 장소(長嘯)한다. 남해도를 뒤로하고 출육한지 8년만인 1268년, 그러니까 일연의 나이 예순 셋에 고려대장경 재조의 실질적 대단원을 의미하는 대장낙성회(大藏落成會)를 국가 차원으로 일으키고 일연은 불교계를 대표하여 그 주맹자(主盟者)로 추대된다.
일연에겐 또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3권의 저서가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감안할 때, 일연과 대장경재조와의 관계가 결코 심상한 것이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모처럼 조동오위의 중편에 뜻을 품고 있으면서 정림사에 머무른지 7년 동안, 무엇에 쫓기었기에 {-心須改正, 依世多難, 未修素志} 그 토록 그를 바쁘게 한 까닭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정림사는 분사 도감과 함께 정안(鄭晏)이 남해도에서 경영하던 유적의 하나였었다.
고려대장경이 재조된 시기가 몽골군에게 쫓기던 강화도 서울 시대였으므로 응당 그것은 강화도이어야 한다고 대답한다면, 자료가 구비되지 못한 탓도 있었겠지만, 그저 천진난만하기만 하다. 중편조동오위 해제(1984)를 집필하면서 나는 고려대장경이 실지로 조성된 지점을 남해도와 그 반대편 해안에 있는 진양군으로 추정했었다. 몇 가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첫째로 진양군과 하동 남해도는 당시 독재 권문세가이던 최이(崔怡)와 그 처남이자 최씨 다음으로 권문세가이던 정안의 선대로부터 식읍지 였었다는 데에 있다. 사재를 기울여가면서 대장도감과 분사도감을 경영했다고 하는 그 {사재}라는 것을 다름 아닌, 중세적인 의미의 식읍에서 찾아야 한다. 백과에 걸쳐 자급자족이 가능했을 뿐더러 무리스런 계획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남해도와 그 대안 진양군은 지리적으로 천혜의 전술적 요지를 형성하고 있을 뿐더러 천원자원 등 제반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경판의 자재가 되어 줄 후박나무는 지리산과 거제도, 완도, 제주도 등 남해안 일대에 자생하는 천연자원이다. 그들이 벌채하여 한 곳으로 운반하는데 지리산의 경우 섬진강이 있고, 남해안 도서의 경우 오늘날 한려수도로 불리 우는 바닷길이 있다. 경판을 다지는 데 독역관염장별감(督役官鹽場別監)이라는 것이 있어서 일정 기간 바닷물에 담그고 그것을 반복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내가 직접 남해도 관음포에서 경험한 이야기지만, 바닷가에 앉아 한 팔을 길게 빼들 때 철렁거리는 바닷물이 거기에 와 닿을 것 같다. 강화도처럼 간만의 차가 심해서 십리도 넘게 노출되는 갯벌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조건들이다.
미상불 강화도의 경우 북으로 승천포, 동으로 갑곶이 나루가 가로질러서 육지와 격리시키고 몽골군의 침입을 막는 구실을 했다 하지만, 이쪽에서 부르면 저쪽에서 대답이 오는 거리다. 쌍방의 대립이 고조될 때마다 승천포와 갑곶이 건너편엔 몽골군이 진을 치고 기고(旗鼓)와 폭성으로 천지를 진동시키면서 결전을 재촉해 온다 하자. 그러한 긴박한 상황에서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완성도가 높은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졌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시각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그 끝에 일연의 저술과 호흡을 맞춰가면서 구상한 것이 남해도 제작설 이었다. 구상은 어디까지나 추리로 엮어졌을 뿐, 문헌과 증거가 제시된 것은 아니었다.
제시되지 못했던 증표를 실물로써 보여준 이가 바로 4년 전 1992년에 {대장도감의 판각성격과 선원사 문제}라는 논문을 발표한 박상국(朴商國)씨다. 6,568권 팔만대장경의 한장 한장을 넘겨가면서 가장자리에 보일 듯 말 듯 가는 글자로 새겨놓은 각자공의 이름들을 또 하나 하나 점검해가면서 몇 백명이 될지 모를 그 이름들을 다시 몇 개 범주로 나누어 정리하고 다음과 같은 놀라운 사실들을 밝혀낸 것이다. 대장도감과 분사도감 서로 소속이 다른 도감의 하나에서 동원된 각자공과 동일한 이름들이 상대방에 겹쳐 나오는 경우. 동일한 경문일지라도 대장도감과 분사도감이 서로 권 질 을 나누어 작업한 경우 등등 수없이 많은 이러한 사례들은 고려대장경의 재조가 남해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음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내용들이다.
박씨는 또 분사도감의 출현이 1243(癸卯)년으로 시작됨을 밝혔고, 그리고 분사도감이 가세한 1243년과 1244(甲辰)년, 그리고 1245(乙巳)년에 이르는 3년간에 일군 작업량이 실로 3,816권에 이른다고 밝혔다. 대장경 전체 권 질 6,265권의 절반이 넘는 분량이다.
(2)
박씨의 고집스런 노력은 해인사 경판 연구사에서 길이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더욱 어려운 과업들이 그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좋은 예의 하나가 정안과 분사도감과의 관계에서 오는 문제다. 박씨의 보고에 따를 때, 분사도감의 등장이 1243년부터이므로 정안의 동참도 당연히 이때로부터 시작된 것처럼 치부될지 모르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1236년, 그러니까 고려대장경 재조사업이 첫발을 내 딛던 바로 그 전 해 12月 15日, 정안이 묘법연화경 일곱권을 간행하면서 기원한 2장 23행의 내용은 읽는 우리를 감동시킨다. 몽골군이 침노하던 해에 죽어간 누이도 누이려니와, 아내를 잃고 정국이 소란한 중에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던 자형 최이에게 부처의 가호가 있기를 비는 안타까운 심정이 기원문의 행간에 배어 있다. 그보다 또 2년 전 1234년에 송광사 2세 사주 혜심(慧諶)이 입적했을 때, 3세 사주 몽여(夢如)의 간청으로 정안은 선사(先師)의 행장을 작성하여 최이에게 보내고 이규보로 하여금 왕명으로 진각국사비명(眞覺國師碑銘)을 짓게 하는 등, 정안은 이미 하동과 남해안 일대 총림 간에 엄연한 존재가 되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박씨 보고에 따를 때, 대장경 재조 사업의 첫해 1237년에 117이 제판 된 것으로 되어 나오나, 앞에서 말한 바 정안의 묘법연화경 7권의 간행과의 사이에 길어서 수개월의 시간적 여유도 자아내기 어렵다. 정안에 의해서 만반의 준비가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고 밖에 달리 해석할 도리가 없어 보인다.
이 때 대장경의 재조라는 국가차원의 사업과 정안과의 관계가 결코 소홀하게 보아 넘길 수 없는, 오히려 추진자의 위치에 세워야 할 여러 가지 이유를 나는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자형 최이로 하여금 건곤일척, 대장경 재조라는 엄청난 사업으로 국책을 돌려서 확신을 심어준 이가 바로 이 정안이 아니었던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3)
위에서 나는 1236년 당시 최이를 가리켜 {우왕좌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여기엔 상당한 이유가 있다. 고려 정부를 강화도로 천도한 것은 어디까지나 돌연하게 출현한 몽골군의 침략으로부터 일시적이나마 거리를 두기 위한 전술적 이동에 불과하다. 최이를 정점으로 한 최씨 정권에겐 오랜 세월 언젠가 한 번은 자웅을 결판내기 위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기다리는 적수가 있다. 수천 수만의 승도들이 순간적으로 군대처럼 기동화 할 수 있는 불교사찰세력이 그것이다.
숙명적으로 두 세력은 그 초기로부터 앙숙이 되어 왔다. 그 절정을 기록한 사건이 고종 4년(1217), 때마침 두만강 유역 여진족의 금합세력인 포선만노군(蒲鮮滿奴軍)이 대거 춘천과 원주지방으로 쳐들어와 고려를 괴롭히고 있을 때, 일어났다. 고려사에서는 그들을 거란병(契丹兵)으로 기록한다. 거란병을 가장한 승병(僧兵)들이 충헌군을 위협해 왔다. 최충헌은 도성 4대문을 굳게 닫고, 성안의 승도들을 몰살하는 작전으로 나섰다. 고려사는 이 때 도살당한 승려의 수를 {팔백이 넘게}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틀 동안의 참극이었다. 비가 억수로 퍼붓는 여름날이었다.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흘러내린 피가 내를 이뤘다.
당장 최이가 정면해서 싸워야 할 대상은 물론 몽골군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이 후방에 도사리고 있음을 최이는 한시도 방심하지 못한다. 설마 한들 적군이 쳐들어 왔는데 아무리 앙숙인들 빈집에 도둑 들까 생각한다면, 나는 또 한 번 여기서 천진난만이라는 용어를 되풀이해야 한다. 그만한 반전은 이 때 무인사회의 살아남기 전쟁에서 병가상사에 속하는 생리였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나는 이미 거란병을 가장한 승병의 경우를 예로 들었거니와, 또 하나의 예를 다음에 들어서 그것을 확인코자 한다. 뒷날 최이가 그 만년에 이르러 진작 출가시켜 산사로 쫓아보낸 두 아들, 만종(萬宗)과 만전(萬全)을 다시금 중앙으로 불러들여야 할 사단이 벌어졌다. 진양 단석사, 능주 쌍봉사 중이 된 만종과 만전이 지방 무뢰승(無賴僧)들을 모아들여 무리를 이루고 몽골군 행세를 하면서 농민의 생계를 농담 겁탈하는 행패가 날로 심해져간 것이다. 형부상서 박훤(朴暄)이 최이에게 대책을 강구하는 진언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저들을 저대로 놓아두었다가 몽골군이 또다시 급습해 올 때 서로 연계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최이에게 하늘이 내린 복음은 대구 팔공산에서 날아 들어왔다. 부인사에 봉안한 대장경판이 몽골군이 한 번 지나가면서 깡그리 불태워버렸다는 것이다. 전화위복의 묘체(妙諦)를 이때 최이가 번득이지 않았을 리 없다. 불교계의 원한을 대장경 재조 라는 국가차원의 성업으로 돌리면 된다. 실로 그것은 뒤를 돌아보는 불안을 해소하고 국론통일을 기하기 위한 절대절명의 고등 정략에서 나온 것임을 우리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름을 드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만. 일본 동경대학 池內宏교수에게 {高麗の大藏經}(1924)이라는 논문(205면)이 있어서 이 방면 연구에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의 하나로 꼽힌다. 그 제1장에 다음과 같은 서술이 나온다. {몽골의 침입 에 허덕이면서 국방상 아무런 능력도 보여줌이 없이 고려 임금과 신하들은 종교상의 미신이 그렇게 만든 것} 운운한다. 당장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미신만을 믿고, 몽골군을 물리치려 한 고려 당사자들을 사뭇 연민에 찬 눈초리로 바라본다. 참으로 연민을 받아야 할 사람은 이 경우에 있어 池內씨 자신이다. 池內씨를 거명하는 실례는 내 본의가 아니다.
(4)
1249년 11월에 오랜 시름 끝에 최이가 죽는다. 이 해는 또한 일연이 남해 정림사의 새 주지로 취임하는 해이기도 하다. 최이의 죽음에 임박하여 정안이 상경할 필요가 있었다면 일연의 정림사 주지 취임은 정안의 남해도에서의 직무를 대행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또 혹1243 년에서 1245년까지 각판의 작업량이 급상승해 있음을 감안할 때, 그것을 서두를 필요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었다면, 완성된 경판을 하루빨리 강화도로 해상운송해야 하는 막중한 업무가 뒤따르고, 그것 역시 정안이 책임지고 나선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할 수 있다. 최이의 권좌는 그의 아들 항(沆, 萬全이 改名)에게 계승된다.
1251년 정월, 정안이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종2품직)로 제수된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고종왕이 서문밖 대장경 판당에 나아가 백관과 더불어 공이 필(功畢)했음을 고하고 행향(行香)의 의식을 치룬다. 나는 여기서 생각하거니와, 서문밖에 대장경판당을 서둘러 상량한 사실하며 행향의 의식이 모두 정안 한 사람의 주관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었던가. 강화정 부를 통틀어 처음부터 이 일에 관여해 온 이는 정안 한 사람 밖에 살아있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정안의 인망은 더욱 높아질 밖에 없다.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승진한다.
1256년, 일연이 황급하게 정림사를 작별하고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윤산 길상암(輪山 吉祥庵)으로 자리를 옮긴다. 고려사는 정안이 죽은 해를 기록하지 않았다. 다만 최항이 차차로 그 본색을 드러내어 정안을 시기한 나머지 죄목을 꾸며 백령도로 귀양보낸 다음 거기서 물에 빠트려 죽이고 만다. 아울러 그 재산을 몰수한다. 정림사도 몰수된 재산 속에 든 것이었다면, 정안이 죽은 해 와 일연이 정림사를 뜨게 된 이유가 더욱 분명해 진다.
1257년 윤 4월 최항이 폭사한다. 항의 아들 최의가 4대째로 그 자리를 계승한다.
1258년 야별초 군대의 봉기로 최의가 피살되고 가재도구 일체를 몰수당한다. 이로써 최씨 4대 정권은 완전히 지상에서 사라진다.
1259년 6월, 고종왕이 재위 46년만에 죽는다. 아들 원종(元宗)이 즉위한다.
1260년 12월, 일연이 길상암에 머무른지 5년만에 중편조동오위를 간행한다.
1261년 일연이 원종왕의 부름을 받고 상경한다. 물론 정부는 아직 강화도에 있다. 선월사(禪月寺)에 머무르고 거기서 설법을 시작한다.
1268년 여름, 왕명으로 운해사(雲海寺)에서 백여명의 고승이 모여 대장낙성회(大藏落成會)를 개최하고 일연이 그 주맹자(主盟者)로 추대되어 100일 동안 계속된다. 운해사의 위치는 아직 알 길이 없다.
(5)
경판의 정교성, 판본의 완벽성, 그리고 조판의 유구성. 해인사 팔만대장경이 갖춘 완성도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높다. 그 이전에도 그만한 것이 없었고, 그 이후로도 오늘에 이르기까지 745년이 되지만 아직 없었다. 도대체 그 높은 완성도를 어떻게해서 그 어려운 시기에 이룩할 수 있었던가.
가장 근본적이고도 가장 원초적인, 그러니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이러한 질문마저 일찌기 제기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
그러면 그것을 당면한 국가의 안위와 평강을 위한 때문이었던가. 황령이 영고(皇齡永固)하고, 백곡이 함등(百穀咸登)하고, 국왕 전하 수만세 운운은 이러한 경우 식상에 걸리도록 우리가 자주 보아오던 터이지만, 해인사의 경우에 한해서 정장의 어느 구석에서도 그러한 상투적인 수작을 발견하지 못한다.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다음의 사례에서 발견된다. 6568권을 헤아리는 매 경전 끝장에 가서 모모세고려국대장도감봉칙조조(某某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열 네 글자뿐. 이러한 경우 반드시 나타나는 것으로 되어있는 거창한 이름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만큼 방대하고 이만큼 역사적이고 그리고 또 이만큼 완성도가 높다보면, 이것은 모두 이 내가 이뤄놓은 공이외다 한껏 자랑도 할만한데 말이다. 그 주역이 과연 누구누구였으며, 어떤 계층 어떤 부류에 속하는 인물이었는지 끝내 이름을 내보이지 않고 말았다. 유일하게 알려진 이로서 수기(守其) 한사람이 있으나, 매 경전마다 그 역자나 찬자의 이름이 반드시 따르게 마련이듯이 이 경우에 있어서도 신조대 장교정별록(新雕大藏校正別錄) 30권의 찬자로서 그 이름이 필요했을 뿐, 공로를 내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또 앞에서 언급한바 각자공의 이름들이 문제가 되겠으나, 그것 역시 작업의 진행과 사무상의 정리를 위한 표지였을 것이며, 위와 같은 이유로 보아도 좋다.
해인사 팔만고려대장경은 최이와 정안 두 사람의 아름다운 인간관계가 가로 실(橫絲)이 되고, 이름 내세우기를 마다한 당대 불교계 지도인사들이 세로 실(縱絲)이 되어 짜낸 민족의 귀중한 문화유산이 되었다.
(6)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일연의 중편조동오위를 서두로 들고 나온 데엔 내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하나는 이 저술이 시간과 공간적으로 대장경판이 조판되던 그 한복판에서 책이 만들어 졌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일연이 남해도에 주류하기 10여년 동안, 당시 고려 불교계를 위하여 이 한 가지 진실만은 꼭 남겨두어야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보아온 바, 팔만고려대장경은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높은 완성도를 과시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제작한 이들의 어느 한 분도 이름을 숨기고 내세우지 않았다. 이 엄청나고도 난감한 사실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중편조동오위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얻어지는 것은 아닐까. 아득하기만 한, 그러나 이유 있는 기대를 걸어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