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 판각 성지를 아십니까?
(고려대장경 분사 남해대장도감)
남해문화원 원장 정의연
1. 서론
고려대장경은 역사상 우리 민족이 남긴 문화 유산 중 가장 위대한 가치를 가졌다고 보아지는 것 중의 하나이며, 현존 최고의 대장경 판으로서 찬란한 민족 문화사와 세계 문화 속에서, 그 가치를 더욱 높게 평가받고 있다.
문화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이유는 현존하는 고려대장경이 세계 최고의 것이며, 가장 정확한 내용을 담고 있는 대장경으로서, 고려대장경 이전에 판각된 북송대장경, 거란대장경, 고려 초판대장경 등 몇 종류가 있었으나, 다만 고려대장경만이 전체적인 내용으로 판각된 것이고, 다른 대장경에서는 볼 수 없는 상당수의 불전들을 새롭게 수록했다는 점이다.
특히 인쇄술에 있어서 우리 민족의 우수성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고려대장경판은 한 사람이 처리한 것과 같이 한 치의 소홀함이 없이 처리되어 인쇄 문화가 총집결된 결과였다고 생각된다. 또 하나 놀라운 점은 750여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판이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려 불교는 호국 불교로서, 고려대장경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불력으로 흑은 불법으로 국토를 지키겠다는 신앙이 응집된 결과로 조판된 것이다. 이것은 북방의 거란병이 침입했던 현종 2년(1011)에 왕이 외적을 격퇴키 위해 불력으로 대장경관의 조판을 발원하게 되자, 거란병이 스스로 퇴진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초판 고려대장경의 조판 사업이 시작되었다.
2. 대장경 판각과 분사남해 대장도감
초조 대장경은 성종 10년(991)에 북송대장경이 전래되어 내용과 체제의 기초로 조성되었지만 보완 작업을 계속하면서 군신 상하가 공동 발원하여 대장경을 발간하고자 한 것이 저변의 호국불사였다. 초판 대장경은 176부로서548권으로, '대반야경' 600권을 비롯하여 '화엄경' , '금강경' , '묘법 연화경'등 무려 9,000여권으로 된 대장경이었고, 보완 작업을 계속하였다. 이 초판대장경은 처음에 강화도 선원사에 보관 관리하였으나, 그 후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되어 보존하고 있던 중, 고종19년(1232)에 몽고병에 의해 아깝게도 불타 버리고 말았다. 국가 왕실이나 일반 국민에게 국가 안위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초판 대장경의 소실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결국 이를 계기로 재조 대장경 판각작업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초판 대장경 중 일부 남은 것은 일본 교토 남선사에 1,725권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속대장경은 문종의 왕자인 대각국사 의천이 송나라에 갔다 오면서 수집해 온 삼경과 요, 그리고 일본에서 수집한 것을 합하여 총 1,010부 4,740권의 방대한 자료를 독창적으로 정리하여 문종 27년(1073)에서 선종 7년(1090)까지 수집된 불경 총목록을 작성한 '신편제종교장총록'에 의해서 차례로 조조되었으나, 역시 몽고병에 의해 없어졌다. 약간 남은 것은 순천 송광사에 '대반열반경소'중 제9권과 제10권이 있고,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천태서교'와 일본의 도오다이사에 '화엄경수조연의초' 40권과 나고야 신후구사에 석마하연론 통현초에 4권이 있다.
이러한 대불사는 신봉 사상이 고려인에게 끼친 지혜요, 또한 국가를 수호하고자 했던 국민 정신의 증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초판 대장경과 속대장경은 몽고군의 침략이라는 상황속에서 고려대장경이 고종 24년(1237)부터 판각되어 고종 35년(1248)에까지 판각의 모든 작업이 완료되었다. 이때 완성된 대장경경판 수라든지 권수 등에 대해서는 그 동안 여러 견해가 제시된바 있으나, 최근 발표된 논문 통계에 의하면 총 1,733종 6,58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렇게 방대한 양의 경전 판각이 최씨 무신 정권하에 이루어졌고, 특히 최이의 집권기에 집중적으로 판각되었으며 1244년에 이르러 판각량이 급증하였다는 사실을 주목하면서 분사남해대장도감과 관련된 자료를 계속해서 언급하기로 하겠다.
남해에 분사대장도감이 있었다는 것은 고종33년(1246)부터 고종35년(1248)까지 3년에 걸쳐 판각된 부장인 종경록권27에 '분사남해대장도감'이라는 간기가 있어, 남해에 분사대장도감이 있었다고 보아지며 여기에서 고려대장경이 판각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진주목에 속한 남해는 '대장도감남해분사'를 설치하여 강화도와 남해에 대장도감이 설치되어 조조가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남해분사도감(1244-1248)의 설치는 최씨 정권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정안(?-1251)이 사재를 털어 정림사를 만들어 대장경 간행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었고, 일연을 남해 정림사로 초청하여 대장경 간행에 도움을 받았다. 일연은 가지산문에서 혜심의 선문념송을 통하여 수선사사상을 계승케 함으로 '대장도감남해분사의 경판'불사에 일연, 계몽이 협조하게되었다. 여기에서 성안에 대하여 알아보면 정안은 고려중기의 문신으로서 무신란 이후에 등장한 정세유의 손자이며, 부친은 정숙첨으로서 최이의 장인이다. 최씨 정권과 정안의 집안은 밀접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최이와는 처남매부지간이다. 어려서 문과에 급제하여 음양, 산술, 의약, 음륜에 정통했으며, 권신 최이의 수청으로 국자제주가 되었고, 고종 28년(1241)에 농지공거를 겸하였다. 최이의 정권이 날로 심해지자 화가 두려와 남해에 은거하면서 불교에 심취하여 사재를 정림사로 하면서 대장경 일부를 맡아 간행하였다. 이 때인 1249년에 일연을 정림사로 초청하여 대장경 조판에 도움을 받았다. 정안은 최이의 아들 항이 정권을 잡자 1251년 참지 정사에 올랐으나, 술자리에서 최항이 사람을 함부로 죽인다고 비방한 것이 최항에게 알려져 정안은 백령도에 유배되어 살해되었다.
3. 남해분사도감의 추정위치
남해가 최씨 무인 정권에게 전략적 요충이 될 수 있었던 요인은 인근 진주를 비롯한 하동 까지가 최씨 집안의 식읍지였다는 사실이다. 분사도감의 운영에서 재정적 부담은 상당했으리라 생각되는데 국가적 사업으로 벌여 놓았다고는 하나 앞서 말한 최씨 정권의 필요성이 더 컸던 만큼 신속한 작업의 진행을 위해서는 개인 재산이 투입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씨 정권은 그들의 식읍지에서 가장 가까운 남해도를 그 최적지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몽고군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고, 재정적 지원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두가지 점을 동시에 충족시키기로는 남해도가 가장 적합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해의 어디에 분사도감을 설치하였을까? 하는 의문점을 가지면서 지리적으로 용이하다고 보아지는 고현면 일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고현면은 신라 신문왕 10년(690)에 전야산군이 설치되면서 군의 소재지였던 곳이다. 대장경의 재료인 산벚나무 및 자작나무는 남해에도 서식되어 목재로서 충당하였을 것이고, 가까운 지리산 일대의 고지대에 풍부하게 자리고 있어 지리산에서 베어낸 나무를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내려보내면 남해 고현면 대사리 앞 관음포로 밀려들어 올 수 있었고, 제주도나 거제도, 완도 등에서 수집한 경판목재 역시 관음포구와 강진만으로 쉽게 운반할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을 충분히 갖춘 곳이다. 관음포구는 경사 지역이 아니라 평면지역으로 되어있고, 바위가 전혀 없는 진흙과 모래밭으로 형성되어 있다. 밀물과 썰물의 조수 차이가 심하므로 몇 년 동안 바닷물과 강물, 눈, 비를 맞으며 몇 년 동안 뻘 밭에 담궜다가 경판으로 사용해야 하는 특성을 살리기에 아주 적합한 장소일 것이다. 관음포구와 맞닿은 대사마을은 신라 35대 경덕대왕(742-765)때 숭전법사가 지었다는 만덕사(구전으로 전함)의 사찰은 관음포구가 끝나는 지점에 녹두산 3-4부 능선에 위치하였다고 전한다. 이곳에는 현재에도 고려 시대로 추정되는 와편, 자기편들이 발견되고있으며, 많은 양이 매장되어 있다고 추정한다. 그리고 고현면 일대의 지명 역시 불교 용어로 되어 있다. 대사, 선원, 판당, 탑동, 도마, 관음포구 등과 면 단위에 신라의 고찰인 만덕사, 선원사, 계사, 화방사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불교의 전성기에는 이 곳 주민 거의가 불교 신도였을 것으로 보아진다.
이상으로 종합하여 볼 때, 대사리를 중심으로 고현면 일대에 대장경 분사남해대장도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나, 고증할 수 있는 정확한 자료가 없어 확정할 수 없지만 지역의 특성과 여러 가지를 종합하여 볼 때, 우선 이곳에서 팔만대장경 분사남해대장도감이 있어, 그 일부를 판각한 최적지로 추정하고싶다.
4.결론
고려대장경은 인류의 보물이며, 어려움을 극복한 것과 힘을 과시한 것은 어느 누구도 인정하는 바이다. 남해에서 팔만대장경이 판각되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인 줄 안다. 지난 1994년에 불교방송 학술조사단이 국보32호인 해인사 소장 '고려팔만대장경'의 판각 장소를 찾기 위해 남해군 고현면 일대를 지표 조사를 하고, 그 결과를 종합한 '남해분사도감관련 기초조사 보고서'를 작성하여 토론회를 개최하였고, 정부 행정 기관에 보고한 바 있다. 그리고 1995년 12월 8일에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되었던 제19차 유엔경제사회문화위원회에서 국보제32호인 팔만대장경과 국보 52호인 판고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이러한 세계적인 보물을 우리가 아끼고 발굴하여 그 위대한 업적을 같이 보존하고 후대에 계승시킬 책임이 있다고 본다. 특히, 우리 남해에서 세계적인 보물이 판각되었다고 언론이나 학계에서 주장하고 있는바 우리 군민이 해야할 일은 앞으로 더욱더 세밀하고 종합적인 계획 아래 발굴하여 세계적인 문화 유산을 보존하는 일이며, 여기에는 큰 뜻이 있다고 보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