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판의 제작과 보존
경북대 명예교수 박상진

팔만대장경판(공식명칭 고려대장경판)은 760여 년 전인 고려 고종 23년(1236)부터 38년(1251)까지 16년 간에 걸쳐 제작된 81,258여장의 목판이다. 그것도 그냥 자르고 대패질한 판자가 아니라 경판 한 장에 글자가 수 백자씩 새겨져 있는 경판經板이다. 대장경판은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예술품은 아니다. 몽고와의 전쟁을 치루는 중에도 종교적인 신념하나로 온갖 정성을 쏟은 선조들의 혼을 읽어 낼 수 있는 문화유물이다. 한글,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팔만대장경은 세계 어느 문화재보다 위대하며, 한반도의 작은 나라지만 우리가 문화민족이라는 자긍심을 갖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작당시의 기록 미비로 아직도 밝히지 못한 수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문헌사적인 서지연구 이외에 다행히 고려대장경판은 경판이라는 나무로 만들어진 현품이 고스란히 보관되고 있어서 과학적으로 접근하여 비밀을 풀 수 있는 방법이 남아있다. 필자는 경판 제작에 쓰인 나무의 재질분석으로 얻은 결과를 중심으로 팔만대장경판을 소개하고자 한다.
1. 대장경이란 무엇인가?
대장경大藏經은 산스크리트어로 써진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불교가 중국에 전파되면서 한자로 번역한 불경이다.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의 삼장을 모은 것이고 ‘장이란 산스크리트어 피타카pitaka(바구니)에서 연유한 말로, 경전을 담는다는 뜻이다. 경장은 석가모니가 제자와 중생을 상대로 설파한 내용인경을 담은 바구니, 율장은 제자들이 지켜야 할 논리 조항과 공동생활에 필요한 규범인 율을 담은 바구니, 논장은 경과 율에 관해 읽기 쉽게 주석한 논을 담은 바구니라는 뜻이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은 고려 고종 때 송나라에서 만든 중국 대장경을 참조하여 만들었다.
2. 해인사 대장경판의 크기와 규모
팔만대장경판은 약 5천2백만 자의 글자가 새겨진 81,258장의 나무판이다. 글자 수는 공교롭게도 조선왕조 5백년 내내 쓰인 왕조실록의 글자 수와 거의 비슷하여 규모의 엄청남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경판 한 장에는 앞뒤로 약 640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글자를 새긴 부분과 양옆에는 인쇄할 때나 보관의 편의를 위하여 만든 마구리(손잡이)가 붙어있다. 길이는 대체로 다섯 종류로서 75cm, 73cm, 70cm짜리도 있지만 68cm 혹은 78cm가 대부분이며 너비는 24cm, 두께는 약2.8cm정도다. 컴퓨터 자판의 1.5배 정도 크기로 생각하면 된다. 무게는 3.4㎏전후다. 경판을 전부를 한꺼번에 쌓아놓는다면 백두산 높이가 넘고, 길이로 이으면 약150리에 이른다. 또 전체 무게는 약 280톤, 4톤 트럭에 싣는 다면 70대 분량이다. 부피로 계산하여서는 약 450m3에 달한다.

|
a : 글자를 새긴 각자 부분의 길이(51cm) b : 마구리를 제외한 경판 길이(64~74cm)
c : 마구리 포함한 전체 경판 길이(68~ 78cm) d : 마구리 너비(4cm)
e : 경판의 외곽부欄外 f : 경판 너비(24cm)
g : 마구리 길이(24cm) h : 마구리 두께(4cm) i : 경판 두께(2.8cm) j : 마구리
k : 경판과 마구리 고정 나무못 l : 경판과 마구리 연결 장석裝錫 |
경판에는 한 면 당 글자 수가 23행 14자이므로 총 322자이고 양면을 합치면 644자가 새겨져 있는 셈이며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전체로 볼 때는 5천2백여 만 자가 되는 셈이다. 이 숫자는 공교롭게도 조선왕조 5백년 내내 쓰인 왕조실록의 글자 수와 거의 비슷하여 규모의 엄청남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글자의 크기는 사방 1.5cm, 깊이 2mm정도로 다른 경판보다 더 깊게 파져있다.
방대한 경판은 순서는 천자문 순서에 따라 천(天)~동함(洞函)으로 우선 정리하였다. 함은 다시 권.장(卷.張)으로 나누었는데, 권(卷)이란 경의 내용을 필요에 따라 세부 분류한 것이며 장(張)은 요즈음으로 말하면 책의 쪽에 해당한다.
3. 경판 새김에 쓰인 나무
수종 |
수량(장) |
비율(%) |
산벚나무 |
135 |
64 |
돌배나무 |
32 |
15 |
거제수나무 |
18 |
9 |
층층나무 |
12 |
6 |
고로쇠나무 |
6 |
3 |
후박나무 |
5 |
2 |
사시나무 |
1 |
1 |
계 |
209 |
100 |
팔만대장경판을 만든 나무는 지금까지 자작나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필자가 2백여 장의 경판에서 극소량의 표본을 수집하여 현미경으로 분석한 결과 자작나무는 검출되지 않았다. 옛날에는 산벚나무나 자작나무를 모두 ‘화(樺)’란 같은 글자로 표기하였으므로 실제는 산벚나무 임에도 자작나무로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경판을 만든 나무는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 대부분이며 거제수나무, 층층나무, 고로쇠나무, 후박나무, 사시나무의 순서였다.
산벚나무
팔만대장경판에 쓰인 나무의 약 2/3는 산벚나무다. 전국 어디에나 자라며 비중이 0.6 정도로 너무 단단하지도 무르지도 않아 경판을 새기기에 아주 적당하다. 그 외 산벚나무를 많이 사용한 다른 이유가 있다. 나무줄기의 피목皮目이 약간 진한 적갈색을 띠고 가로로 짧게 혹은 길게 분포하여 멀리서도 다른 나무와 쉽게 구별하여 찾아낼 수 있다. 몽고군이 나라를 점령하고 있던 당시에 몰래 한 나무씩 베어 나오기에도 알맞다. 또 이른 봄에 분홍빛 꽃을 잔뜩 피우므로 멀리서도 다른 나무와 구별하여 찾아낼 수 있는 것도 선택받은 이유다.
돌배나무
두 번째로 많이 쓰인 나무는 약 14%의 돌배나무다. 거의 전국에 걸쳐 자라며 높이 10여m에 아름드리로 자라는 나무다. 산벚나무보다 구하기가 어렵고 나무의 굵기도 약간 가늘어 대장경판의 재료로 산벚나무만큼 많이 쓰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거제수나무
거제수나무는 자작나무, 사스레나무, 박달나무 및 물박달나무 등과 함께 식물학적으로는 자작나무과科 자작나무 속屬에 들어가는 나무다. 자작나무와 거제수나무는 잎의 모양은 다르지만 껍질만 보아서는 서로 비슷하다. 껍질의 색깔이 자작나무는 흰색을 자주 보지만 거제수나무는 약간 황갈색을 띠는 것도 많다. 그래서 한자로 황자작이란 뜻으로 황화수黃樺樹이라고 하며, 황단목黃檀木라고도 부른다. 분포지역은 남쪽으로 조계산, 백운산, 지리산, 가야산에서 출발하여 소백산, 두위봉, 가리왕산, 오대산, 설악산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산 밑자락부터 자리 잡은 일은 흔치 않다. 거제수나무는 표고 600m~1,000m 에 흔히 자라는 고산성 나무다.
거제수나무는 크게 자라면 높이 30m, 굵기 두 아름을 넘는다. 4월 말이나 5월 초쯤의 곡우 때가 되면 사람들은 거제수나무의 줄기에 구멍을 뚫고 파이프를 꽂아 물을 받아 마신다. 곡우물이라는 이 물을 마시면 병 없이 오래 산다고 전해지고 있다. 선조들은 여기에다 재앙을 쫓아낸다는 뜻을 하나 더 부여하여 거제수나무를 거재수去災水로 표기하기도 했다. 또 하나의 한자 이름도 혼란을 일으킨다. 거제수나무를 巨濟樹라고 쓰고 거제도에 자라는 나무로 알고 있는 경우이다. 그러나 우연히 이름이 같을 뿐 거제도와 거제수나무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아래에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팔만대장경판과 화목樺木
자작나무의 한자 이름은 화목이며 자라는 지역은 백두산 원시림을 비롯한 북한 내륙의 고산 지방, 중국의 북동부, 사할린에서 시베리아에 걸쳐 있다. 추운 곳을 좋아하는 한대 수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팔만대장경판은 자작나무로 만들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각 급 학교의 교과서는 물론 대장경 관련 대부분의 문헌에는 자작나무 제작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만약에 자작나무를 베어다 경판을 만들었다고 가정한다면, 벌채지로 생각해볼 수 있는 지역은 북한 내륙의 고산 지방이다. 벌채한 나무는 압록강이나 대동강에 뗏목을 띄워 황해로 내려와 강화도로 가져와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 역사의 상식으로는 대장경판을 새길 당시 몽고군에게 수도 개성을 비롯한 육지가 모두 점령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자작나무를 가져오려면 몽고군의 점령지역 가운데를 통과해야만 하는데 있을 수가 없다. 또한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꼭 자작나무를 가져다 새겨야 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산벚나무나 돌배나무 등 다른 나무들로도 새김에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작나무는 지리적으로 보아서도 결코 경판에 사용될 수 없는 나무임을 알 수 있으며 경판의 과학적인 분석에서도 같은 결론을 얻었다.
어째서 이런 혼란이 생겼을까?
첫째, 자작나무의 한자 표기에서 혼란이 발생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樺는 자작나무다. 그러나 옛 문헌의 樺는 자작나무 종류일 경우도 있고 벚나무 종류일 경우도 있다. 한 마디로 선조들은 자작나무와 벚나무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같은 樺로 표현한 경우가 많았다. 이유는 두 나무의 껍질이 종이처럼 얇게 벗겨지는 특징을 살려 활을 만들거나 나무그릇의 바깥을 매끄럽게 하는 데 사용하는 등 같은 쓰임새를 가졌기 때문이다.
두 번째의 추정은 거제목巨濟木이라는 거제도에서 생산된 나무란 의미가 거제수나무로 변형된 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거제도는 기후나 지형적으로 보아 예부터 좋을 나무가 많이 자랄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시대적으로 팔만대장경판의 경판을 새긴 시기와는 맞지 않아 전설처럼 알려지고 있는 <해인사대장경판개간인유>의 이거인 관련 기록에는 거제목으로 경판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거제목은 실제의 거제수나무가 아니라 거제도에서 생산된 나무란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자작나무와 거제수나무는 나무껍질이 종이처럼 벗겨지는 모양이 거의 비슷하여 구분이 어려우므로 그냥 같은 화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후박나무
경판을 어디서 새긴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는 현실에서 후박나무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자라는 곳이 남해안이나 다도해의 섬 지방, 제주도에 걸쳐 있어서다. 상록수이고 아름드리로 자라며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나무였다.
기타 대장경판을 만드는 데 사용한 나무에는 층층나무, 고로쇠나무, 사시나무 등이 들어 있다.
4. 경판 나무분석으로 본 새김장소
몽고와의 처절한 항쟁을 하면서 수도마저 강화도에 옮겨놓은 누란의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제작한 팔만대장경의 경판은 어디에서 제작하였으며 오늘날 해인사에 보관되게 된 과정은 어떠하였는가? 한마디로 이 문제에 대하여는 아직도 명확한 사실을 알 수 없으며 몇몇 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이다. 그 이유는 이와 관련된 역사적 기록이 너무 빈약하기 때문이다. 팔만대장경판을 새긴 장소는 해인사에서 새겨서 처음부터 해인사에 있었다는 재래설(在來說), 강화도에서 새겨서 보관하고 있다가 조선초에 해인사로 옮겼다는 강화판각설(江華板刻說), 대장경판을 두벌 새겨서 한 벌은 강화도 또 한 벌은 해인사에 있었다는 2벌설(二伐說), 남부지방에서 새겼다는 분사도감 판각설(板刻說) 등이 있다.
우선 지금까지 팔만대장경판의 새긴 곳과 관련하여 믿을 만한 기록을 보자.
≪고려사≫ 고종 38년(1251) 9월 25일조에는 현종 때 만든 초조대장경 판본이 임진년 몽고의 난 때 불타버린 후 임금과 신하가 도감都監을 세우고 발원하여 16년간에 걸쳐 경판을 완성했다. 이에 임금은 백관을 거느리고 성의 서문 밖에 있는 대장경 판당에 행차하여 낙성기념회를 열었다(幸西城門外 大藏經板堂 率百官行 顯宗時板本 燬於壬辰蒙兵 王與群臣 更願立都監 十六年而功畢).“ 이어서 ≪조선왕조실록≫ 태조 7년(1398) 5월 10, 11, 12일 사흘에 걸쳐 이와 관련된 기록이 나온다. “태조가 1398년 5월 10일 용산강, 정확히는 지금의 한강 원효대교 북쪽으로 행차하여 대장경판을 강화도 선원사로부터 가져오는 것을 참관했다. 11일과 12일에 비가 내렸다. 12일에는 비를 무릅쓰고 2천 명의 병사를 동원하여 대장경판을 지천사로 옮겼는데 의장행렬이 따랐다. 검참찬문하 부사 유광우에게 명하여 향을 피우게 하고 오교양종의 승려가 경을 외우고 의장을 갖추어 나팔을 불며 인도했다(丙辰 幸龍山江 大藏經板 輸自江華 禪源寺 丁巳雨戊午雨 令隊長隊副二千人 輸經板于支天寺 命檢參贊門下府使兪光祐 行香 五敎兩宗僧徒 誦經 儀仗鼓吹前導).” 여기서 말하는 지천사의 위치는 서울 서대문 밖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지금의 프라자 호텔 자리라는 설도 있다. 강화도에 있던 대장경판은 지천사라는 서울 근교의 육지로 옮겨왔다는 내용이다. 또 같은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종 원년(1399) 1월 9일 태상왕(이성계)은 사재私財로 해인사 대장경을 인쇄하고 싶어 했다. 참가할 승려들을 공양하기 위해 태상왕은 머물고 있던 함경도 동북면에 비축해둔 콩과 밤 540석을 내어놓았다. 거리가 멀어 직접 해인사까지 가져갈 수 없으니 단주와 길주 두 고을 창고에 납입하게 하고 대신에 해인사 근방의 여러 고을에서 쌀과 콩을 같은 수량만큼 대신 내주도록 하라(命慶尙道監司, 飯印經僧徒于海印寺。 太上王欲以私財, 印成《大藏經》, 納東北面所畜菽粟五百四十石于端、吉兩州倉, 換海印寺傍近諸州米豆如其數).라는 내용이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대장경판은 ‘1236~1251년의 16년에 걸쳐 강화도에서 새겨서 보관하고 있다가 1398년 해인사로 옮겼다이다. 과연 사실인가? 재질 분석을 바탕으로 새김 장소와 이운移運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해 본다.
첫째, 경판의 표면 상태가 너무 완벽하여 강화도에서 서울을 거쳐 해인사까지 400km가 넘는 먼 거리를 옮길 때 생길 수 있는 마모 흔적을 비롯한 아무런 흠도 찾을 수 없는 점이다. 육안으로 보아 마모된 흔적이 전혀 없고 글자의 획 하나 떨어진 곳이 없다. 경판의 표면을 현미경으로 보면 작은 골이 수없이 져 있는 요철凹凸이다. 여기에 정밀하게 글자까지 새겨져 있으니 조금이라도 서로 닿아 흔들리면 나무 세포가 떨어져 나간 흔적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흠이 없다는 것은 가까운 거리에서 경판을 새겨서 바로 보관했을 때만 가능하다.
둘째, 경판 나무에 거제수나무가 들어 있는 점은 새김 장소를 찾는 중요한 실마리다. 거제수나무는 주로 해발 600~1,000m 사이의 고산에서 자란다. 그래서 거제수나무는 먼 곳에서 일부러 가져다 경판 나무로 이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른 나무를 비교적 손쉽게 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높은 산에 자라는 거제수나무를 어렵게 베어다 쓸 특별한 이유가 없어서다. 그런데 해인사 인근에는 질 좋은 거제수나무가 흔히 자란다. 따라서 팔만대장경판에 거제수나무가 일부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해인사 주위에서 벤 거제수나무를 사용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셋째, 경판을 만든 나무의 대부분인 산벚나무와 돌배나무는 식물학적으로 전국 어디에나 자랄 수 있는 나무다. 하지만 실제로 나무가 벌채된 곳은 남해안 섬과 경남과 전남 일대의 남부 지방이라고 본다. 후박나무 등 따뜻한 남쪽에 자라는 나무가 포함되어 있고 수운을 주로 이용하는 당시의 운반 수단을 생각해 본다면 전쟁 상황에서 비교적 몽고군의 영향을 덜 받은 남해안이라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거제도․남해도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그곳에서 나무를 베어 조경판(粗經板)을 만든 후 해인사 및 그 인근으로 추정되는 새김 장소로 옮기면 된다.
이상 경판의 재질을 중심으로 검토해본 결과 새김 장소가 강화도라는 지금까지의 학설에 동의하기 어렵다. 새김 장소는 해인사 자체 및 인근 지역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더 범위를 넓혀서 검토하면, 거제도 및 남해도를 포함한 남부 섬지방도 일부 새김 장소로 추정할 수 있다.
5. 팔만대장경판 760년 보존의 지혜
5.1 역사 속의 위기들
세종실록
세종 5년(1423) 12월25일조에서 임금은 ‘대장경판은 무용지물인데, 이웃나라에서 간절히 청구하므로 이를 주어 버리는 것이 어떤가?’ 라고 했다. 또 19년(1437) 4월 28일조에서는 임금이 승지들에게 이르기를, ‘팔만대장경판을 도성 근방인 회암사나 개경사 같은 곳에 옮겨 두면 어떨지를 논의해 보라’는 교지가 있었다.
두 번다 신하들의 반대로 세종의 뜻은 관철되지 못했다. 주어 버렸으면 말할 것도 없거니와 회암사로 옮겼더라도 이후의 임진왜란, 병자호란, 근세의 한국동란으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임진왜란
홍의장군 곽재우를 비롯하여 합천의 선비 손인갑과 장령 정인홍, 고령의 선비 김면, 진주 현령이었던 조종도 등이 의병을 일으켜 가야산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방어하였다. 그래서 왜구치(倭寇峙)라는 지명도 있다.
한국동란
미군에 의하여 해인사 폭격명령이 떨어졌으나 당시 김영환 공군 대령은 이 군령(軍令)을 거부하여 팔만대장경판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화재
목조 건물이 밀집되어 있는 큰 절에는 예부터 화재가 많다. 1876년 퇴암스님이 쓴 해인사 실화적(失火蹟)을 보면 숙종 21년(1695)부터 고종 9년(1871)의 3백여년 사이에만 자그마치 7차례의 화재가 있었다.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기간에도 수많은 화재가 있었을 것이나 용케 이를 피했다.
5.2 제작 과정에서의 과학
나무 골라내기
나무마다 생김이 다르듯이 성질 또한 천차만별이다. 어떤 나무가 대장경 새김에 적당할까? 몇 가지 기본적인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너무 무르지도 단단하지도 않고 세포 크기가 들쑥날쑥하지 않고 고른 것이 좋다. 옹이가 많거나 썩은 부분이 있어서는 당연히 경판 나무로 선택될 수 없다. 두 번째는 적어도 굵기가 한 아름 이상의 아름드리 나무여야 한다. 경판의 너비가 24cm이고 나무의 가운데 배꼽 부분 일대는 잘 갈라져서 쓸 수 없으니, 이런 부분을 제외하고 쓰려면 최소한 지름이 40cm가 넘는 굵은 나무라야 한다.
판자로 켜기
경판 나무를 골라서 벌채한 후 통나무 상태로 운반하지는 않았다고 추정한다. 나무를 베어낸 후 느긋하게 1~2년을 두어 충분히 나무 스트레스를 풀어준다. 목수들이 흔히 숨을 죽인다는 말이 바로 이 과정이다. 옹이가 많거나 썩은 부분이 포함되어 있어서 쓸 수 없는 판자는 그 자리에 버리고 오면 되므로 대단히 효율적이고 편리하다. 갓 켠 판자는 수분이 많으므로 표면이 햇빛에 노출되거나 오랫동안 공기 중에 방치되면 갈라지거나 비틀어질 염려가 있으므로 신속히 운반해야 하는데, 바로 물속에 담가두는 것이 효과적이다. 경판을 새기는 절에 개인적으로 경판 시주를 하거나 분사대장도감 등 새김을 주관하는 관청에 가져다바쳤을 것이다.
소금물 삶기
팔만대장경판을 만든 나무는 바닷물에 3년 담가두었다는 구전이 있다. 그러나 통나무 자체를 일부러 바닷물 속에 담글 필요성은 없으며 경판 제작 과정의 필수 요건은 아니다. 실험결과 통나무표면을 통하여 나무속으로 바닷물은 거의 침투하지 못하며, 벌채한 한 후 현장에서 판자로 켠 후 판자만 운반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다만 경판을 만들 판자는 경판재가 휘거나 갈라지지 않고 충해를 막기 위해 반드시 소금물에 삶아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건조와 마구리 만들기
나무는 여러 종류의 세포가 복잡하게 배열되어 있으며 많은 수분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무를 말리는 일은 단순하지 않다. 나비가 넓은 경판과 같은 판자는 아무리 건조를 잘해도 보관과정에 너비 방향에 U자 모양으로 굽는다. 특히 무늬 결로 켜진 판자는 더욱 굽음이 심하다. 고려의 장인들은 경판의 양쪽에다 가로 마구리를 끼워 넣음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경판 두께보다 약간 두꺼운 마구리를 만들어 경판을 기계적으로 고정함으로써 경판의 굽음을 방지한 것이다. 이외에도 마구리는 인쇄할 때는 취급이 편하도록 손잡이 역할을 한다. 보관할 때는 경판이 서로 직접 맞닿는 것을 막아주고 틈새기를 만들어 공기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등 여러 기능을 갖고 있다.
글자 새기기
준비된 경판 판자 위에 고루 풀칠을 하고 인쇄할 때 글자가 바로 찍히도록 판하본의 글자를 쓴 면이 판자 쪽에 가도록 뒤집어 붙인다. 그 위에 다시 한 번 풀칠하여 말리고, 다시 식물성 기름을 발라준다. 글자를 새기는 새김이는 지극한 신앙심으로 한 자 한 자에 온갖 정성을 쏟았다. 그러나 아무리 조심하더라도 실수는 있게 마련이다. 대장경판에서 그런 흔적은 많지 않지만 가끔 볼 수 있다. 잘못 판각한 글자는 두 가지 방법으로 수리했다. 첫째는 틀린 글자를 口자로 오려내고 다른 나무에 바른 글자를 새겨서 맞추어 넣은 방식이다. 오려낸 깊이가 깊지 않으면 뒷면에 아교를 발라 붙였다. 다른 방법은 틀린 글자가 있는 행行부터 아래나 위로 U자형으로 길게 모두 오려내고, 새로 새긴 글자 줄을 밀어 넣은 방식이다.
옻칠하기-‘팔만대장경판에는 옻칠이 되어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썩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다. 나무라는 재료는 대기의 평형 함수율이하로 건조되면 썩고 벌레 먹는 일은 거의 생기지 않는다. 또 인쇄과정에서 탄소막이 형성되어 있으므로 썩고 썩지 않음은 옻칠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경판이 완성된 후 몇 번을 인쇄를 한 후에 옻칠을 한 경우가 많다.
5.3 제작후의 경판 관리
경판꽂이
경판을 판전 안에 어떻게 쌓아두어야 가장 효과적일까? 경판이 갈라지거나 썩고 벌레 먹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다음은 주어진 공간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장수를 쌓아야 한다. 이를 위하여 조상들은 마치 책꽂이처럼 여러 층의 선반을 만들었다. 평면으로 늘어놓기보다 당연히 많이 들어간다. 선반은 무거운 경판을 견뎌내야 하므로 튼튼함이 기본이다. 경판꽂이의 맨 아랫단은 바닥으로부터 40cm 높이에 설치되어 있다. 모두 5단으로 구성되며 한 단은 가로 너비 156~160cm, 세로 너비 160~180cm, 높이 53~55cm의 크기다. 여기에 경판의 너비 방향을 아래로 하여 세워 넣기를 했다. 아래에 한 줄을 채우고 다시 그 위에 한 줄을 더 넣어 한 단에 두 줄 겹치기로 경판을 넣어 두었다. 경판 너비가 24cm이므로 한 단에서 경판을 쌓은 위 부분의 공간은 좁은 경우 높이가 불과 5cm, 좀 넓어도 7cm 남짓하다. 한 줄에 들어 있는 경판은 적게는 34장, 많게는 44장이다. 평균적으로 한 단에는 두 줄 겹치기로 약 80장의 경판이 들어 있는 셈이다.
경판의 두께는 2.8cm이고 마구리의 두께는 4cm이다. 경판꽂이의 앞에서 보면 마구리가 전부 맞닿아 있으므로 거의 틈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마구리 두께와 경판 두께는 1.2cm의 차이가 나므로 위에서 내려다보면 경판과 경판 사이에는 지름 가로 2.4cm, 세로 60~70cm의 긴 직사각형 공간이 있다. 경판꽂이의 맨 위에서 보았을 때는 1단에서 5단까지 직사각형의 배기통이 설치되어 있는 셈이다. 대류 현상으로 판전 안의 공기가 상하로 이동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이는 판전 벽에 붙어 있는 살창로 공기의 수평 이동을 편리하게 해둔 설계와 함께 판전 안의 공기 자연 순환장치를 합리적으로 설치한 것이다. 선조들의 과학적인 마인드가 돋보이는 판전의 특별한 설계이다.

|
마구리로 생긴 경판과 경판 사이의 간극 |
경판의 함수율
살아서도 죽어서도 마찬가지로 나무에는 물이 들어 있다. 잘려서 죽은 순간 그 동안 애써 지키고 있던 나무의 물은 차츰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나무가 마르는 것이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전기건조기에 넣어 말리지 않은 이상, 자연 조건에서는 물이 전혀 없는 상태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공기 중에는 항상 일정량의 수분을 가지고 상대습도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대장경판의 함수율은 얼마나 될까? 1994년 7월 필자가 조사한 경판재의 함수율은 최저 13.4%에서 최고 16.5%의 범위이며 전체 평균이 15.5%였다. 판전별로 보면 법보전이 15.3%, 수다라장이 15.8%로, 0.5%의 차이가 있으나 크게 의미를 부여할 값은 아니다. 그리고 대장경판은 판전 자체가 항상 통풍이 잘 되어 계절에 따라 일정한 함수율을 갖도록 되어 있다. 또 750여 년을 지나는 동안 물 분자가 들어갈 자리가 많이 망가져서 장마철 등 일시적으로 습도가 다소 높더라도 흡수하는 수분은 한계가 있으므로 함수율 16~7% 이상은 올라가기 어렵다. 이것은 현재의 팔만대장경판 함수율이 대단히 안정되어 있으므로 당장은 경판이 갈라지거나 비틀어질 염려는 없음을 암시한다.
한편 나무는 온도에 그렇게 민감하지 않다. 열전도율이 낮고 온도 변화에 따른 열팽창율도 거의 변화가 없다. 우리나라의 연중 최고 온도를 40℃, 최저 온도를 -20℃로 볼 때, 이 사이의 온도에서 경판 나무는 열팽창이나 열수축을 거의 하지 않는다. 겨울에 물이 얼 정도의 온도면 나무 속의 액체로 된 물도 당연히 언다. 그러나 경판처럼 함수율이 15~6%이고 이력현상이 끝난 나무 속에는 액체 물은 없다. 경판 나무 속의 수분은 결합수라는 형태로 존재하므로 자연 상태의 온도변화에서는 거의 문제되지 않는다.
탄소막효과
경판을 만든 목적은 인쇄를 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이 목적이다. 인쇄 종이를 만드는 일이 간단치 않으므로 많은 인쇄는 못하였어도 필요에 따라 여러 번의 인쇄를 했다. 경판에다 풀을 섞은 먹물을 바른 후 한지를 덮어 말총이나 긴 머리털을 뭉쳐 두들기는 방식으로 인쇄를 했다. 인쇄가 끝난 경판은 소금물로 먹물을 씻어내고 음지에 말려서 다시 제자리에 넣었다.
경판나무에는 수많은 미세공극이 있어서 입자가 굵은 먹 가루는 공극을 막고 그대로 경판 표면에 남게 된다. 그래서 인쇄가 끝난 경판은 먹으로 완전 코팅이 되어 있으며, 이는 바로 경판 표면을 탄소막으로 보호하고 있는 셈이다. 탄소막은 경판이 노화나 풍화, 광열화(光劣化)를 지연시키며 일부 수분차단 기능까지 있어서 경판 보호에 중요한 기능을 한다.
5.4 대장 판전의 비밀
고려의 장인들은 경판을 쌓아둘 창고, 즉 판전板殿을 어떻게 지을 것인지에 많이 고심한 것 같다.
우선 판전 구조를 살펴보자. 약간 서남향으로 나란히 一자로 지어진 수다라장과 법보전 사이의 동서 양쪽 끝에는 자그마한 건물이 각각 한 채씩 더 있다.
판전 환경
경판을 오랫동안 흠 없이 잘 보존하기위한 첫 번째 조치는 통풍이 잘되게 해주는 것이다. 경판나무는 공기 중의 수분과 끊임없는 소통을 한다. 공기가 습하면 수분을 빨아드리고 반대로 건조하면 수분을 내놓는다. 이런 과정은 공기습도와 온도에 따라 달라지며, 매년 반복하다 보면 계절별로 경판이 갖은 함수율은 대체로 일정해 지며 우리는 이를 평형함수율이라 부른다. 해인사 일대의 연간 평형함수율은 15~16%이며 경판은 이 함수율에 거의 안정되어 있다.
이와 같은 함수율을 유지 할 수 있는 곳으로 해인사의 가장 위쪽, 서남향의 양지 바른 곳에 판전이 자리 잡도록 설계했다.
판전 건물의 특성
수다라장이나 법보전 둘 다 대장경판 보관을 목적으로 지었으므로 장식이 거의 없는 소박한 건물이다. 판전은 약 60cm 높이 정도의 기단基壇을 만들고 대체로 네모지거나 불규칙한 모양의 자연석 위에 기둥을 얹었다. 바깥 기둥은 둥글게 깎은 두리기둥으로 약간 배흘림이 되어 있고, 건물 안의 중앙 기둥은 네모기둥이다. 바깥 기둥의 위에는 단익공單翼工을 짜 넣어 대들보를 받치고 이 대들보는 높은 중앙 기둥의 옆구리에 고정시켰는데, 이는 반대쪽에도 동일하여 대칭을 이룬다. 높은 중앙 기둥의 위와 좌우로 걸쳐진 대들보의 가운데에는 다시 작은 기둥을 세워 대들보를 연결하고, 건물 안 중앙 기둥의 위에는 다시 기둥을 지붕머리와 연결하도록 하여 건물이 더욱 견고하게 보강했다.
이렇게 구조는 단순할지라도 공기 흐름을 원활히 하는 데 가장 많은 신경을 쓴 것 같다. 내부 바닥은 흙바닥이며 경판꽂이를 판전의 길이 방향과 같이 설치하고 적당한 공간을 두어 상하좌우의 공기 흐름이 원활하도록 고안했다. 건물 바깥벽에 설치한 붙박이 살창 역시 판전 안의 공기 흐름을 배려한 설계이다. 벽면의 아래와 위 및 건물의 앞면과 뒷면의 살창 크기를 달리하여 대류 현상을 이용하는 절묘한 기술을 발휘했다. 건물의 앞면에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중방中枋을 걸치고 붙박이 살창을 아래위로 설치했다. 수다라장과 법보전의 살창 모양은 비슷하나 크기가 약간씩 다르다. 수다라장의 경우 앞 벽면의 창 크기는 아래 창이 위 창보다 약 4배 정도, 뒤 벽면은 위 창이 아래 창보다 1.5배 정도 더 크다. 법보전은 앞 벽면은 아래 창이 위 창보다 약 4.6배 정도, 뒤 벽면은 위 창이 아래 창보다 1.5배 크다. 판전의 앞과 뒤 그리고 아래와 위의 창 크기를 왜 달리했는가? 여기에는 자연 대류를 생각한 선조들의 과학이 숨어 있다. 수다라장과 법보전은 모두 30칸 195평, 동․서사간전은 모두 3칸 17평의 장방형 목조 건물이다. 건물은 가야산 정상인 두리봉을 뒤로하고 깃대봉, 단지봉, 오봉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앞에는 비봉산을 마주보고 있다. 판전 건물 자리는 표고 645m이고 기본 방향은 서남향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판전은 남향 건물로서 앞쪽보다 뒤쪽의 온도가 낮고 공중 습도가 높다. 공기의 이동은 판전 건물 뒷면의 살창으로 들어와 판전 속에 머물다가 빠져 나갈 때는 앞으로 나가기 마련이다. 판전으로 공기가 들어갈 때 습한 공기는 아래에 처져 있으므로 위 창보다 아래 창을 약간 작게 하여 습한 공기가 적게 들어가게 설계했다. 그러나 바깥 공기는 건물 높이 4m 정도에서는 아래 위 습도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으므로 살창은 1.5배 정도로 큰 차이는 두지 않았다. 판전 속에 들어간 공기는 경판이 가지고 있는 수분을 빼앗아 들어올 때보다 무거워지고 아래로 처진다. 이런 습한 공기는 앞면 살창을 통해 빨리 빠져나가 버릴 수 있도록 앞면 아래 창은 위 창보다 4배 이상 크게 만들었다. 반면에 건조하여 위로 올라간 공기는 오랫동안 판전 안에 머무를 수 있게 판전 앞면 위 창은 아주 작게 했다.
판전 바닥의 숯
판전 건물의 밑바닥에 사람들은 관심이 많다. 건물은 육안으로 확인하여 경판 보존에 매우 합리적임을 금세 알아낼 수 있지만 땅속은 무엇인가 신비로운 사실이 들어 있을 것만 같아서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불교의 최고 경전인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이니 당연히 좋은 나무로 튼튼한 마룻바닥을 설치해야 맞다. 그러나 판전의 바닥은 마루를 깔지 않은 흙바닥 그대로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흙바닥 속에 특별한 비밀이라도 있는 것처럼 여러 가지 상상을 했다.
맨 흙바닥에 부처님의 경전을 새긴 경판을 보관했다는 사실이 얼른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당연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흙바닥에 무엇인가 비밀이 묻혔을 것이다. 비밀의 열쇠는 숯이 갖고 있다고 믿었다. 숯을 켜켜로 흙속에 깔아 판전 내부가 일정한 수분을 유지하도록 조절해주고 벌레가 살지 못하게 했을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 이런 미확인 숯 매몰설을 사실처럼 누가 처음 알리기 시작했는지 지금 와서 찾아낼 수는 없다. 하지만 필자를 포함하여 대장경에 관심을 가져온 많은 사람들은 밑바닥 속에 많은 숯이 들어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믿어왔고 전혀 의심을 갖지도 않았다.
그러나 바닥은 그냥 흙바닥이다. 다만 일제강점기 이후 판전의 보수 때마다 수시로 시행된 강회剛灰 다짐을 했을 뿐이다.
6. 일본과 대장경분양 요구
고려말 우왕 14년(1388) 포로 250명을 돌려보내 주면서 처음 청구한 것으로부터 조선왕조 중종 때까지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것만 80여 회에 이를 만큼 끈질기게 대장경 분양을 요구한다.
사신의 단식투쟁
세종6년(1423) 1월2일 사신 규주 등이 경판을 구하였다가 얻지 못한다 하여, 음식을 끊고 말하기를,
"우리들이 온 것은 오로지 대장경판을 구하려는 것이다. 우리들이 처음 올 때에 궁궐에 아뢰기를, 만일 경판을 받들고 올 수 없을 때에는 우리들은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제 얻지 못하고 돌아가면 반드시 말대로 실천하지 못한 죄를 받을 것이니, 차라리 먹지 않고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1월8일 호군 윤인보를 보내어 규주 등을 알아듣게 타이르고, 밀교대장경판과 주화엄경판과 대장경 1부를 내려 주면서 겸하여 회례사까지 보내겠다면서 달랬다.
대장경판의 약탈모의
세종6년(1423) 1월20일 규주와 범령 이란 일본 사신이 본국에 보내는 서신의 초안에,
"지금조선에 와서 힘써 대장경판을 청구하였으나 도저히 얻지 못하겠으니, 병선 수천 척을 보내어 약탈하여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거짓 나라와 대장경 청구
성종 때는 구변국(久邊國)과 이천도국(夷千島國)이라는 존재하지도 않은 거짓 나라를 만들어 가짜 사신을 파견하여 대장경을 달라고 요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