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로 본 고려대장경판의 판각지 고찰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박상진
고려대장경판은 이번에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될 만큼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이지만, 아직도 밝히지 못한 수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엄청난 규모에 비하여 판각장소를 비롯한 관련 기록이 너무 부족한 탓이다. 다행히 고려대장경판은 경판이라는 나무로 만들어진 현품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경판 자체를 대상으로 과학적인 접근을 하면 미비한 기록을 보완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필자는 경판을 만드는데 쓰인 나무의 종류를 비롯한 재질분석으로 고려대장경판에서 얻은 몇 가지 새로운 결과를 소개하고자 한다.
1. 고려대장경판의 개요
고려대장경판은 약 5천2백만 자의 글자가 새겨진 81,258장의 나무판이다. 경판 한 장에는 앞뒤로 약 640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글자를 새긴 부분과 양옆에는 인쇄할 때나 보관의 편의를 위하여 만든 마구리(손잡이)가 붙어있다. 길이는 대체로 다섯 종류로서 75cm, 73cm, 70cm짜리도 있지만 68cm 혹은 78cm가 대부분이며 너비는 24cm, 두께는 약2.8cm정도다. 컴퓨터 자판의 1.5배 크기로 생각하면 된다. 무게는 3.4㎏전후다. 경판을 전부를 한꺼번에 쌓아놓는다면 백두산 높이가 넘고, 길이로 이으면 약150리에 이른다. 또 전체 무게는 약 280톤, 4톤 트럭에 싣는 다면 70대 분량이다. 부피로 계산하여서는 약 450m3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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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글자를 새긴 각자 부분의 길이(51cm) b : 마구리를 제외한 경판 길이(64~74cm)
c : 마구리 포함한 전체 경판 길이(68~ 78cm) d : 마구리 너비(4cm)
e : 경판의 외곽부欄外 f : 경판 너비(24cm)
g : 마구리 길이(24cm) h : 마구리 두께(4cm) i : 경판 두께(2.8cm) j : 마구리
k : 경판과 마구리 고정 나무못 l : 경판과 마구리 연결 장석裝錫 |
2. 경판 새김에 쓰인 나무
고려대장경판을 만든 나무는 지금까지 자작나무(樺木)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필자가 2백여 장의 경판에서 극소량의 표본을 수집하여 현미경으로 조사한 바로는 자작나무는 검출되지 않았다.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 대부분이며 거제수나무, 층층나무, 고로쇠나무, 후박나무의 순서였다. 물론 경판의 숫자에 비교하여 표본의 수가 너무 적어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전체적인 경향을 알 수는 지표가 된다고 생각한다.
수종 |
수량(장) |
비율(%) |
산벚나무 |
135 |
64 |
돌배나무 |
32 |
15 |
거제수나무 |
18 |
9 |
층층나무 |
12 |
6 |
고로쇠나무 |
6 |
3 |
후박나무 |
5 |
2 |
사시나무 |
1 |
1 |
계 |
209 |
100 |
산벚나무와 돌배나무는 우리 주위에 흔하면서 경판새김 나무로서는 재질이 좋아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 특히 산벚나무는 봄에는 다른 나무와 쉽게 구분되는 꽃이 피고, 나무껍질이 매끄럽고 독특한 가로 숨구멍이 있어서 쉽게 찾아 낼 수 있는 것이 몽고군의 눈을 피하여 몰래 나무을 베어내기에 적합하였다고 짐작된다. 그러나 분포지가 한정적인 거제수나무와 후박나무가 판각지를 추정하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본다.
산벚나무
팔만대장경판 만들기에 쓰인 나무의 약 2/3는 산벚나무다. 산벚나무는 높은 산꼭대기가 아니면 전국 어디에서나 자란다. 크게 자라면 높이 20m, 지름이 거의 1m에 이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높이 10여m, 지름 50~60cm다. 산벚나무를 잘라보면, 짙은 적갈색인 심재心材가 대부분이고 색깔이 연한 변재邊材는 좁게 이어져 있다. 잘 썩지 않고 나무질이 좋은 심재 부분이 많으며 조직이 치밀하고 세포가 고르게 분포하여 전체적으로 고운 느낌을 준다. 비중이 0.6 정도로 너무 단단하지도 무르지도 않으며 잘 썩지도 않는다. 이런 특징은 경판재로서의 적합함을 보여주는 지표다.
대장경판의 대부분이 산벚나무로 이루어진 데는 그만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첫째는 나무질에서 찾을 수 있다. 산벚나무의 세포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면 물관이 하나의 나이테 안에 여기저기 고루 흩어져 있는 전형적인 산공재다. 물관은 갈색 진흙으로 채워 넣은 것처럼 흔히 막혀 있다. 이것은 여러 종류의 다당류가 결합된 고분자인 검gum 물질이라 하는데, 글자를 새긴 후 인쇄할 때 인쇄 품질을 좋게 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 외 나무를 단단하게 해주는 목섬유 세포는 비교적 세포벽이 두껍고 하나의 나이테 안에서 치우침이 없이 고루 흩어져 있다. 한마디로 산벚나무는 경판을 새기기에는 좋은 특성을 가진 나무다.
둘째는 아무리 경판 새김에 좋은 나무라도 깊은 산속에 자라면 사용에 제한을 받는데, 산벚나무는 흔하고 쉽게 찾을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나무껍질의 독특함 때문이다. 나무줄기의 숨구멍인 피목皮目이 약간 진한 적갈색을 띠고 가로로 짧게 혹은 길게 분포한다. 이런 모습은 멀리서도 다른 나무와 쉽게 구별하여 찾아낼 수 있다. 나라의 땅덩어리가 온통 몽고군에게 유린당한 당시로서 내놓고 나무를 베어 올 수도 없는 형편, 몰래몰래 한 나무씩 베어 나오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또 이른 봄에 다른 게으른 나무들은 꿈쩍도 않을 때 분홍빛 꽃을 지천으로 피우니 껍질 특징에서처럼 역시 쉽게 찾을 수 있다.
돌배나무
두 번째로 많이 쓰인 나무는 약 14%의 돌배나무다. 거의 전국에 걸쳐 자라며 높이 10여m에 아름드리로 자라는 나무다. 돌배나무는 산벚나무와 세포 배열이 비슷하다. 물관의 지름이 약간 작고 물관에 검 물질이 없으며, 비중이 0.73 정도로 산벚나무보다 약간 무겁고 단단한 편이다. 예부터 나무질이 좋아 가구재나 각종 기구로 널리 쓰였다. 산벚나무보다 구하기가 어렵고 나무의 굵기도 약간 가늘어 대장경판의 재료로 산벚나무만큼 많이 쓰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옛날부터 돌배나무는 과일나무로서의 값어치가 더 컸다. 제사상의 맨 앞줄의 과일 중 하나가 될 만큼 사랑을 받아왔다. 이처럼 돌배나무는 사람들 곁에 가까이 있으면서 과일 이외에도 죽어서는 좋은 몸체를 대장경판의 재료로 보시해주는 고마운 나무다.
거제수나무
거제수나무는 자작나무, 사스레나무, 박달나무 및 물박달나무 등과 함께 식물학적으로는 자작나무과科 자작나무 속屬에 들어가는 나무다. 자작나무와 거제수나무는 잎의 모양은 다르지만 껍질만 보아서는 서로 비슷하다. 껍질의 색깔이 자작나무는 흰색을 자주 보지만 거제수나무는 약간 황갈색을 띠는 것도 많다. 그래서 한자로 황자작이란 뜻으로 황화수黃樺樹이라고 하며, 황단목黃檀木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는 남쪽으로 조계산, 백운산, 지리산, 가야산에서 출발하여 소백산, 두위봉, 가리왕산, 오대산, 설악산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산 밑자락부터 자리 잡은 일은 흔치 않다. 거제수나무의 90% 이상이 표고 600m보다 더 높은 곳에 자라며 1,000m 전후가 가장 좋아하는 자람 터라고 한다.
거제수나무는 크게 자라면 높이 30m, 굵기 두 아름을 넘는다. 4월 말이나 5월 초쯤의 곡우 때가 되면 사람들은 거제수나무의 줄기에 구멍을 뚫고 파이프를 꽂아 물을 받아 마신다. 곡우물이라는 이 물을 마시면 병 없이 오래 산다고 전해지고 있다. 선조들은 여기에다 재앙을 쫓아낸다는 뜻을 하나 더 부여하여 거제수나무를 거재수去災水로 표기하기도 했다고도 한다. 또 하나의 한자 이름 혼란이 있다. 거제수나무를 巨濟樹라고 쓰고 거제도와 관련지우는 것이다. 그러나 우연히 이름이 같을 뿐 아무런 관련이 없다.
고려대장경판과 화목樺木
자작나무(樺木)가 자라는 지역은 백두산 원시림을 비롯한 북한 내륙의 고산 지방, 중국의 북동부, 사할린에서 시베리아에 걸쳐 있다. 추운 곳을 좋아하는 한대 수종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자작나무를 베어다 경판을 만들었다고 가정한다면, 생각해볼 수 있는 지역은 북한 내륙의 고산 지방이다. 벌채한 나무는 압록강이나 대동강에 뗏목을 띄워 황해로 내려와 강화도로 가져와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 역사의 상식으로는 대장경판을 새길 당시 몽고군에게 수도 개성을 비롯한 육지가 모두 점령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가정은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꼭 자작나무를 가져다 새겨야 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산벚나무나 돌배나무 등 다른 나무들로도 새김에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작나무는 결코 경판에 사용될 수 없는 나무임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팔만대장경판 새김에 쓰인 나무가 식물학적으로 말하는 진짜 자작나무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팔만대장경판은 자작나무로 만들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각 급 학교의 교과서는 물론 대장경 관련 대부분의 문헌에는 자작나무 제작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어째서 이런 혼란이 생겼을까? 첫째, 자작나무의 한자 표기에서 혼란이 발생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樺는 자작나무다. 그러나 옛 문헌의 樺는 자작나무 종류일 경우도 있고 벚나무 종류일 경우도 있다. 한 마디로 선조들은 자작나무와 벚나무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같은 樺로 표현한 경우가 많았다. 이유는 두 나무의 껍질이 종이처럼 얇게 벗겨지는 특징을 살려 활을 만들거나 나무그릇의 바깥을 매끄럽게 하는 데 사용하는 등 같은 쓰임새를 가졌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 ≪임원경제지≫, ≪본초강목≫, ≪해동농서≫ 여러 문서에서 옛 사람들은 자작나무와 벚나무를 같은 글자인 화樺로 표기하여 뒤섞어 사용했다.
두 번째의 추정은 거제목巨濟木이라는 거제도에서 생산된 나무란 의미가 거제수나무로 변형된 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거제도는 기후나 지형적으로 보아 예부터 좋을 나무가 많이 자랄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시대적으로 팔만대장경판의 경판을 새긴 시기와는 맞지 않아 전설처럼 알려지고 있는 <해인사대장경판개간인유>의 이거인 관련 기록에는 거제목으로 경판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거제도의 나무, 즉 거제수巨濟樹는 실제의 거제수나무가 아니라 거제도에서 생산된 나무란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자작나무와 거제수나무는 나무껍질이 종이처럼 벗겨지는 모양이 거의 비슷하여 구분이 어려우므로 그냥 같은 화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거제목’이 자작나무로 알려진 계기가 된 것으로 추정한다.
후박나무
양이 많지는 않지만 대장경판 새김 나무에는 자라는 곳이 남해안 지방인 나무가 일부 들어 있다. 대장경판을 어디서 새긴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는 현실에서 이런 나무들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후박나무는 남해안이나 다도해의 섬 지방, 제주도에 걸쳐 자란다. 겨울날 남부 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잎이 두껍고 짙푸르며 윤기가 흘러 마치 흔히 보는 감나무의 작은 잎처럼 생긴 상록수를 만날 수 있다.
후박厚朴나무는 이름 그대로 인정이 두텁고 거짓이 없다는 뜻이다. 거제수나무처럼 산 속 깊숙이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곁에서 그들의 애환을 말없이 지켜보던 남해안의 흔한 나무 중 하나다. 나무의 껍질은 오래되어도 갈라지지 않고 매끄러워 나무를 보는 느낌도 편안한 나무다. 다 자라면 높이는 20m, 직경은 거의 1m까지 달하기도 하는 큰 나무다. 목재는 옅은 갈색이고 결이 약간 어긋나기를 하나 나무질이 좋아 널리 쓰인다. 비중은 0.6 정도로 적당히 부드럽고 질김이 있어서 글자 새김에 적당하다. 물관의 배열이 고른 산공재이며 기름 세포라는 다른 나무에서는 찾을 수 없는 특별한 세포를 가지고 있다. 녹나무와 함께 기름 세포에 들어있는 후박나무의 장뇌樟腦 성분은 벌레의 침입을 막는 역할을 해주므로 가구를 비롯해 여러 용도로 쓰였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후박나무의 옛 쓰임새는 주로 약재다. 껍질을 벗겨 위장병을 다스리는 데 쓰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실린 생산지를 보면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에 한정된다. 옛날에는 아름드리나무가 꽤 있었을 것이나 껍질이 약재인 탓에 지금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몇 나무 이외는 큰 나무를 볼 수 없다.
층층나무
약간의 층층나무가 포함되어 있다. 층층나무의 목재는 안팎의 구별 없이 연한 황백색이며 나이테가 잘 보이지 않고 나무질이 비교적 치밀하다. 물관의 크기가 일정하고 나이테마다 고루고루 분포하는 산공재다. 특별한 옛 쓰임은 알려져 있지 않은 숲속의 평범한 나무다. 나무 속살이 깨끗하고 단단함도 적당하여 글자 새김 나무로서 흠 잡을 것은 없으나 많은 양을 구할 수 있는 나무는 아니다. 다른 용도로도 잘 쓰이지 않은 층층나무가 대장경판이 된 것은 일시적으로 적당한 나무가 부족할 때 적은 양이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고로쇠나무
고로쇠나무로 대표되는 약간의 단풍나무 종류가 쓰였다. 우리나라에는 약 25종류의 단풍나무가 자란다. 단풍나무 종류는 전국 어디나 자라지 않은 곳이 없다. 나무 재질이 좋아 가을 단풍보다 몸체가 훨씬 쓸모가 많은 단풍나무도 여럿 있다. 가을에 붉은 잎으로 물드는 진짜 단풍나무를 비롯하여 수액을 채취하는 고로쇠나무, 높은 산에 주로 자라는 복자기나무 등이 모두 단풍나무 종류다.
단풍나무는 비중 0.6~0.7 정도로 비교적 단단한 편이며 약간 질긴 성질까지 갖고 있다. 물관이 고루 분포하는 산공재다. 대장경판 이외에도 조선 시대 양반가의 문집 목판 중 상당 부분, 그리고 충남 갑사에 보관 중인 보물 제582호 선조 2년 간 월인석보판목 등이 단풍나무 종류로 만들었다.
기타 대장경판을 만드는 데 사용한 나무에는, 조사 경판 중 1판에 불과하지만 사시나무 종류가 있다. 하지만 나무질은 너무 약하여 경판 새김에는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처음부터 경판재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막대한 양의 나무를 벌채․운반하는 과정에서 나무를 잘못 알았거나 갑자기 대용 나무가 필요하여 쓰인 것으로 보인다. 금세 찾아내어 판을 만들고, 건조도 빨리 시킬 수 있는 나무로는 사시나무가 제격이다.
3. 나무로 본 새김 장소
지금까지 고려대장경판의 이운과 관련하여 믿을 만한 기록은 다음 셋이다.
≪고려사≫ 고종 38년(1251) 9월 25일조에는 현종 때 만든 초조대장경 판본이 임진년 몽고의 난 때 불타버린 후 임금과 신하가 도감都監을 세우고 발원하여 16년간에 걸쳐 경판을 완성했다. 이에 임금은 백관을 거느리고 성의 서문 밖에 있는 대장경 판당에 행차하여 낙성기념회를 열었다(幸西城門外 大藏經板堂 率百官行 顯宗時板本 燬於壬辰蒙兵 王與群臣 更願立都監 十六年而功畢).“ 이어서 ≪조선왕조실록≫ 태조 7년(1398) 5월 10, 11, 12일 사흘에 걸쳐 이와 관련된 기록이 나온다. “태조가 1398년 5월 10일 용산강, 정확히는 지금의 한강 원효대교 북쪽으로 행차하여 대장경판을 강화도 선원사로부터 가져오는 것을 참관했다. 11일과 12일에 비가 내렸다. 12일에는 비를 무릅쓰고 2천 명의 병사를 동원하여 대장경판을 지천사로 옮겼는데 의장행렬이 따랐다. 검참찬문하 부사 유광우에게 명하여 향을 피우게 하고 오교양종의 승려가 경을 외우고 의장을 갖추어 나팔을 불며 인도했다(丙辰 幸龍山江 大藏經板 輸自江華 禪源寺 丁巳雨戊午雨 令隊長隊副二千人 輸經板于支天寺 命檢參贊門下府使兪光祐 行香 五敎兩宗僧徒 誦經 儀仗鼓吹前導).” 여기서 말하는 지천사의 위치는 서울 서대문 밖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지금의 프라자 호텔 자리라는 설도 있다. 강화도에 있던 대장경판은 지천사라는 서울 근교의 육지로 옮겨왔다는 내용이다. 또 같은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종 원년(1399) 1월 9일 태상왕(이성계)은 사재私財로 해인사 대장경을 인쇄하고 싶어 했다. 참가할 승려들을 공양하기 위해 태상왕은 머물고 있던 함경도 동북면에 비축해둔 콩과 밤 540석을 내어놓았다. 거리가 멀어 직접 해인사까지 가져갈 수 없으니 단주와 길주 두 고을 창고에 납입하게 하고 대신에 해인사 근방의 여러 고을에서 쌀과 콩을 같은 수량만큼 대신 내주도록 하라(命慶尙道監司, 飯印經僧徒于海印寺。 太上王欲以私財, 印成《大藏經》, 納東北面所畜菽粟五百四十石于端、吉兩州倉, 換海印寺傍近諸州米豆如其數).라는 내용이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대장경판은 ‘1236~1251년의 16년에 걸쳐 강화도에서 새겨서 보관하고 있다가 1398년 해인사로 옮겼다이다. 과연 사실인가? 재질 분석을 바탕으로 새김 장소와 이운移運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해 본다.
첫째, 경판의 표면 상태가 먼 거리를 옮길 때 생길 수 있는 마모 흔적을 비롯한 아무런 흠도 찾을 수 없는 점이다. 이는 가까운 거리에서 경판을 새겨서 바로 보관했을 때만 가능하다. 옮긴 거리가 멀수록, 또 글자까지 새긴 완성 경판일 때 옮겼다면 표면에 여러 가지 흠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해인사에는 지금의 위치 말고도 주위에 10여 곳 이상의 절터가 남아 있다. 사실 대장경 새김을 하는데 구태여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모여서 작업해야 할 필요는 없다. 초벌 경판은 다른 곳에서 만들어 오고 새김 기술자 몇 사람만 있으면 해인사에 가까운 여러 절에서도 얼마든지 새김을 할 수 있다. 몽고와 처절한 전쟁을 벌이면서 언제 함락 당할지도 모를 강화도까지 일부러 나무를 가져가서 경판을 만들었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강화에서 해인사로 팔만대장경을 옮기는 데는 수많은 준비가 필요하고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문제를 단순화하여 생각해보자. 우선 옮기는 준비부터 해인사까지 도착하는 데 필요한 많은 인원을 어떻게 동원했을까? 품삯은 주지 않았더라도 먹이고 재우는 데 들어가는 막대한 경비는 누가 지원했는가? 해인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고, 국가 차원이나 지방 호족의 대대적인 지원이 있어야 한다. 태조 7년이면 조선이 개국하여 10년도 안 된 불안정한 시기이다. 왕자의 난을 비롯한 권력투쟁으로 어수선한 조정에서 시급하지도 않은 대장경판 운반에 엄청난 지원을 할 수 있겠는가? 또 조선은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것을 건국이념으로 출발한 나라다. 백 번을 양보하여 이런 일이 모두 이루어졌다면 ≪조선왕조실록≫이나 해인사 사지를 비롯한 그 어떤 문헌에 왜 기록 한 줄 남아 있지 않는 것일까? 그러나 이런 의문을 풀어줄 자료가 부족하고 부정확하니 다른 방법으로 진실에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해인사에는 우리가 의문을 갖는 대상물인 팔만대장경판이 오롯이 현품으로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궁금해 하는 여러 가지 비밀을 경판 한 장마다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우선 강화도에서 개경포나루를 거쳐 해인사에 이르는 장장 천 리 길을 이동한 경판으로 보기에는 표면상태가 너무 깨끗하다. 육안으로 보아 마모된 흔적이 전혀 없고 글자의 획 하나 달아난 곳이 없다. 경판의 표면을 현미경으로 보면 작은 골이 수없이 져 있는 요철凹凸이다. 여기에 정밀하게 글자까지 새겨져 있으니 조금이라도 서로 닿아 흔들리면 나무 세포가 떨어져 나간 흔적이 생기기 마련이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미경으로는 틀림없이 상처를 찾을 수 있다. 배와 달구지에 싣고 내리고 사람이 이고 지고 하는 과정이 수없이 반복된다. 아무리 포장을 철저히 하고 믿음 하나로 뭉친 승려와 불자가 옮겼더라도 경판은 흔들릴 수밖에 없고 경판끼리 맞닿은 흔적은 남게 마련이다.
경판 새김 글자는 水자처럼 획 끝이 가늘고 날카로운 삐침 부분이 수없이 포함되어 있다. 인쇄할 때 크고 작은 충격을 받고 나무를 썩게 하는 미생물도 가장 많이 활동하는 부분이므로 매우 약하다. 글자 획의 주위는 글자를 새길 때 칼날 자국이 수없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조그만 충격에도 쉽게 떨어져나가 버릴 수 있다. 그러나 8만 천여 장의 대장경판 대부분이 바로 엊그제 글자를 새겨 넣어둔 것처럼 획 하나도 떨어져나간 것이 없다.
다음은 없어지거나 파손된 경판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수기대사가 편찬한 대장목록에 있는 경판이 빠짐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 8만 장이 넘는 경판을 산 넘고 물 건너 천 리 길을 이고 지면서 이렇게 완벽하게 옮기기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둘째, 경판 나무에 거제수나무가 들어 있는 점은 새김 장소를 찾는 중요한 실마리다. 거제수나무는 주로 해발 600~1,000m 사이의 고산에서 자란다. 지리산과 조계산 등 남부 고산 지방에는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나무다. 그래서 거제수나무는 먼 곳에서 일부러 가져다 경판 나무로 이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산벚나무나 돌배나무를 비교적 손쉽게 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높은 산에 자라는 거제수나무를 고생스럽게 베어다 쓸 특별한 이유가 없어서다. 그런데 해인사 인근에는 질 좋은 거제수나무가 흔히 자란다. 따라서 팔만대장경판에 거제수나무가 일부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해인사 주위에서 벤 거제수나무를 사용했음을 시사한다. 해인사를 비롯한 가야산 일대에는 예부터 거제수나무가 많았다. 오늘날에도 성주를 비롯한 해인사 부근의 마을에서는 거제수나무가 ‘거자나무’란 이름으로 곡우 때 수액을 받아 마시는 나무로 널리 알려져 있다.
셋째, 경판 나무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경판을 만든 나무의 대부분인 산벚나무와 돌배나무는 식물학적으로 전국 어디에나 자랄 수 있는 나무다. 하지만 실제로 나무가 벌채된 곳은 남해안 섬과 경남과 전남 일대의 남부 지방이라고 본다. 후박나무 등 따뜻한 남쪽에 주로 자라는 나무가 포함되어 있고 수운을 주로 이용하는 당시의 운반 수단을 생각해 본다면 전쟁 상황에서 비교적 몽고군의 영향을 덜 받은 남해안이라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거제도․남해도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그곳에서 나무를 베어 초벌 경판을 만든 후 해인사 및 그 인근으로 추정되는 새김 장소로 옮기면 된다.
경판의 재질을 중심으로 검토해본 결과 새김 장소가 강화도라는 지금까지의 학설에 동의하기 어렵다. 새김 장소는 해인사 자체 및 인근 지역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더 범위를 넓혀서 검토하면, 거제도 및 남해도를 포함한 남부 섬지방도 일부 새김 장소로 추정할 수 있다.
4. 경판 관련 구전口傳 다시보기
판전 바닥의 숯
판전 건물의 밑바닥에는 숯이 묻혀 있다고 알려져 왔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불교의 최고 경전인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이니 당연히 좋은 나무로 튼튼한 마룻바닥을 설치해야 맞다. 그러나 판전의 바닥은 마루를 깔지 않은 흙바닥 그대로다. 법보전 3곳, 수다라장 4곳 등 모두 7군데를 표본 장소로 선정하여 바닥을 파 보았다. 표토 층에 해당하는 3~5cm 깊이까지는 석회가 혼합된 단단한 층이 있었다. 이는 일제강점기 이후 판전의 보수 때마다 수시로 시행된 강회剛灰 다짐한 것이다.
다음 5~40cm 깊이까지는 기와 및 작은 돌조각, 때로는 생활 도자기 등이 섞여 있어서 다른 곳에서 흙을 가져다 메운 층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40cm 이하 층도 대부분 돌조각이 섞인 층으로 또 다른 메운 층임을 알 수 있었다. 토양 분석 결과, 모래와 점토가 들어 있는 양이 비슷한 사양토砂壤土이며 깊이 내려갈수록 자갈이 많아졌다.
7곳 어디에도 숯이 대량으로 묻혀 있지 않았다. 다만 거의 전체 층에 걸쳐서는 지름 0.4~1cm 크기의 숯이 띄엄띄엄 있을 따름이었다. 이 숯은 소나무 숯으로서 숯가마에서 일부러 구운 것이 아니라 나무를 태우고 난 다음에 검정으로 남는 뜬숯이었다. 이는 요사스런 귀신을 쫓아내는 벽사辟邪의 뜻이거나, 아니면 흙메움할 때 부근에 있던 불 피운 터의 흙이 우연히 섞여 들어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판전 바닥에 숯을 넣어 습도를 조절하고 경판이 벌레 먹지 않도록 조치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배수가 잘 되는 경사지에 위치한 판전 바닥에 구태여 숯을 넣지 않아도, 판전 안 공기가 가지고 있는 수분의 남고 모자람을 흙과 직접 주고받으며 서로 보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흙바닥 그대로의 자연 상태는 과학적으로도 이유 있는 경판 보존 환경이다.
경판의 옻칠
팔만대장경판에는 옻칠이 되어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썩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옻칠 때문에 썩지 않는다는 말은 맞지 않다. 8만 1,258장 모두 옻칠된 것도 아니고, 건조된 나무판이 썩고 썩지 않음에 옻칠은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옻칠은 칠의 두께는 0.011~0.092mm 정도이고, 일반 옻칠과 달리 몇 경판을 제외하고는 안료를 섞지 않아 색깔로 옻칠 유무를 확인하기 어렵다. 옻칠된 부분을 현미경으로 검사해보면 목질부와 옻칠 사이에 먹층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경판을 새긴 다음 몇 번의 인쇄 후 옻칠을 한 것임을 뜻한다.
옻칠은 여러 가지 안료顔料를 섞어 표면을 아름답게 함은 물론 습기를 차단하여 썩지 않고 벌레의 침입을 막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통풍이 잘 되는 건조한 곳에 보관된 대장경판은 옻칠이 경판의 보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기는 어렵다. 공기 중에서 잘 말린 나무의 함수율은 15% 정도인데, 이런 상태에서는 옻칠을 하지 않아도 나무가 썩을 염려는 없다. 옻칠은 제기나 밥상, 승려의 발우 등 물과 자주 접촉하는 도구에서 물이 나무속으로 침투할 수 없게 차단해주어 나무를 썩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팔만대장경판처럼 항상 말라 있는 판자에는 옻칠이 경판 썩음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경판의 바닷물 담그기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경판 만들 나무를 베어 바닷물에 3년을 담가두었다고 한다. 썩고 벌레 먹는 것을 막고 재질이 견고해지도록 이런 조치를 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랬을까? 바닷물의 염분농도는 3.5%에 불과하여 썩음을 막고 벌레가 덤비지 않게 하는 효과는 그렇게 크지 않다. 바다 속에 오래 두면 오히려 바다나무좀이나 천공충穿孔蟲 등 해양 생물의 피해를 받기 쉽다.
나무껍질에는 물이 들어갈 수 없는 수베린이라는 물질이 있어서 껍질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가기도 어렵다. 실제로 남해 앞바다에다 산벚나무 통나무를 3년 동안 담가둔 후 바닷물이 들어간 깊이를 조사해보았더니 나무껍질 아래로는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바닷물에 3년 담갔다는 이야기는 일부러 시간을 정해두고 반드시 시행한 경판 제작의 필수 과정은 아니다. 경판 나무를 현장에서 켜지 않고 통나무 상태로 운반하는 경우가 있었다면, 뗏목으로 바다를 지날 때 자연스럽게 바닷물에 몇 년씩 담가지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판 새김에 쓰인 판자는 소금물 삶기가 필수였다고 본다. 관련 문헌이나 과학적인 상식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서유구는 ≪임원경제지≫ 이운지怡雲志에 목판을 만드는 방법과 인쇄 후의 보관 방법을 적어놓았다. 즉, 나무를 켜서 판자를 만든 다음 소금물에 삶아내어 말리면 판이 뒤틀리지 않고 또 조각하기도 쉽다라고 했다. 옛 사람들도 목판을 만들면서 먼저 소금물에 삶아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소금물 처리라는 이 방식은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 아니라 말리는 과정에 생기는 나무의 갈라짐, 틀어짐, 굽음 등의 여러 가지 변형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나무속에 있는 수분이 표면으로 이동하여 수증기가 되어 대기 중으로 날아가는 과정이 건조다. 복잡한 세포 구조를 가진 나무는 속에서 겉으로 수분이 이동해 나오는 속도보다 표면에서 수증기가 되어 날아가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특히 경판 나무처럼 두꺼운 판자는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하다. 따라서 나무 표면은 안쪽보다 더 빨리 건조되면서 강하게 옥죄는 상태가 된다. 결국 나무 표면과 안쪽은 힘의 균형이 깨져 갈라지거나 휘게 된다. 그러나 판자를 소금물에 삶으면 수분을 흡수하는 성질을 가진 소금기가 나무 표면에 발라진 상태가 된다. 이 상태로 그늘에 놔두면 표면이 약간씩 흡습하면서 나무가 마르므로, 건조 속도는 느리지만 갈라짐과 휨이 적은 판자를 얻을 수 있다. 이외에도 판자를 삶는 처리는 나무의 진을 빼고 판자 내의 수분 분포를 균일하게 하며 나뭇결을 부드럽게 하여 글자 새기기를 쉽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 아울러서 숨어 있던 벌레 알들이 경판을 새긴 후 애벌레가 되어 경판을 파먹지 않도록 예방하는 효과도 겸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통나무를 바닷물에 3년 담가두었다는 구전은 경판 제작 과정의 필수 요건은 아니다. 운반과 보관 과정에 취급 편의를 위해 있을 수 있었던 일일 뿐이다. 또 기간이 3년이라는 것은 삼세판등 좋은 일을 일컫는 말일 뿐 꼭 그 기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경판을 만들 판자는 경판재가 휘거나 갈라지지 않고 충해를 먹지 않게 하기 위해 ≪임원경제지≫의 기록처럼 반드시 소금물에 삶아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