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켜준 상수리나무
고등학교 시절을 나는 외톨이로 보냈다. 내성적이고 남과의 어울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다. 쉬는 시간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기보다 혼자 교정 한 구석의 작은 숲을 즐겨 찾아다녔다. 변두리 야산을 깎아 지은 신설학교는 조경을 제대로 하지 않아 황량했고 가까이 화장장마저 있어서 으스스하기 까지 했다. 그나마 소나무와 도토리나무 몇 그루가 만들어 준 자그마한 이 숲이 사춘기의 나를 보듬어 준 유일한 녹색공간이다. 제법 커다란 바위돌이 놓인 도토리나무 한 그루가 마음속의 내 나무였다. 가을날에 도토리라도 주우면 마르기 전에 반을 잘라 글자 새기기를 좋아했다. 내가 즐겨 새기든 글자는 ‘꿈’이었다. 꿈의 실체는 무엇일까? 차츰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들면서 멋진 소설을 써 보는 것이 내 꿈임을 깨달았다. 1학년 겨울 방학 때 쯤 경쟁 없는 학내 신문에 내 이름으로 된 단편소설 하나를 싣고 나서는 제법 문학청년이나 된 것처럼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이후 교과서 이외의 다른 읽을거리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등굣길의 길목에 자리 잡은 헌 책방을 뒤지다가 발견한 책은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가 들어있는 단편집이었다. 내 주머니에는 학교에 내야할 등록금이 전부였다. 너무 갖고 싶어서 앞뒤 따져 볼 겨를이 없이 구입해 버렸다. 교과서 이외에 내가 돈 주고 산 첫 책이라는 기쁨이 더 컸다. 집에서는 내 놓고 읽을 수 없다. 책가방 깊숙이 넣어 두었다가 학교 와서 쉬는 시간에 잠깐씩 꺼내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2학년 올라오면서 만난 나의 짝은 외톨이의 작은 즐거움도 빼앗아가 버렸다. 그는 누구나 알아주는 학내의 ‘주먹’이었다. 내가 얌전하고 공부를 조금 잘했다는 이유로 그와 짝이 된 것이다. 만남의 순간부터 소심한 나는 혹시라도 행패를 당할까봐 숨도 크게 못 쉬고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평소에 인쇄물이라면 쳐다보기도 싫어했지만 내가 틈틈이 꺼내보는 작은 단행본에는 금방 관심을 나타냈다. ‘소설책이구먼. 나 좀 빌려줘’라고 한다. 말이 빌려달라는 것이지 그대로 없어질 것이 뻔하다. 하지만 행패가 두려우니 거절할 처지가 아니다. 돌려주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현실이 됐다. 문학수업의 유일한 길잡이였던 단편집을 빼앗기고부터 소설가의 꿈도 시들해져 버렸다. 곧 고3이 되어 입시준비를 해야 하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대학을 선택하면서 고민이 왔다. 국문과? 아무래도 교내 신문에 겨우 글 한편 실은 실력으로는 자신이 서지 않았다. 결국 엉뚱한 농과대학으로 결론이 났다. 입학을 하고 나니 잠시 손 놓았던 글쓰기 향수에 빠졌다. 목표는 ‘대학신문’이었다. 고등학교 교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전문가들이 포진한 곳이니 일정한 수준을 갖추어야 한다. 몇 번 투고를 해봤지만 번번이 실패였다. 대학 3학년 여름 방학 때 내가 꿈을 키우던 교정의 작은 숲을 다시 찾아갔다. 전공이란 업(業)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갓 배우기 시작한 수목학의 지식으로 보니 이곳 도토리나무의 진짜 이름은 상수리나무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참나무의 대표나무이며 이곳처럼 야산 자락에 소나무와 적당히 섞여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도토리나무의 특징이 흉년에는 풍년 대보다 훨씬 더 많은 도토리를 매달아 가난한 서민들의 배고픔을 달래주는 것이다. 육신은 베어져 기둥으로 쓰이고 때로는 땔감으로 숯으로 두두 두루 쓰이는 고마운 나무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 꿈이 이루어지기를 다짐하던 상수리나무 밑 바위에 걸터앉았다. 퇴짜 맞은 내 글을 생각하니 괜히 억울하다. 어린 시절 당산나무에 열심히 소원을 빌던 할머니가 생각났다. 거친 나무껍질을 어루만지면서 한번만이라도 내 글이 활자화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애당초 빌어서 소원이 이루어질 일은 아니었다. 원인 분석에 들어갔다. 결론은 금세 나왔다. 천하의 재주꾼도 피나는 연습으로 기술을 갈고 닦지 않으면 빛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뒤늦게 터득한 것이다. 글쓰기도 다를 바 없다. 건방지게 다른 사람의 글은 잘 읽지도 않고 자기 글을 쓸 생각만 하였으니 제대로 된 글이 나올 리 없다. 그때부터 교양도서를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전공과 무관한 철학, 문학, 예술 등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오늘날 내가 알고 있는 책이라면 대부분 그 때 읽은 것들이다. 조금 눈이 뜨이고 나니 이제는 글을 한 줄도 쓸 수가 없다. 옛날 글들이 너무 유치하고 말장난에 불과한 것 같아 습작으로 써둔 글을 모두 없애 버렸다. 이후 40여 년 동안 전공에 관련된 논문을 쓰는 것 이외에는 일반 글쓰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1998년 영남일보에서 ‘나무이야기’란 제목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글을 연재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나무라는 테마 자체가 전공 냄새가 풍기지만 모든 사람들이 함께 호흡하는 글을 쓰자는 것이다. 연재가 시작되면서 다시 어려움에 처했다. 나무에 관련된 전문적인 지식 이외에는 별로 쓸 말이 없어진 것이다. 가벼운 읽을거리가 될지언정 글 깊이가 없다는 자책에 빠졌다. 부랴부랴 관련 책을 들추기 시작했다. 폭넓은 교양을 쌓기 위한 독서가 아니라 당장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책만 골라 읽은 수단으로서의 책 읽기였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나무를 주제로 한 글쓰기를 다시 시작한 이후 20여년 가까이 나무와 관련된 수백편의 글을 쓰고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나의 글쓰기 꿈을 키워준 그 상수리나무의 안부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어렴풋한 기억을 되살려 아파트 단지가 되어 버린 고등학교 교정을 찾아 나섰다. 아무리 둘러봐도 기억의 흔적은 실마리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잘 된 것인지도 모른다. 강산이 다섯 번이나 변하는 세월동안 힘든 나무 살이에 지친 ‘나의 상수리나무’를 다시 만나면 실망하기 십상이다. 옛날의 그 싱싱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내 머릿속의 영원한 멘토로 남아있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마치 첫사랑의 여인은 만나지 않은 것이 나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