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잠의 ‘대마왕’ 류택규 교수와의 인연
경북대 명예교수 박상진
지나간 세월을 이야기 할 때 우리는 흔히 4반세기, 반세기, 1세기의 단위로 예를 든다. 원광대학교 류택규 명예교수와 필자의 인연은 반세기, 꼭 50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너무나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눈을 감으면 금방 젊은 날의 그가 떠오른다. 깔끔한 외모에 웃음이 마르지 않은 첫인상은 팔순을 맞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오늘날도 80은 적은 나이가 아니다. 옛날에는 더 더욱 그랬다. 팔순을 맞으면 나라에서는 조장(朝杖)이라는 명아주 지팡이를 하사했다. 좋은 지팡이는 청려장(靑藜杖)이라 하는데 한해살이 풀인 명아주 줄기를 말려서 만들었다. 가벼우면서도 단단하고 울퉁불퉁한 옹이가 지압 효과도 준다고 한다. 그러나 류교수에게 지팡이는 아직 먼 훗날일 만큼 건강하고 활기 넘친다. 축복받을 일이다.
임업시험장 산림토양과에서의 첫 만남
1968년 2월, 아직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어느 추운 날 필자는 당시 임업시험장 토양과를 찾았다. 물론 이는 모두 옛날 이름이고 지금은 산림과학원 산림보전부 산림복원연구과가 되어있다. 필자는 1963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ROTC 복무 2년을 마치고 엉뚱한 곳을 헤매다가 전공이라고 처음 찾은 길이니 설렘이 있을 법하건만 날씨만큼이나 주눅이 들어 있었다. 신분이 오늘날로 따지면 비정규직, 당시에는 ‘인부사역부’에다 매일 도장 찍고 일당을 받는 신세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몇 달 지나면서 조금씩 익숙해지고 주위를 둘러보니 동료와 상사 모두 다 좋은 분들인데, 재미있는 현상을 찾을 수 있었다. 별명을 모아보니 규모는 작아도 ‘동물원’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었다. 과장님은 성함을 아예 잊어 버려 생각이 나지 않는다. 계장님은 아주 오래전에 고인이 되신 정인구 선배님, 이의 없는 당나귀다. 인부사역의 정규직 책임자 임업연구사 두 분 중 한분이 류교수다. 택규란 이름은 직원들 사이에 ‘류토끼’가 되어 있었다. 별주부전에서 자라한테 속아, 용궁까지 갔다가 간을 육지에 두고 왔다는 핑계로 위기탈출을 하는 지혜의 화신이 토끼다. 류교수는 별주부전 토끼만큼 충분히 지혜로워 별명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또 한분은 고인이 된 이경한 연구사, 푸짐한 체구 덕분에 두말 않고 별명은 곰이었다. 필자와 대학동기이면서 대학원 출신에다 먼저 입사한 탓에 필자보다 일당을 더 많이 받아 내내 배 아파했던 마상규 박사는 군말 없이 말이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마박사와 함께 일하던 직원은 성이 풍(馮)씨, 파자를 해보면 말이 물에 빠진 것이니 말이 또 있는 셈이다. 말을 밀어서 물에 빠트리면 ‘풍!’ 소리가 난다고 놀리던 일이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 외 여직원 미스 정, 역시 당나귀다. 필자 또한 초등학교 때 별명은 고양이었다. 내가 다니던 시골 초등학교에서는 고양이를 ‘살찐’이라 했는데 상진이란 이름과 비슷하다는 이유에서다. 이렇게 따지면 당시 토양과는 당나귀 둘, 말 둘, 곰, 토끼, 고양이까지 있으니 실례지만 작은 동물원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동물원’ 식구들은 모두 사이가 좋았다. 정인구 계장님을 빼면 나이 또래가 거의 비슷했다. 류교수와 이경한씨가 58학번, 마박사와 필자가 59학번이다. 필자를 빼면 모두 성격이 무난하여 서로 장난이 심했다. 그것도 그냥 장난이 아니라 마주치기만 하면 상대방의 급소 붙잡기로 날을 지세는 유치한 장난이다. 다른 직원들이 보기에는 민망하고 얼굴 찌푸릴 장난이었을 터이다. 여직원들이 성희롱이라고 들고 일어날 수 있는 일, 요즈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난이다. 다만 류 교수에게 이런 장난을 자주 벌리지는 못했다. 총각인 우리들과는 달리 결혼한 그에게 급소잡기와 같은 일은 절대 해서는 안 될 장난으로 생각해서다.
광릉시험림(국립수목원)에서의 추억
필자가 맡은 업무는 토양조사였다. 우선 교육을 받으러 오늘날의 광릉수목원, 당시에는 임업시험장 중부지장 광릉시험림으로 출장을 잘 갔다. 류교수 역시 임지 비배(肥培) 관련 시험사업을 하느라 출장이 잦았고 고려대 후배이기도 한 고봉순씨와 동행이 많았다. 류교수는 당시 신혼이었는데 젊은 여자와 함께 둘이서 조사를 위하여 숲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잦았다. 이를 모르는 마을 사람들의 오해를 사서 혼났다는 일화를 류교수를 통하여 여러 번 들었다. 필자는 입사동기인 고씨와 비교적 가까이 지냈고 덕분에 친구를 소개받는 혜택도 누렸다. 고씨가 광릉에 출장 가 있을 때는 말벗도 되고 밤에 무서움도 피할 수 있어서 나에게 소개해준 친구를 데려오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 필자와 만나는 기회를 더 많이 주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이런 인연으로 급속히 가까워져 오늘날 필자와 평생을 함께하는 ‘할멈’은 바로 고씨가 소개한 그 친구다. 류교수의 의도된 계획은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부부의 중신아비가 된 셈이라 나와의 인연은 남다르다.
광릉에서의 숙소는 육림호 가장자리에 있는 기숙사였다. 물론 지금은 철거되어 없어지고 찻집이 들어서 있다. 오월 어느 날 아침 육림호로 세수하러 갔다가 잉어를 맨손으로 잡은 행운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산란기가 되어 물가로 천천히 지나가는 잉어를 손을 넣어 가랑이 사이로 던져서 잡았다. 자전거도 제대로 타지 못할 만큼 운동신경이 둔한 필자가 맨손으로 잉어 잡은 무용담은 지금도 유일한 자랑거리다.
금곡리 마을에서의 한 평생
류교수에 대하여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은 그의 잠자는 방식이다. 사무실이건 버스 안이건 머리만 대면 잠이 든다. 한마디로 쪽잠의 ‘대마왕’이다. 머리가 무거울 때 잠깐의 쪽잠은 잠시 피로회복을 할 수 있어서 상쾌하게 다시 일 할 수 있는 청량제다. 자투리 시간의 활용방법으로 더 이상 좋은 방법은 없다. 류교수가 언제나 성실하고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 이 쪽잠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필자는 불필요하게 예민하여 쪽잠은 물론이고 밤잠도 설치는 경우가 많아 쉽게 잠드는 류교수를 항상 부러워했다. 쪽잠을 자고 싶다고 아무나 잘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타고나야 한다. 그는 조상으로부터 정말 좋은 자산을 물려받은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지 궁금하다.
물려받은 것의 부러움은 또 있다. 선대께서 자리 잡은 그 땅과 그 집을 지금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처럼 한곳에서 평생을 사는 일이 거의 없을 만큼 이사가 잦은 시대에 쉽지 않은 일이다. 특별히 조상의 은덕을 입어야 한다. 금상첨화로 땅값은 얼마나 올랐는가?. 필자처럼 경상도 산골을 고향으로 둔 탓에 땅값 혜택은 고사하고 한 번씩 가기도 어려운 처지에는 더 더욱 부러운 일이다. 네이버 항공사진으로 주소를 입력하여 위성을 타고 류교수 집을 내려다보았다. 전형적인 도시 근교의 평안한 마을 가운데 번듯한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위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다. 아버님이 물려주신 고택이다. 널찍한 텃밭을 포함한 아담한 옛집에서 어린 시절부터 노년을 맞은 지금까지의 추억을 반추하는 생활이니 얼마나 뜻 깊은 일인가?. 몇 년 전부터 한번 집에 오라는 초청만 받고 아직 가지 못했다. 이제 땅이 풀리면 옛 토양과 ‘동물원’ 팀의 일원들과 꼭 한번 가야 되겠다.
에필로그
천하장사도 가는 세월을 잡지 못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언제 어디서 봐도 씩씩하고 활기찬 동안(童顔)의 류교수가 팔순이라니 믿기지 않은 현실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숨 가쁘게 달려온 인생역정에서 큰 전환기를 맞는 시점에 와 있다. 삶의 길이로 80년, 나무와 맺은 인연의 길이로는 60년이 훌쩍 넘었다. 류교수는 광동산림고등학교 출신이다. 고등학교부터 나무와 함께하는 세월을 보낸 탓에 다른 이보다 유난히 나무와 인연의 길이가 더 길다. 눈을 감고 생각해 보면 순간이지만 실제로는 길고 아득한 시간이다. 인생을 되돌아보면 누구나 이루지 못한 미완성의 아쉬움을 갖게 마련이다. 미완성을 가슴에 안고 숨 가쁘게 달려온 긴 여로의 골인 지점에 서 있다. 이제 달음질을 멈추고 조금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면서 영겁의 세계로 육신이 떨어져 버리는 그날 까지 한 발짝 한 발짝 걸어가야 할 뿐이다. 회한이 없고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이다. 그러나 이제 지나온 세월일랑 가슴 속에 고이 묻어 두어야 할 시점인 것 같다. 아름다운 추억의 지난 세월보다 더 짧아진 앞날을 조용히 셈해 보아야할 나이에 와 있다는 현실을 아쉽지만 받아들여할 시간이다. 법정스님이 남긴 무소유의 위대한 메시지처럼, 혹시라도 남은 회한과 아쉬움이 있다면 모두 버리시고, 오직 건강을 챙겨야 할 오늘을 흔쾌히 받아드리시기 바랍니다. 만수무강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