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그루의 등나무가 팽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완전히 뒤덮고 있다. 등나무의 특성상 서로 얼키고 설켜서 꼬여있기도 하여 정확하게 한 그루 한 그루를 구분하기조차 어렵다. 비교적 넓은 면적에 여러 그루의 팽나무가 서있어서 타고 올라가는데는 지장이 없으나 광합성을 못한 팽나무는 곧 죽게 되어있다. 팽나무는 굵기로 보아 150-2백년정도로 보이며 큰 등나무가 있는 쪽에는 옆에 있는 아까시나무까지 타고 올라가 아예 나무가 넘어진 상태이다. 가슴높이의 지름은 20㎝, 40㎝(2그루) 및 50㎝로서 높이는 12m 정도이며 동서 쪽으로 20m, 남북쪽으로 50m 정도 퍼졌다. 주위는 亞자 모양의 쇠울타리가 쳐져 있고 팽나무 이외에도 두 그루의 감나무가 있으며 죽은 고목도 몇 그루 보이고 울타리를 따라 무궁화 10여 그루가 심겨져있다. 알려지기로는 이 일대가 연못이었다고 하는데, 바로 옆이 소현천이라는 개울이 있고 지대가 낮아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 주위의 지표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안압지에서와 마찬가지로 많은 유물을 얻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곳은 신라시대에는 임금님이 신하와 더불어 사냥을 즐기던 곳으로서 용림(龍林)이라고 불렀다한다. 이 등나무의 다른 이름은 용등(龍藤)이라고 하는데 이는 용림에서 자라는 등나무란 의미이거나 구불구불한 줄기가 마치 꿈틀거리는 용같이 보이는 데서도 유래된 것 같다. 이 용등의 꽃을 말려서 신혼 금침에 넣어주면 부부의 정이 더욱 두터워진다고 하며 또 부부의 사이가 벌어진 사람들이 이 나무의 잎을 삶은 물을 마시면 그들의 애정이 회복된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동란 이전까지만 하여도 지름이 거의 1m나 되는 등나무가 자라고 있었다한다. 지금의 등나무는 없어진 원줄기의 가지가 다시 자란 것이다. 나무에 얽힌 전설 신라 때 이 마을에는 얼굴도 곱고 마음씨도 착한 자매가 살고 있었고 바로 옆집에는 씩씩 하고 늠름한 한 청년이 있었다. 자매는 오래 전부터 옆집의 청년을 사모하고 있었으나 서로 마음 속의 비밀을 터놓지 않았으므로 어느 누구도 몰랐다. 세월이 흘러 옆집의 총각이 싸움터로 떠날 때 두 자매는 비로소 한 남자를 같이 사모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남달리 다정하고 착한 자매였음으로 서로 양보하기로 굳게 결심하고 있었다. 어느 날 뜻하지 않게 청년이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된 자매는 서로 얼싸 안고 울다울다 지쳐서 연못에 몸을 던져 버렸다. 그 후 연못가에 두 그루의 등나무가 자라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죽었다던 옆집의 총각은 훌륭한 화랑이 되어 돌아왔다. 세상을 등진 자매의 애달픈 사연을 들은 청년 화랑은 자기도 용림에 몸을 던졌는데, 그 자리에는 등나무가 타고 올라 갈 수 있는 팽나무가 자라기 시작하였다한다. 그래서 오늘날 자매의 혼이 깃든 등나무는 총각의 화신인 팽나무를 얼싸안듯이 타고 올라간다고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의 이 용등은 자매의 사랑이 너무 진한 탓인지, 등나무에 감싸인 팽나무는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 용등을 조금 잘라주어 팽나무가 숨이라도 쉴 수 있게 하여야 애잔한 전설을 갖고 있는 이 나무의 의미를 살릴 수 있을 것 같다. 등나무 이야기 콩과 (학명) Wisteria floribunda A.P.DC. (영명) Japanese Wisteria (일명) トヨウフジ (漢) 藤, 紫藤 사람과 사람사이에 다툼이 생겨 잘 풀리지 않으면 흔히 갈등(葛藤)이 생겼다고 한다. 바로 갈은 칡이고 등은 등나무를 말한다. 생김새는 둘이 전혀 다르나 살아가는 방식은 비슷하다. 혼자 주위의 다른 나무들과 피나는 경쟁을 하여 살아가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손쉽게 다른 나무의 등걸을 감거나 타고 올라가 어렵게 확보해 놓은 광합성의 공간을 혼자 점령해버리는 횡포를 서슴치 않는다. 질서를 지키지 않은 칡이나 등나무가 선의의 경쟁에 길들어 있는 숲의 질서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다. 갈과 등이 자랄 때 생기는 이런 현상이 바로 갈등이다. 옛 조선조의 선비들은 등나무의 이와 같은 특성이 대단히 못마땅하였다. 조선 중종 32년(1537) 홍문관 김광진 등이 올린 상소문에 '대체로 소인들은 등나무 덩굴과 같아서 반드시 다른 물건에 의지해야만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하였고 중종34년(1539) 전주 부윤 이언적의 상소문에도 '군자는 소나무나 측백나무 같아서 홀로 우뚝 서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지만, 간사한 사람은 등나무나 겨우살이 같아서 다른 물체에 붙지 않고는 스스로 일어나지 못합니다'고 하여 가장 멸시하던 소인배와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갈등을 빚는 나무이던 소인배의 나무이던 관념적인 비유일 뿐이고 등나무만큼 유용한 나무도 없다. 흡사 아까시나무 잎 같으나 더 뾰족하고 작으며 한 여름의 뙤약볕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 주고 5월이 되면 연한 보라 빛의 꽃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모양은 녹음수로서만 아니라 꽃나무로서도 제 몫을 톡톡히 한다. 보드라운 털로 덮힌 열매는 콩 꼬투리 모양으로 너무 짙푸른 등나무 잎사귀를 부드럽게 하는 엑센트를 준다. 알맞게 자란 등나무 줄기는 지팡이 재료로 적합한데 영조41년(1764) 임금이 나이가 들어 걷기가 불편하자 신하들이 만년등(萬年 ) 지팡이를 받친 기록이 있다. 덩굴은 바구니 같은 것을 만드는 데 쓰이기도 하며 껍질은 매우 억세고 질겨 새끼를 꼬는 데, 또는 키를 만드는 데 쓰인다. 등나무 이야기에서 빠트릴 수 없는 것은 등가구에 쓰이는 '등나무'이다. 우리 주위에서 보는 쌍자엽 식물인 등나무와는 사돈의 팔촌도 넘는 전혀 다른 나무이다. 등가구의 등나무는 단자엽 식물이며 rattan라는 이름을 가지고 열대지방에 자란다. 쉽게 말하여 대나무의 일종인데 속이 꽉 차있는 것이 우리의 대나무와 차이점이다. 수십 미터씩 자라고 쉽게 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가구 만들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등나무는 서울 국무총리 공관에 있는 천연기념물 254호, 경주시 건곡면 오류리의 89호, 부산 동래 범어사에 있는 176호 자생지 유명하다. 추운 북한보다는 남한에 주로 자라며 잎이 떨어지는 덩굴나무이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한 대궁에 열대여섯개의 약간 길죽한 작은 잎이 달린다. 사람들은 여름 뙤약볓을 피하기 위하여 주로 등나무를 심지만 4-5월에 늘어져 피는 연 자주 빛 꽃의 화사함을 보노라면 흔히 말하는 녹음수가 아니라 꽃나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열매는 보드라운 털로 덮힌 콩꼬투리 모양으로 9∼10월에 익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