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이북의 고산지대에 자라는 상록 침엽수이다. 줄기는 옆으로 눕거나 아래로 처지면서 자라는 생태적인 특성이외에는 향나무와 비슷하다.
열매의 크기가 향나무보다 작고, 눈향나무는 잎 표면에 흰 줄이 2줄인 것에 비하여 향나무는 3줄이다. 평지에 심어도 눕는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므로 정원수로 흔히 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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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우리의 느낌은 아름드리 굵기에 우람한 덩치이다. 그러나 모든 나무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나무나라에서도 좋은 혈통을 물려받아 다른 나무들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지배계층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자라도 땅딸보를 못 면하는 나무, 평생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나무, 다른 나무를 감아 올라가는 나무들까지 자람의 형태는 천차만별이다. 곧 바르게 아름드리로 자라는 이런 명문가의 나무들은, 자라기 좋은 장소를 선택하여 자자손손 자리를 물려가면서 끼리끼리 잘 먹고 잘 살아간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유전형질을 물려주더라도 자리를 한번 잘 못 잡으면 옮겨 갈수 없으니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기 마련이다.
설악산, 소백산 등 중북부의 높은 산꼭대기에 가면 이름에 ‘눈’이란 접두가 붙은 나무들이 자란다. 눈향나무, 눈잣나무, 눈주목이 그들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이렇게 누운 나무들이 아니다. 새나 동물들에게 종자가 먹혀, 원치 않는 높은 산꼭대기에 강제이주를 당하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억센 바람은 한쪽 방향으로 계속 쓰러트린다. 처음 그들이 터를 잡았을 때는 선조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늠름한 아름드리나무로 자라려고 시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몇 대를 거치면서 이런 일들이 부질없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환경에 적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한 이들은 몸체를 아예 옆으로 눕혀 버렸다. 어차피 산꼭대기에는 아무리 명문 집안의 나무라도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일은 가능하지 않으니 그로서도 변명의 여지는 있다. 누워서 오래 살다보니 선조들의 유전형질을 어느덧 잊어버렸다. 그래서 평지에다 옮겨 심어 놓아도 여전히 누워서 자란다.
조경수로 평지에 내려온 후는 바람도 추위도 없고 사람들이 비료까지 주면서 극진히 보살핀다. 그래도 영영 일어나지 않는다. 누운 나무들은 바로 오늘의 우리들을 되돌아보게 한다. 현대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타성(惰性)이라는 덫에 걸려 살아간다. 누운 나무들처럼 영원히 누운 채로 굳어 버리지 않도록 때때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가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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