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판 - 그 실체를 알아본다.
개 요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일명 고려대장경판)은 고려 고종 23년인 1236년부터 38년인 1251년까지 16년간에 걸쳐 제작된 81,258여장의 목판으로서 상하 두 채의 목조건물인 수다라장과 법보전의 판가(板架)에 칸 당 2층씩 5층으로 경판을 세워서 이중으로 포개어 놓았다. 이를 정장이라 하고 동 서 양쪽에 있는 사간장(寺刊藏)에는 새긴 연대가 명확하지 않은 잡판(雜板)이라고 부르는 경판과 함께 고려각판 2,835장의 경판이 보관되어 있다.
대장경판의 재질은 지금까지 자작나무로 알려져 왔으나 전자현미경을 이용한 조사결과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 대부분이고 자작나무는 거의 없었다. 경판은 원목을 벌채하여 우선 바닷물에 담구어두고 필요할 때 제재한 후 찌거나 그대로 음지 건조하여 표면에 대패질하고 글자를 새겨 넣은 것으로 생각된다. 경판은 글자를 새겨 넣은 부분과 양 가장자리에 경판이 서로 맞닿아 글자가 마멸되는 것을 방지하고 인쇄를 할 때 취급편의를 위한 마구리로 구성되며 구리로 만든 얇은 판으로 고정하여 놓았다.
마구리를 포함한 총 길이는 68 혹은 78㎝짜리가 대부분이며 폭은 약 24㎝, 두께는 2.7-3.3㎝의 범위이고 평균 약 2.8㎝, 무게는 경판의 재질에 따라 4.4kg까지 나가는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3∼3.5㎏정도이다.
경판에는 새겨진 글자 수가 23행 14자 이므로 한면에는 322자이고 양면을 합치면 644자가 새겨져 있는 셈이며 대장경판 전체로 볼 때는 5천2백여만자가 되는 셈이다. 글자는 구양순체로서 한 사람이 쓴 것처럼 거의 동일한 필치로 오자나 탈자가 거의 없다.
경판의 보존상태는 750여년이 지난 목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나 근세에 들면서 많은 관람객의 출입으로 경판에는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다. 또 인쇄를 할때 먹과 함께 사용한 전분질의 식물성 풀은 인쇄 후 충분히 제거하지 않아 글자 부분에는 먹의 두꺼운 층이 형성되어 있는 경판이 상당수에 달한다. 상당수의 경판에는 옻칠이 되어 있다. 또 일부 경판은 갈라지거나 너비굽음 등의 결함이 나타나고 있어서 보다 완벽한 보존 대책이 필요하다.
서술의 구성과 내용
1. 대장경이란 무엇인가?
대장경이란 불교교리를 종합편찬한 성서로서 일체경·삼장경 또는 장경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의 삼장으로 구성된다.
2. 왜 대장경판을 제작하게 되었는가?
대장경판을 판각하기 이전에는 우리 나라와 중국 및 거란에 있었든 북송칙판대장경(北宋勅板大藏經), 초조고려대장경, 거란대장경, 의천의 고려속장경, 고려재조대장경판등 대장경판의 종류와 동국이상국집에 실려있는 이규보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등이 있다.
3. 대장경판에는 무슨 나무를 사용하였는가?
대장경판의 재질은 자작나무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산벚나무와 돌배나무를 비롯하여 자작나무류, 후박나무류, 단풍나무류, 층층나무류, 사시나무등 여러 수종으로 제작되었다.
4. 과연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옮겨왔는가?
대장경판이 해인사에 보관되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설이 많다. 원래부터 해인사에 있었다는 재래설(在來說), 강화도에서 옮겨왔다는 강화출육설(江華出陸說)-이는 다시 고려말설(高麗末說), 정축년출육설(丁丑年出陸說), 태조7년설(太祖七年說)이 있다.-를 비롯하여 심지어는 대장경판이 해인사에 있는 1벌만이 아니고 2벌 있었다는 대장경판 2벌설 까지 대단히 다양하다. 눈이 셋 달린 귀신과 이 거인에 관한 해인사 고문의 내용도 알아본다.
5. 옮겨오는 과정에 일어나는 문제점은?
해인사 대장경을 강화도에서 옮겨오는 과정에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검토해 보았다.
6. 대장경은 어떻게 인쇄하였는가?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태종13년3월11일조에 {경판 인쇄용지 2백 60속(束)을 해인사로 수레에 실어 보내니 대장경을 인쇄하고 여기에 관련된 여러 사람과 중 2 백 명에게도 보수를 모두 지급토록 하라.} 등의 단편적인 기록밖에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1915년 팔만대장경 전체를 인쇄하면서 {고려대장경 인쇄전말}이라는 보고서가 남아 있어서 그 내용을 알아본다.
본 문
1.대장경이란 무엇인가?
지금으로부터 2540년 전 석가모니는 고대 인도의 작은 한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걸어나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왜쳤다하며 장성하자 입산수도하여 도를 깨닫고 돌아가실 때까지 49년 동안 스스로 갖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포교활동을 거듭하면서 수많은 부처님 말씀을 남겼다. 그러나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글로 쓰여진 불교경전은 편찬하지 않았으므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체계화하고 편찬할 간절한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대장경이란 불교교리를 종합편찬한 성서로서 일체경(一切經)·삼장경(三藏經) 또는 장경(藏經)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의 삼장으로 구성된다. 삼장이란 인도의 고대언어인 산스크리트語(梵語)의 Tripitaka를 한문번역한 말로서 세 개의 광주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경장이란 부처님께서 따르는 제자와 중생을 상대로 설파하신 내용을 기록한 "경"을 담아 놓은 광주리란 뜻이고, 율장은 제자들이 지켜야 할 논리의 조항과 그밖에 공동생활에 필요한 규범을 적어놓은 "율"을 담은 광주리란 뜻이다. 논장은 위의 "경"과 "율"에 관하여 스님들이 읽기 쉽게 해설을 달아 놓은 것으로서 "논"을 담은 광주리란 뜻이다.
처음 이 세 가지 종류의 부처님 말씀을 기록하기 위하여 대나무, 나무 잎사귀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하였으나 부처님이 태어나신 아열대지방의 기후로는 오랫동안 보존할 수 없었으므로 썩어 못쓰게 되면 다시 만드는 일을 반복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기록의 내용은 조금씩 달라지고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불교의 여러 종파들은 이 제각기 다른 대장경이 기록으로 남겨졌으며 대표적인 것이 지금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된 Tripitaka이다.
차츰 여러 종파의 인도불교는 소승불교에서 중생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불타의 경지에 다다르게 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은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나 통합이 되고 경·율·논의 삼장의 내용을 정비하면서 인도를 중심으로 포교의 범위를 넓혀갔다. 그러나 여전히 체계가 잡힌 대장경이 완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중국으로의 포교활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중국에 불교가 전해지면서 인도어로 된 불경들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문제이었고 처음에는 산발적이었든 번역사업이 포교활동과 함께 당시 나라를 통치하던 지배계층이 관심을 갖게 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통치의 한 수단으로서 불경의 번역사업은 국가적인 행사가 되었으며 최초로 동진(東晋)의 도안(道安,344-385)이 한(漢)나라 이래의 각종 번역불경의 총목록을 작성한 이후 당나라 개원(開元)18년인 730년에는 지승(智昇)이 쓴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이라는 번역서의 목록 등은 번역 불경을 정리한 좋은 예이었다.
중국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져오든 불경의 번역사업은 체계적으로 정리되기 시작한 것은 양진(梁陳)시대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실제로는 수.당시대 까지도 손으로 베껴 쓰는 필사본의 수준을 넘지 못하였다. 필사본 번역불경은 옮겨 쓰는 과정에 이중으로 번역되거나 잘못 옮겨쓰는 등 부정확하고 종이가 흔치 않았든 시절이므로 대나무, 나무 잎사귀, 나무껍질 등을 사용하여 보관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자 목판에 새겨 기리 간직하려는 움직임을 낳았다. 이전까지 중국인들은 다만 일체경 이라고 부르든 불경을 대승과 소승의 모든 불경들을 포함시켜 대장경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 본격적으로 대장경판이 만들어져 인쇄간행된 것은 중국의 송나라 태조때 시작하여 태종 때에 완성을 본 북송칙판대장경(北宋勅板大藏經)으로서 최초의 목판 대장경이다.
2. 왜 대장경판을 제작하게 되었는가?
왜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아도 엄청난 돈과 시간이 소모되는 목판 대장경판 제작사업을 몽고와의 처절한 전쟁 중에, 그것도 강화도에 수도를 옮겨 온 나라가 피폐할 데로 피폐한 시기에 범국가적인 사업으로 계획하였는가? 우리는 이의 해답을 찾기 위하여 우선 고려대장경판을 판각하기 이전에는 우리 나라와 중국 및 거란에 어떤 대장경들이 있었는지 그 내용부터 알아보자.
2.1 북송칙판대장경(北宋勅板大藏經)
불교의 발원지인 인도는 물론 중국과 우리 나라를 통 털어 최초로 나무를 켜서 판자를 만들고 그 위에다 부처님 말씀을 새겨 넣은 대장경으로서 이후 우리 나라와 거란 등에서 만든 몇몇 대장경판의 효시가 된 경판이다. 송나라 태조의 어명으로 태조4년(972)에 경판을 새기기 시작하여 태종 8년(983)에 이르는 11년에 걸쳐 완성하였다고 한다. 북송칙판대장경은 일명 개보칙판대장경(開寶勅版大藏經) 혹은 촉판대장경(蜀版大藏經)이라고도 하며 앞에 말한 지승의 개원석교록를 근거로 하였다. 총 1076부 5048권의 불경을 자그마치 13만 매나 되는 목판에 새겨 천자문 순 으로 이름을 붙인 480개의함에 차례로 보관하였다.
이 대장경의 제작은 인도를 제외한 한문문화권에서는 최초의 엄청난 규모의 불경정리 작업임과 동시에 최초의 불경간행 사업이었다. 따라서 중국에 전파된 불교가 비로소 체계적인 경전을 갖는 계기가 되고 당시 사람들이 불교라는 종교를 중심으로 정신적인 지주로서의 기능을 하였기 때문에 역사상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이 경판 들은 송나라의 휘종 때까지만 해도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든 것으로 아려지고 있으나 금나라의 침입을 받은 사회적 혼란기에 전부 없어져 버리고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2.2 초조고려대장경(初彫高麗大藏經)
송나라의 칙판대장경이 만들어지자 중국과 왕래가 빈번하였든 고려에서는 성종10년(991)에 사신으로 가있든 한언공(韓彦恭)이 송나라에서 귀국하면서 관판대장경 481함 2500권을 가지고 들어와 비로소 내용이 알려졌다. 이어서 현종13년(1022)에는 한조(韓祚)가 역시 송나라에서 칙판대장경을 보완한 500여권의 불경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현종이 즉위한 후 거란족, 여진족, 몽고족 등 북방오랑캐들의 거듭된 침략에 의하여 고려는 수 없는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음은 고려사를 비롯한 역사기록에 생생히 남아있다. 이에 현종은 북방오랑캐의 침략을 퇴치하기 위하여 군비를 확충함과 아울러 우선 현화사(玄化寺)라는 절을 창건하여 부처님의 은덕을 얻고 이어서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대장경판을 새겨 부처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칠려고 한 것 같다. 현종은 수입한 칙판대장경을 바탕으로 일종의 대장경을 간행하는 관서라고 할 수 있는 반야경보(般若經寶)를 설치하고 대반야경, 화엄경을 비롯한 불경을 새기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처음 시작한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현종대(1010∼1031)에 시작하여 꾸준히 계속되었고 현종20년(1029)까지 거의 완성을 보았고 그 후에도 보완작업은 선종4년(1087)까지도 계속되었다. 이 경판을 우리는 초조고려대장경(初雕高麗大藏經)이라 부른다.
대장경의 각판 사업은 조정을 비롯한 전 국가적인 규모에서 진행되었다. 이 초조고려대장경은 대체로 송의 칙판대장경의 내용과 체재를 토대로 제작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고려인들은 보완과 수정을 가하여 원본보다 더 훌륭한 대장경을 만들려고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하였는지는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문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초조대장경판은 부인사(符仁寺)에 보관하여 오다가 고종 19년(1232)에 살례탑이 이끄는 몽고 2차 침입 때 후술하는 의천의 속고려대장경과 함께 아깝게 불타 버리고 만다.
당시에 인경하였든 초조 고려대장경은 국내에서도 가끔 일부가 발견되고 있으나 경서의 대부분은 일본 교오또에 있는 남선사(南禪寺)등지에만 남아있어서 우리의 아쉬움이 더하고 있을 뿐이다.
2.3 거란대장경
거란은 송나라의 북송칙판대장경의 영향을 받아 거란의 흥종(1031∼1054)때에 대장경의 조판을 시작하여 도종(1055∼1100)때에 완성하였다. 479함으로 구성된 거란대장경은 개원석교목록과는 함호(函號)배열이 다르고 일부 없어져 버린 불경이 수록되어 있는 등 북송칙판대장경이나 우리의 초조고려대장경 및 의천의 속대장경과는 또 다른 문화사적인 의미가 있는 귀중한 대장경이다.
거란대장경이 언제 시작되어 완성되었는 지는 확실하기 않으나 거란의 도종이 고려 문종 17년(1063)에 거란대장경 전질을 고려에 보내온 것으로 보아 이 보다 앞서서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2.4 의천의 고려속장경
초조대장경을 현종.선종대에 걸쳐 완성한 후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고려조정에서는 문종때 대각국사인 의천(義天, 1055-1101)에 명하여 새로운 형식의 대장경 간행을 시도하였다.
초조대장경이 북송칙판대장경을 모태로 경?율?론 삼장에 만족하지 않고 이의 주석서나 연구서 라고 할 수 있는 장소(章疏)들을 모아 간행한 것이다. 경.율.논의 3장은 이미 정리가 이루어지고 판각까지 되었으나 장소는 아직 정리하여 간행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차츰 흩어져 없어질 위기에 처해 있다고 의천은 판단하고 있었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의천은 문종 27년(1073)에서 선종 7년(1090)까지 25여년 간에 걸쳐 국내는 물론 일본, 중국의 송.요나라까지 광범위하게 장소를 수집하였다. 특히 선종 2년(1085)에는 직접 송나라에 들어가서 화엄대불사의론(華嚴大佛思議論)등 3천여권을 수집하기도 하였다.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어 수집한 자료을 하나하나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의천의 고려속장경의 각판 시기는 속장경이 거의 완성된 시기에 시작되었으며 경율론의 정장과는 다른 일종의 속장(續藏)인 장소를 간행한 것은 고려가 또 다른 대장경을 각판하였다는 귀중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몽고의 침입을 비롯한 잇달은 외환으로 말미암아 전질의 경판을 가지고 있지 못한 아쉬움은 있으나 남아 있는 일부의 판본과 국내 및 일본의 몇몇 개소에 보관되어 내려오는 인쇄본을 통해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2.5 고려재조대장경판(高麗再彫大藏經板)
비록 중국의 북송칙판대장경을 모방하기는 하였으나 고려의 군신이 혼신의 힘을 받쳐 이룩한 초조고려대장경과 이어서 만들어진 의천의 속대장경은 동양삼국에서 우리 나라가 당시로서도 문화민족으로서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를 포함하여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문화유산이었다. 그러나 아시아 대륙의 조그만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 나라는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항상 중국대륙의 정치적 변동에 국가의 존망이 달려있는 현실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었고 대장경판을 보존되기 위하여는 전란의 참화만은 피해야 하였다.
고려초조대장경과 의천의 속장경이 거의 연속적으로 만들어진 이후 고종조(1213-?)에 이르기까지 약 130년간에 걸쳐서 대장경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의 예종, 인종, 의종, 명종조에 그 도장(道場)이 궁중에서 열리었다는 기록정도를 볼 수 있고 다시 대장경을 새기거나 크게 간행한 흔적은 보이지 않은다.
이때는 임금과 국민이 모두 염원하든 대장경판을 완성하고 목판 한 장 한 장에 새겨진 부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그 의미를 더욱 가슴깊이 아로새기면서 중국대륙의 크나큰 정치적 변동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든 시기일 것이다.
그러나 대륙의 야심만만한 정복자들은 오직 불심하나로 뭉쳐있는 고려국을 그대로 둘리 없었고 드디어 고종18년(1231) 8월 몽고 태종의 명령을 받은 살례탑은 압록강을 넘어 청천강 이북의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12월에는 수도 개경까지 단숨에 밀고 내려온 것이다. 이는 이후 거의 30여년 동안 7차에 걸치는 몽고군에 의한 고려침략의 서막일 뿐이었다.
개경이 몽고군에 포위된 위급한 상황에서 조정은 화해를 청하여 간신히 평화조약을 맺고 다음해 즉 고종19년(1232) 1월에 몽고군은 철수하게 된다. 당시 권력을 잡고 있든 최이는 수전에 약하다는 몽고군의 약점을 간파하여 수도를 강화로 옮기고 주민을 산간과 섬으로 피난시켜 결사항전을 시작하였다. 이에 몽고군은 같은 해 가을 살례탑을 선봉으로 세워 2차 침입을 감행하였으며 고려조정은 변변한 대응한번 못하고 개경을 위시하여 전국토가 몽고군의 말발꿉에 짓밟히게 되었다.
1232년의 몽고군 2차 침입! 우리민족이 외적의 끊임없는 침입을 받아 위대한 민족의 문화유산들이 하나하나 잿더미가 되어버리는 역사의 뼈아픈 한페이지를 또 한번 기록하는 해가 되고 만다.
즉 현종이래 거의 70여년에 걸쳐 온 국민의 염원과 피와 땀이 서린 초조대장경과 의천의 속대장경 경판은 부인사에 고이고이 잘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더없이 넓은 대륙의 초원에서 양떼지기에 불과하였든 몽고 오랑캐들이 고려국민의 정신적 지주였든 대장경의 의미를 알리 없었으므로 살례탑이 이끄는 몽고군의 불길질에 하룻밤사이 처참하게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이때 고려국민의 분노와 허탈함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절망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억울함이 가신다면 같은해 12월 수원 처인성 싸움에서 승병대장 김윤후가 화살하나로 저승에 가서도 다시는 밝은 세상을 볼 수 없도록 살례탑의 왼쪽눈을 꽤 뚫어 사살해 버린 것이다.
이 1.2차 몽고침략 이후에도 1254년의 7차에 이르는 포악한 몽고군의 침략을 계속 받으면서 국토는 몽고군의 말발꿉에 유린되고 처참한 서민의 삶은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을 즈음 최이(崔怡)를 비롯한 고려의 세력가들은 몽고군의 퇴치를 그들이 숭배하고 믿어 마지않은 부처님의 힘에 의존하려고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마침 현종이 초조대장경을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거란군이 스스로 물러간 과거의 예를 보아 정성껏 대장경을 간행하면 포악한 몽고군도 스스로 물러가리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에 임금은 강화도 섬에 피신하여 있고 본토는 몽고군의 말발꿉에 유린되어 국민의 삶이 피폐할 데로 피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재위 24년째인 1237년 수년동안 준비하여 오든 대장경의 각판을 몽고군 퇴치를 위한 간절한 소망을 담아 다시 시작하게 된다. 이후 고종38년(1251)까지 장장 16년이란 세월에 걸쳐 오늘날 해인사의 수다라장 및 법보전에 보관되어 있는 8만천여장의 고려대장경판 정본을 완성하였다.
초조대장경을 잃고 군신이 얼마나 안타까워 하였는 지는 대장경 각판을 시작하면서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잘 나타나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금은 태자와 재상을 비롯한 문무백관과 더불어 목욕제계하고 향을 피우며 먼 하늘을 우러러 온누리에 무량하신 여러 보살님과 천제석을 비롯한 삼십삼천의 모든 호법영관에게 비옵나이다. 몽고군이 우리에게 가한 난동질이 너무 잔인하고 흉폭하여 어찌 말로서 나타낼수가 있겠습니까?. 세상의 망나니는 다 갖다 모았다 하겠으며 금수보다도 더 혹심하옵니다.
이러하오니 어찌 천하가 다 존경하는 부처님 말씀이 있는 줄을 못된 몽고군이 알 리가 있습니까? 몽고병의 더러운 말 발꿉이 지나가는 곳마다 닥치는 대로 불상이고 불경이고 가릴 것 없이 모조리 다 불살라 없애고 말았으며, 부인사에 소중히 모셔두었든 처음 만든 대장경판본도 역시 이들의 마수에 걸려 하나도 남은 것 없이 재가되었나이다. 윗대로부터 이어온 수십년의 공적이 하루아침에 없어지고 나라의 큰나큰 보배를 순간에 잃고 말았습니다. 비록 여러 보살님들과 하늘의 임금님들이 아무리 대자대비하신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고 하온들 이렇게 못된 짓이야 어떻게 참을 수 있겠습니까?
생각하여 보건데 우리 중생들이 지혜롭지 못하고 식견이 얕아서 일찍이 오랑캐를 막을 계략을 스스로 세우지 못하고, 힘이 모자라서 불법의 큰 보배를 지키지 못한 것이니 이 모두 저희들의 잘못이므로 이제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본래 이루어짐과 잃어버림이 없는 것이요, 잠시 대장경판을 머무르게 하신 것일 것입니다. 경판을 만들고 또 망가지는 것은 자연의 이치로써 망가지면 다시 만들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우리중생이 해야할 일 입니다.
하물며 나라를 지니고 있고 집을 가지며 불법을 지극히 숭상하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없어진 대장경을 다시 만드는 일에 주저하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 귀중한 보배를 잃어 버렸는데 어찌감히 공사가 거창할 것을 두려워하여 다시 만드는 작업을 꺼리고 망설이겠습니까? 이제 여러 재상 및 문무백관들과 더불어 큰 소원을 세우고 주관하는 관청으로서 귀당관사(句當官司, 대장도감)를 두고 이를 중심으로 공사를 시작코저 하옵니다.
처음 대장경을 새기게 된 연유를 살펴보면 현종 2년에 거란병이 대거 침입하여 난을 피해 남쪽으로 가셨으나 거란병은 송도에 머물러 물러가지 않으므로 임금과 신하가 합심하여 큰 원을 세우고 대장경을 새기기 시작하였더니 놀랍게도 거란병이 스스로 물러갔나이다. 생각컨데 오직 대장경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이며 판각하는 것도 다를 바 없으며 임금과 신하가 합심하여 발원함도 또한 마찬가지이니 어찌 그 때에만 거란병이 물러가고 지금의 몽고병은 물러가지 않겠습니까? 다만 모든 부처님과 하늘의 보살피심이 한결같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제 지성을 다하여 대장경판을 다시 새기는 바는 그때의 정성에 비하여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으니 모든 부처님과 성현 및 삽심삼천께서 이 간절한 기원을 들으시고 신통의 힘을 내리시어 저 추악한 오랑캐 무리들의 발자취를 거두어 멀리 달아나 다시는 이 강토를 짓밟지 못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나라 안팎이 모두 편안하고 모후와 태자가 만수무강하시며 나라의 운이 영원무궁케 하소서. 우리 중생들은 마땅히 더욱 노력하여 불법을 지키어 부처님 은혜의 만분의 하나라도 갚고자 할 따름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중생들은 업드려 비옵나니 굽어 살피옵소서. }
3. 대장경판에는 무슨 나무를 사용하였는가?
경판에 부처님 말씀인 경서를 인각하는데 사용한 나무는 재질에 많은 재약을 받는다. 우선은 재질이 균일하고 나무를 이루는 세포하나의 크기가 작아 글자 한 획 한 획이 깨끗하게 파져야 한다. 또 너무 단단하여 글자를 새기는 각수가 새기기가 어려워 서도 안된다. 그렇다고 너무 연한 나무는 인쇄를 할 때 삐침 부분이 떨어져 나가버리므로 적당치 않다. 이른 조건에 맞는 나무는 그렇게 많지 않으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소나무, 잣나무, 젓나무 등의 침엽수는 세포크기가 크고 (머리카락의 1/2정도)은 나이테 안에서도 봄에 자란 세포와 여름에 자란 세포의 크기차이가 너무 뚜렷하여 부적합하다. 또 밤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물푸레나무 등의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활엽수도 직경이 무려 0.3mm나 되는 세포가 한쪽에 몰려있어서 재질이 균일하지 않으므로 쓸 수 없다.
그렇다면 적당히 단단하고 세포의 크기가 고르며 조각하기에도 적당한 나무의 종류는 대단히 한정되며 경판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직경이 크게 자랄 수 있는 나무라야 한다.
나무의 특성으로 만 본다면 우리나라의 산에서 흔히 만나는 단풍나무, 돌배나무, 산벚나무, 자작나무, 남쪽에 자라는 후박나무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나무들은 소나무등 침엽수와 같이 집단으로 모여서 자라는 것이 아니고 한두 나무씩 다른 잡목 속에 섞여서 자라는 데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옛날에는 건축재나 배를 만드는 데 주로 사용된 소나무는 자람의 특성이 집단적이므로 한곳에서 많은 양을 벌채할 수 있어서 이용하기가 쉽다. 그에 비하여 대장경에 사용할 수 있는 나무들은 한곳에서 벌채를 할 수 없으므로 한 두 나무씩 벌채하여 이를 수집하는 데는 더 많은 노력과 어려움이 따른다.
이제 고려인들이 우선 경판에 사용할 나무를 수집하는데 부터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들어갔는지를 실제 사용한 나무의 종류와 그 특성을 알아보면서 되새겨보자.
먼저 수차에 걸친 인쇄를 하느라 먹물을 온통 뒤집어쓰고 있는 대장경판의 나무종류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일반 현미경과 전자현미경을 이용하여 경판을 이루고 있는 세포의 모양을 조사한 후 이미 우리 나라에 분포하는 주요 나무종류별 세포특징을 조사한 내용과 비교 검토하여 해당 나무종류를 결정하였다.
약 250여장의 경판을 선정하여 조사하였다. 대장경판 제조에 사용된 원목의 수종은 대부분 산벚나무류로서 전체 시편 수 대비 62%에 해당하고 경판 부위에서만 보더라도 64%에 달하며 마구리의 구성수종에서도 56%에 해당한다. 또한 돌배나무류는 전체 조사시편수 대비 약 13%이고 채취부위별로는 경판부에서도 14%나 점유하고 있다. 기타 자작나무류 8%, 층층나무류 6%, 단풍나무류와 후박나무류가 각각 3%, 사시나무 등이 1점 검출되었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경판에는 사용하지 않았고 마구리 혹은 부위불명 재료에서 각각 1-2점이 검출되고 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경판의 수종은 산벚나무류와 돌배나무류가 전체 검출된 조사수종의 75%로서 대부분을 차지하며 지금까지 자작나무로 알려진 수종은 8%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가지 간과해서 안될 사실은 8만여 장의 대장경판 중에 불과 250여장을 조사한 결과를 가지고 대장경경판 전체수종을 논의 할 수 있느냐는 문제이다. 물론 이 숫자는 적정표본 수에 턱없이 모자라나 조사대상이 국보라는 특수성과 한정된 조사기간이라 어쩔 수 없었다. 다만 조사 경판의 선정에 있어서는 완전 임의적으로 조사 경판을 선정하여 가능한 대표성을 나타낼 수 있게 충분히 배려하였다. 조사표본 수를 늘리면 앞 표에서 제시한 각 수종의 비율은 다소 변할 수 있겠으나 대체적인 경향을 알기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주요 경판 수종에 대한 특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3.1 산벚나무류 - Prunus sp.
산벚나무는 장미과라는 대단히 많은 나무종류가 포함된 집단에 속하는 나무이다. 장미과는 세계적으로는 115속 3200종, 우리 나라만 해도 35속 207종이나 되는 나무들이 자라고 있으며 대부분 화사한 꽃을 피우고 식용의 과일을 맺는 종류도 많다. 흔히 알고 있는 사과, 배, 복숭아, 자두, 살구, 앵두, 딸기 등의 과일나무를 비롯하여 벚나무, 매화, 장미, 조팝나무 등은 모두 장미과이다.
산벚나무는 장미과의 벚나무속에 들어가는 나무인데 종류를 들어본다면 벚나무, 왕벚나무, 산벚나무, 올벚나무, 개벚나무. 섬벚나무, 꽃벚나무등 식물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사람들은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고 좀처럼 수종을 구별할 수 없는 비슷비슷한 벚나무류들의 한 종류이다.
이른 봄 고가의 뜰 안이나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흔히 매화, 산수유 등의 화사한 꽃을 보고 이제 봄의 시작을 느낄 즈음 산 속에는 샛노란 생강나무의 꽃이 이제 곧 봄바람이 긴긴 겨울바람에 움추려든 산 속의 나무가지에 간지름을 먹히는 계절이 왔노라고 알려줄 것이다. 깊은 산 속에서 가장 간지럼을 먼저 타는 것이 산벚나무이다. 앙상한 나무 가지들로 인한 산 속이 칙칙한 겨울의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다른 나무들이 아직 새잎의 푸러름이 시작도 하기 전에 화사한 분홍빛 꽃을 지천으로 달고있고 껍질은 대부분의 나무들이 세로로 갈라지는데 반하여 이 나무는 가로로 갈라지면서 매끄럽기 때문에 멀리서도 쉽게 구별되는 나무이다. 또 산벚나무는 계곡이나 나트막한 언덕배기 등에 잘 자라므로 몽고군에 유린당한 육지에서 몰래 몰래 한 나무씩 배어 가까운 강으로 운반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높은 산꼭대기가 아니면 전국의 어디에서나 잘 자라고 섬 지방에도 해풍을 용케 견디며 흔히 볼 수 있다. 높이 20m, 직경이 거의 1m까지도 자라는 나무이나 대체로 높이 10여m, 직경 5-60cm에 달하는 큰 나무이다.
좀 전문적인 이야기로서 산벚나무의 조직을 현미경으로 해부해 보면 물관이 하나의 나이테 내에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전형적인 산공재(散孔材)임을 알 수 있다. 물관은 하나씩 독립적으로 분포이거나 불규칙하게 2∼3개씩 복합하고 물관의 직경은 50∼70㎛ 정도이다.
목섬유는 섬유상가도관이라는 구조를 가지며 비교적 세포벽이 두껍다. 물관과 물관이 아래위로 연결되는 부위에는 단천공(單穿孔)이라는 모양이 생기며, 물관속에는 이 수종의 특징인 검물질이 관찰된다. 또 물관의 벽은 나선비후(螺旋肥厚)라는 독특한 나선모양이 생기고 이는 그 모양이 비슷한 단풍나무종류들과 구분된다. 살아있을 때 양분의 이동과 저장을 담당하고 있든 축방향유조직이라는 세포들은 나이테 폭 전체에 걸쳐 흐터어져 배열하거나 짧은 접선상 또는 나이테 경계부분에만 분포하고 있다. 물관서로간의 벽공과 물관과 방사조직 사이의 벽공은 불규칙한 유연벽공이라는 형태이다.
방사조직은 동성형 및 이성Ⅲ형이라는 형태가 주로 나타나며 가끔 이성Ⅱ형이라는 형태도 관찰할 수 있다. 방사조직을 이루는 세포는 평복세포라고 불리워지는 세포가 대부분이나 가장자리에는 방형세포도 관찰되며, 이 세포의 속에는 마름모 모양의 무기물 결정이 관찰된다. 방사조직을 구성하는 세포의 수가 많으므로 높이는 다른 활엽수재에 비교하여 훨씬 높고 폭은 1∼5세포 정도이다.
나무를 잘라보면 가운데의 짙은 적갈색인 심재부와 색깔이 연한 바같 쪽의 변재부가 명확히 구별되고 조직이 치밀하고 고르게 분포하여 전체적으로 고운 맛을 준다. 비중 0.6정도로서 너무 단단하지도 너무 무르지도 않고 잘 썩지도 않으며 가공이 쉽고 비교적 인가와 멀지 않은 곳에 분포한다. 쓰임새는 여러 가지 생활용구, 조각재, 칠기의 골심재를 비롯하여 목판인쇄를 위한 나무활자 재료는 최우량재이다.
3.2 돌배나무류 - Pyrus sp.
우리조상들이 즐겨 먹든 과일나무의 한 종류로서 돌배나무는 잘 알려져 있다. 지금의 배는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개량되어 갓난아이 머리 통 만큼이나 커져서 징그럽기까지 하나 산 속에 흔히 자라든 돌배나무는 기껏 작은 주먹만한 앙증맞는 크기로서 우리들 재삿상의 맨앞 과일줄의 조율시리(棗栗枾梨)의 마지막 과일이 될 만큼 먼 옛날부터 사랑을 받아왔다. 배를 먹기 시작한 역사는 굉장히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데 일산 신도시 아파트단지를 조성하기 전에 지표조사 할 때 나온 약 4천년전의 일산신도시 선사시대유적에서 발견되기도하며 약 2천년전의 의창다호리 가야고분에서 밤, 천선과와 함께 돌배가 출토된바 있어서 무척 오래전부터 애용해온 것으로 생각된다.
배나무는 감나무, 밤나무와 마찬가지로 과일나무로서의 독특한 맛스러움을 우리에게 선사할 뿐만아니라 목재도 좋은 재질을 가진 나무로 선조들은 귀중히 여겨온 것 같다.
직경 60cm, 높이 10m 까지 자랄 수 있으며 나무의 빛깔이 붉은 빛이 살짝 보일 듯 말듯하여 안온하고 단정한 느낌을 주어 옛 양반들이 사랑방의 신변용품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기건비중 0.73으로 약간 무거우면서 강도가 강하고 조직이 매우 치밀하고 균일하여 단단한 반면 가공은 비교적 용이하다. 가구재, 조각재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1915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인쇄본 한 질을 가져가기 위하여 전체조사를 할 때 18매의 없어진 경판을 발견하고 다시 새겨 넣으면서 서울근교의 배나무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돌배나무의 조직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산벚나무와 비슷한데 물관이 나이테내에 균일하게 흩어져 있는 전형적인 산공재(散孔材)이다. 관공은 대부분 고립관공이고 외형이 약간 각형이며 관공의 접선방향직경은 40∼50㎛ 정도이다. 목섬유의 종류는 섬유상가도관이 주를 이루며 세포벽이 두껍다. 단천공이고 물관에 드물게 나선비후를 가진다. 축방향유조직은 산재상 또는 짧은 접선상이고 축방향유세포에서 고리모양의 마름모꼴 결정을 가진다. 방사조직은 다열의 평복세포로 이루어진 동성형이고 평복세포내에 결정을 가지며 세포의 높이가 낮고 그 나비는 1∼2세포나비 정도이다.
산돌배나무(Pyrus ussuriensis)와 돌배나무(Pyrus pyrifolia)가 대표적이다. 분포지역은 추운 지방에 분포중심이 있으나 거의 전국에 걸쳐 자란다.
3.3 자작나무류 - Betula sp.
지금 나이가 지긋한 분들은 대부분 5-60년대의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다. 뒷산에서 산울림으로 들려오는 장끼의 울음을 뒤로하고 키보다 두 배나 높은 나무 한 짐쯤은 지고 내려와 본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며 이때에 흔히 보아온 나무가 소나무 아니면 참나무일 것이다. 그러나 고향을 북한의 깊은 산골에 두신 분들은 유별나게 새하얀 껍질을 가진 나무를 기억 속에 영 지우지 못할 것이다. 나무의 수피는 시커멓고 울퉁불퉁하거나 거북 등처럼 갈라지는 것이 대부분인데 유독 자작나무만은 하늘을 나르든 천사가 차디찬 겨울의 산 속에 처절하게 서있는 자작나무를 불쌍하게 여겨 흰 날개로 나무의 등걸을 칭칭 둘러쌓은 것 같은 흰수피를 가진 나무이다.
얼핏 짐작이 안간다면 {의사지바고}나 {차이코프스키}같은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시기 바란다. 광활하게 펼쳐진 설원에 간간히 휘몰아치는 눈보라와 의연히 맞서서 쭉쭉 뻗은 늘씬한 몸매와 하얀 피부를 한껏 자랑하는 나무 미인들의 군상이 바로 자작나무이다. 눈이 얼어붙어 흰 껍질이 된 것이 아니고 숲 속의 정한수만 먹고 고고히 자란 기품을 뽐내듯이 어디에서나 새하얀 수피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이 나무는 식물학적으로는 자작나무과라는 적지 않은 식솔을 거느리고 있는데 거제수나무, 사스레나무가 아주 판박이처럼 찍어 놓은 것 같이 닮은 친형제나무이며 박달나무나 물박달나무는 모양이나 성질이 아주 딴판이라 오해를 받을 염려가 있으나 틀림없는 형제나무이다.
지금까지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재는 자작나무로 알려져 왔으므로 필자의 상상에는 고려인들은 참 멋쟁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몽고의 말발꿉에 전국토가 유린당하는 처절함 속에서도 비록 다음에 먹물을 발라 인쇄하느라 시커먼 먹물을 뒤집어쓰겠지만 부처님 말씀을 한 자한 새겨 넣을 때는 깨끗하고 고상한 나무만을 베어다 쓴 마음의 여유를 갖다니!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대장경을 새겨 넣은 나무는 대부분이 산벚나무와 돌배나무이었다. 왜 자작나무로 알려지게 되었는지는 다른 쪽의 설명에서 보기로 하고 나무의 특성을 알아보자.
자작나무는 화(樺) 또는 백화(白樺)라고 한다. 높이 20m, 직경 1m까지 자랄 수 있는 큰 나무이며 기온이 2-30℃씩 떨어지는 추운 지방의 대표적인 나무이다. 현재 남한에는 자작나무가 자연분포하는 지역은 없으며 가로수로 심고 있는 자작나무는 수입자작나무가 대부분이다. 거제수나무와 사스레나무는 남한에도 자라나 역시 추운 곳을 좋아하여 지리산, 덕유산, 가야산등 해발 1000m가 넘는 높은 산의 꼭대기 부근에 자라고 있다.
자작나무는 우선 흰 껍질의 특성을 살린 쓰임새와 나무로서 쓰임새이다. 흰 껍질이 매끄럽고 잘 벗겨지므로 종이를 대신하여 불경을 새기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경주 천마총의 천마도도 자작나무 종류의 껍질을 펴서 그린 것이다. 자작나무 껍질은 기름끼가 많아 잘 썩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을 붙이면 잘 붙고 오래가므로 화혼(華婚)이나 화촉(華燭)등 남녀의 만남과 연관된 이름은 껍질의 불타는 성질과 관련이 있다.
나무는 껍질만큼이나 속도 거의 순백색에 가까워 깨끗하고 균일하며 옹이하나 없어 마치 해맑은 여인의 살결을 보는 것 같다. 따라서 경판재를 샛길 수 있는 훌륭한 재료이나 자라는 곳이 너무 산골이라 운반의 어려움이 쓰임새를 제약한 것 같다. 북부지방의 서민들은 이 나무를 쪼개어 너와집의 지붕을 이었으며 죽어면 껍질로 싸서 매장하였다 한다.
나무이름은 껍질이 탈 때 {자작 자작}소리가 난다는 데서 온 의성어이다. 또 이른봄이 되면 고로쇠나무와 마찬가지로 줄기에 구멍을 뚫어 위로 올라가는 물을 인간에게 뺏기고도 의연히 서있어서 흰 수피 때문에 닥아오는 처량함과 아울러 생명의 경외마저 느끼기도 한다.
다음은 현미경으로 들어다본 세포모양의 특징을 알아보자.
물관이 나이테안에 고루 흩어져 있는 산공재이며 관공은 고립관공과 2∼6개의 방사복합관공으로 구성된다. 고립관공의 접선방향직경은 80∼100㎛ 정도이고 그 바같모양은 약간 각이 져있다. 물관상호간벽공은 크기가 매우 작은 유연벽공이 서로 합쳐져서 비스듬하게 골이 쳐져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 독특하므로 비슷한 다른 나무와는 구별된다. 물관방사조직간벽공 역시 물관상호간벽공과 유사한 형태의 유연벽공이 방사조직 전체에 걸쳐 관찰된다. 계단상천공을 가지며 bar의 수는 10∼15개이고 방사조직은 주로 동성형이고 1∼3세포나비 정도이다.
이와같은 모양을 갖은 나무는 자작나무, 거제수나무, 사스레나무가 모두 동일하다. 대장경판의 나무가 이 세종류중에 어느 것인지는 각판지역 추정 등 경판의 비밀을 캐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으나 나무의 세포모양만 현미경으로 조사하여 구분하는 방법은 아직 알려지고 있지 않다.
또 박달나무나 물박달나무는 물관이 분포하는 수가 자작나무 종류 보다 작고 물관벽이 두꺼우므로 구별이 가능하나 굵기가 1mm전후의 작은 표본에서 이의 구별도 무리가 있었다.
따라서 표에서 자작나무류로 구분한 내용에는 자작나무, 거제수나무, 사스레나무를 비롯하여 박달나무와 물박달나무가 포함되어 있다. 명확한 나무종류의 구분은 앞으로의 숙제로 남겨 두고자 한다.
3.4 층층나무류 - Cornus sp.
뙤약빛이 내려 쪼이는 한 여름의 등산은 숲이 우거진 계곡을 타고 올라가 산마루를 넘어 다시 계곡으로 넘어가는 길을 잡는다. 산마루에 앉아 시원한 솔바람으로 땀방울을 날려보내면서 넘어온 계곡을 내려다보면 중간중간에 나무가지가 층층으로 달려있는 나무가 우리의 시선을 끈다. 이름하여 층층나무이다. 이 나무의 형제들은 생김새가 각각이어서 수피가 거북 등처럼 갈라지는 말채나무, 새하얀 딸기 꽃이 아름답게 달리는 산딸나무, 가을에 앵두빛 붉은 열매가 지천으로 달려 한약제로 쓰이는 산수유 등이 모두 같은 속(屬)에 들어간다. 대장경판에 쓰인 것은 층층나무로 생각되며 거의 다른 재료로는 잘 쓰이지 않은 층층나무가 대장경판에 쓰인 것은 우량경판재가 부족할 때 일시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산공재이며 물관은 한 개씩 분포하거나 2∼3개씩 방사방향복합한다. 물관의 바같 모양은 약간 각형이고 접선방향직경은 80∼90㎛이다. 물관상호간벽공은 대상벽공이 명확하며 물관방사조직간벽공은 물관상호간벽공과 비슷하고 벽공이 방사조직의 전체에 걸쳐 분포한다. 축방향유조직은 산재상 또는 짧은 접선상이다. 계단상천공을 가지며 bar의 수가 매우 많아 약 30∼40개 정도이다. 방사조직은 이성Ⅱ, Ⅲ형이며 1∼4세포나비이다.
3.5 단풍나무류 - Acer sp.
우리 나라의 산에서 쓸모 있고 비교적 흔히 만나는 나무의 한 종류가 단풍나무들이다. 간단히 단풍나무라고 하지만 가을에 붉은 잎으로 물드는 진짜 단풍나무를 비롯하여 수액을 채취하는 고로쇠나무, 높은 산에 주로 자라는 복자기나무와 복장나무등 종류가 많다.
목재는 비중이 0.6-7정도이고 약간 진한 갈색계통의 나무이며 작은 점같은 조직이 표면에도 나타난다. 대장경판에 쓰인 나무는 단풍나무나 고로쇠나무가 사용된 것 같고 재질이 특히 우수하다기 보다 구하기 쉬운 나무로서 이용된 것 같다.
산공재이며 물관은 한 개씩 흩어져 분포하거나 2∼수 개씩 복합하는 것이 섞여있다. 물관의 접선방향직경은 70∼90㎛ 정도로 비교적 크고 물관의 바같 모양은 약간 각형이다. 단천공이며 물관벽에는 미세하고 간격이 매우 촘촘한 나선비후가 존재한다. 물관상호간벽공은 교호상의 유연벽공으로 관찰되고 물관방사조직간벽공은 원형 내지 타원형의 유연벽공이 방사조직의 상하 가장자리에서 명확하다. 방사조직은 여러 열의 평복세포로 이루어진 동성형으로 방사유세포는 세포높이가 낮고 그 나비는 1∼5세포나비 정도이다. 축방향유세포는 2∼3세포나비의 종말상이고 유세포에서 쇄상의 결정과 수반점(髓斑點)이라는 조직이 관찰된다.
3.6 후박나무류 - Machilus sp.
남해안이나 다도해의 섬 지방을 여행해 보면 잎이 두껍고 겨울에도 짙푸르며 윤기가 흘러 마치 흔히 보는 감나무의 작은 잎처럼 생긴 나무를 만날 수 있다. 이 나무가 후박나무로서 녹나무과에 속하는 큰 나무이다. 아열대 지방의 나무로서 추위에 약하여 내륙으로 들어오면 거의 자라지 못한다.
다 자라면 직경이 20m, 직경은 거의 1m까지 달하기도 한다. 후박나무는 옛부터 회갈색으로 매끈한 껍질을 배껴서 한약제로 널리 사용되었다. 그래서 천연기념물로 보호된 몇몇 보호수를 제외하면 큰나무를 좀처럼 만날 수 없다. 건강에 좋다면 지렁이 굼뱅이 까지 먹어치우는 세상이니 돈이 되는 후박나무가 남아날리 없다.
목재는 옅은 갈색이고 나무 결이 약간 어긋나며 비중은 0.65정도로서 건조 및 가공하기도 쉽지 않다. 이 나무가 대장경판의 재료로서 꼭 적당하였다기 보다는 막대한 나무의 수집과정에 남해안에 흔한 나무로서 사용한 것 같다.
산공재이며 물관은 대부분 홀로 분포하나 드물게 2∼3개씩 모여있기도 한다. 물관벽이 두껍고 단천공이다. 축방향유조직은 물관 주위를 1∼2층으로 둘러쌓고 있는 주위유조직이다. 물관방사조직간벽공은 원형 혹은 타원형이며 드물게 계단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방사유세포에는 방사단면 혹은 접선단면상에서 방사조직의 가장자리에서 독특한 유세포(油細胞, oil cell)가 관찰되는 것이 이 수종의 중요한 특징이다. 방사조직은 동성형과 드물게 이성Ⅲ형이 관찰되며 1∼2세포나비이다.
3.7 기타 대장경판의 수종
대장경판을 만드는데 사용한 나무는 산벚나무, 돌배나무, 자작나무, 후박나무, 단풍나무외에 한둘 경판에서는 층층나무, 사시나무 등으로 만든 경판이 있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경판재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막대한 양의 나무를 벌채 운반하는 과정에서 나무를 잘못 알았거나 갑자기 준비된 나무가 없을 때 대용재로 쓰인 것 같다. 예를 들어 재질이 약하고 잘 썩는 나무로 알려져 있는 사시나무가 경판재로 쓰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타 마구리에는 경판을 만든 나머지 토막나무를 이용한 경우가 많아 대체로 경판과 같은 나무이나 소나무나 잣나무 같은 침엽수를 사용한 예도 가끔 있었다.
3.8 대장경판이 자작나무로 알려진 이유
합천 해인사는 봄가을철로 한참 관광객이 많을 때는 일일 2만여명에 달하고 거의 빠짐없이 대장경판을 관람하게 된다. 대웅전을 뒤돌아 계단을 오르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수다라장의 가운데를 동굴처럼 뚫어 놓은 관람창이다. 이 관람창은 일제강점기에 단순히 관람객의 편의만을 위하여 훼손된 것인데 해방후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다.
관람창의 오른켠에는 대장경판이 자작나무로 만들어 졌다는 설명과 함께 껍질이 벗겨져 빤질빤질한 통나무 하나가 붙어있다. 이것은 70년대 말부터 계속 전시되어 왔으므로 해인사를 다녀간 우리 국민들의 대부분은 {팔만대장경판은 자작나무로 만들었구나}하고 의심 없이 받아들여왔다. 앞에서 본 것처럼 필자는 전자현미경을 사용한 과학적인 조사방법으로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장경판의 대분은 자작나무가 아닌 다른 나무라는 것을 밝혔다. 그러면 왜 지금까지는 자작나무라고 알려져 왔는지 그 과정을 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우선 기록에서 보면 대장경에 관한 어느 문헌에도 경판을 만든 나무의 재질이 무엇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경판이 자작나무로 만들어 졌다고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근세에 들면서 서지학자를 중심으로 대장경판에 관심을 가진 분들의 연구결과 발표 등에서 알려지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우선 구체적인 몇 가지 예를 원문 그대로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해인삼미씨는 {내 본산 자랑-해인사의 장경각과 경판}라는 글에서---경판의 전면에 칠을하고 용재는 백화(白樺,자장나무)인데 제주도, 완도, 거제도등에 산출한 것이라 한다. ② 무능거사씨는 {이조불교사(8)}에서---용재는 장목(樟木, 조선에서는 후박이라 칭함, 제주도, 완도, 거제도, 울릉도에서 생산함)인데--- ③ 만해 한용운씨는 {해인사순례기}라는 수필에서---체재로 말하면 백화(白樺, 자작나무 혹은 거재나무)의 질인데--- ④ 이 기영씨는 {고려대장경, 그 역사와 의의}라는 논문에서---목재는 제주도, 완도 및 거제도산인 자작나무를 섯는 데--- ⑤ 조 명기씨는 {국보고려대장경의 가치}라는 논문에서 ---용재는 제주도, 완도, 거제도, 울릉도 등지에서 산출하는 후박(厚朴, 樺, 자작나무 혹은 거재나무라고도 함)이다. ⑥ 서수생씨는 {가야산 해인사 팔만대장경 연구}라는 그의 학위논문에서 ---용재는 백화(白樺)인데 자작나무라고 한다. 일명 거제도나무라고도 한다. 이 나무는 제주도, 완도, 거제도, 울릉도 등지에서 많이 생산된다. 는 등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근세 문헌에서 본 대장경판을 만든 나무는 자작나무와 후박나무 및 거재나무(거제수나무의 경상도지방 사투리)등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근세 문헌에서는 자작나무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면 현미경을 이용한 목재조직학적인 수단에 의하여 대부분이 산벚나무류와 돌배나무등으로 밝혀진 대장경판이 왜 자작나무로 기록되고 알려져 왔는지는 다음 두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번째는 화(樺)자의 해석에 있다. 자작나무는 한자로 화(樺)로 기록하고 있으며 옥편을 보면 자작나무 화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선조들은 자작나무와 벚나무를 명확히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았다. 이에 관하여는 임경빈씨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바, 『임원십육지에서 화에 대한 인용은 자작나무에 대한 것과 벚나무에 대한 것을 함께 수록하고 있다. 이 시진의 본초강목 인용을 보면 화는 산도(山桃)와 비슷하여 색은 황색이고 분홍의 작은 반점이 있다. 수피는 두껍고 부드러우며 신발의 뒷창에 붙이고 때로는 칼집에 이것을 쓴다. 또 말안장이나 활을 싸기도 하고 껍질은 밀랍을 감아서 초를 만들어 불을 붙이기도 한다. }이 기술에서는 화가 벚나무인지 아니면 자작나무인지 구별이 불명하다.
서 호수의 해동신서 종예항목에는 {화는 깊은 산중에 나는데 이것을 뜰에 옮겨 심을 수 있고 수고가 높게 된다. 3월에 엷은 분홍색의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데 열매는 처음에는 푸르나 뒤에는 분홍색으로 된다. 앵도와 거이 같은 시기에 익는데 일본사람들은 이 꽃을 무척 소중하게 여긴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화를 벚나무로 본 경우이다. 즉 자작나무와 벚나무를 동일한 한자인 화로 표기하고 뒤섞어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화'자를 벚나무류로 알고 있는 경우는 드물고 자작나무로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추정컨데 대장경판의 재질을 기술한 옛 문헌의 어디엔가 벚나무류의 의미로 표기한 '화'자를 일반적으로 흔히 알고있는 자작나무 화(樺)로 해석하여 전해지므로서 오늘날 의심없이 대장경판의 재질은 자작나무로 알려지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다.
두 번째의 추정은 거제도산 나무가 거제수나무로 변형된 과정에서 추정해 볼 수 있다. 거제도에는 옛부터 우량재가 대량으로 분포한 것으로 추정되며 시대적으로 맞지않아 전설로만 알려지고 있는 이 거인에 관한 문헌에서도 羅王招致工匠亦運?板於巨濟島成列不止時入指云杞梓皆稱巨濟木至今仍名馬入我』라 하여 거제도에서 생산된 목재를 사용한 기록 등으로 보아 옛부터 거제도에는 많은 나무가 분포하고 있었든 것으로 추정된다. 대장경판을 각판할 때도 몽고군에 유린된 육지보다는 수집과 운반이 손쉬운 거제도, 남해도, 완도, 진도, 멀리는 제주도까지 주로 섬지방에서 용재를 조달하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반드시 춘양에서 나지 않더라도 재질이 우량한 소나무는 모두 춘양목이라고 부르듯이 남해지방에서 조달한 경판용재의 나무를 흔히 거제목이라고 하였던 것 같다.
즉 거제도에서 생산되는 나무는 흔히 거제목(巨濟木)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다시 거제수(巨濟樹)로 변형되고, 공교롭게도 지리산, 가야산등 남부지방의 고산지대에는 거제수(去災樹)라 불리는 나무가 본래부터 자라고 있었으므로 거제도에 나는 나무 전부에 대한 일반명으로서의 거제수를 남부지방의 고산에 분포하는 고유수종인 거재수로 잘못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거재수나무는 고산지대에 분포하므로 일반인들이 잘 모르고 또 흰 수피가 종이처럼 잘 벗겨지는 모양이 흔히 알려져 있는 자작나무와 거의 비슷하여 구분이 어렵다. 한자로도 거제수나무와 자작나무는 같은 '화'자 표기를 하므로 대장경판이 자작나무로 알려지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의 재질은 문헌사적으로나 필자의 현미경을 이용한 과학적인 조사결과로나 전부 자작나무로 알져진 것은 잘못임이 밝혀졌다.
4. 과연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옮겨왔는가?
몽고와의 처절한 항쟁을 하면서 수도 마저 강화도에 옮겨놓은 누란의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제작한 팔만대장경의 경판은 어디에서 제작하였으며 오늘날 해인사에 보관되게 된 과정은 어떠하였는가?
한마디로 이 문제에 대하여는 아직도 명확한 사실을 알 수 없으며 몇몇 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이다. 그 이유는 이와 관련된 역사적 기록이 너무 빈약하기 때문이다. 이하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종34년(1247)까지 대체적이 판각작업을 마무리하고 마지막 정리를 한후 고종 38년(1251) 드디어 고려국의 오랜 염원이었든 고려재조대장경은 햇빛을 보게 되었다. 위로는 임금과 문무백관, 아래로는 일반서민에 이르기 까지 불심으로 뭉쳐진 국민들은 장장 16년간에 걸친 고난과 희생의 결정체인 팔만장이 넘은 대장경판을 완성하고 얼마나 기뻐하고 가슴 뿌듯해 하였겠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조정에서는 전쟁이 채 끝나지 않은 어려운 시기지만 축하행사가 당연히 있었을 것이며 고려사에는 보이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幸城西門外 大藏經板當 率百官行香 顯宗時板本 燃壬辰蒙兵王與君臣 更願立都監 十六年而功畢}. 즉 고종은 문무백관의 신하를 이끌고 성의 서문 밖 대장경판당에 가서 임진년 몽고침략으로 타버린 초조대장경을 대신하여 16년에 걸쳐 도감을 세우고 대장경을 다시 만드는 대역사가 끝나고 임금과 신하가 모두 참여한 가운데 성대한 축하행사를 하였다는 내용이다. 이때는 아직 개성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이므로 성의 서문 밖이라 함은 강화도의 임시 수도를 말하는 바 대경경 판당의 위치는 강화도에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후 1251년에서 이태조 7년(1399)에 이르는 150 여년 동안 고려가 망하고 새로운 조선왕조가 들어서는 등 정치적인 격변기를 겪으면 서도 우리의 역사기록에는 대장경에 관한 내용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어디다가 어떻게 보관하였고 인쇄는 몇 번이나 하였는지 또 도장(道場)을 열어 대장경을 강의하고 토론하였다는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대장경판은 현 강화읍에 절터가 남아있는 선원사에 봉안되어 있어든 것으로 추정할 따름이다.
강화도에 있었든 것으로 추정되는 대장경판이 언제 해인사로 옮겨졌는지에 대해서는 증명할만한 자료가 매우 불충분하여 많은 논의가 있고 심지어 대장경판은 강화도에서 옮겨온 것이 아니라 남해나 거제도 등에서 새겨서 해인사로 가져왔다는 재래설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그러면 몇 가지 대장경판을 새긴 장소와 옮겨온 과정 및 시기에 관한 기록을 검토해보자.
4.1 재래설(在來說)
신라 애장왕때 창건된 천년 고찰 해인사에는 그 역사만큼이나 많은 고문서가 있는데 몇 고문서의 기록을 근거로 경판을 새긴 당시부터 해인사에 있었다는 주장이다.
대장경판과 직접 관련을 지어 볼 수 있는 문헌은 해인사 유진 팔만대장경 개간 인유(留鎭 八萬大藏經 開刊 因由)와 해인사 사적비(事跡碑)가 있다.
먼저 팔만대장경 개간 인유를 보면 신라때 이거인(李居仁)이란 사람이 거제도에서 경판을 새기고 해인사로 운반한 것을 기념하여 축하 법회를 연 사실을 기록한 내용이 있다.
{경상도 합천 땅에 이 거인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집안형편은 비록 가난하였으나 원래 성품이 온순하고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어서 이웃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좋아하는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서(里胥)라는 말단 관직을 가지고 있을 때 당대중(唐大中) 임술년 가을에 어느 마을을 순회하다가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오는 중 길바닥에서 희한하게도 눈을 셋씩이나 가진 강아지 한 마리를 얻어 집으로 데려가게 되었다. 이 강아지는 자라면서 모양은 마치 사자와 같았으나 성질이 온순하여 마치 착한 사람 같았으며 하루에 한끼밖에 먹지 않으면서도 주인에게는 한없이 충실하였다. 주인이 외출할 때나 귀가 할 때마다 오리쯤은 따라나와서 전송하고 환영하므로 이 개를 거인은 자기 자식처럼 애지중지 길렀는데 3년 후인 갑자년 가을에 갑자기 병도 없이 앉아서 죽어버렸다. 거인은 그 개의 주검을 슬퍼하여 꼭 사람과 같이 관에 넣어 정중한 장례를 치루어 주었다. 그런데 다음해인 병인년 10월에 거인도 역시 갑자기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죽은 거인이 저승에 가니 난데없는 임금님이 있길래 쳐다보았더니 눈이 셋이고 머리에 쓴 관 모양이 다섯 봉우리 모양이고 손에 보홀(寶?)을 들고 붉은 비단옷을 입었으며 입술이 빨갛고 치아가 가지런한데 상아로 만든 의자에 높이 앉아 있었다. 좌우에 거느리고 있는 신하들은 모두 까만 모자에 붉은 도포를 입고 있었으며 두상이 소머리 모양이고 말 얼굴을 하였으며 삼엄하게 호위하고 있는 모양이 어마어마하여 인간세상의 어느 임금님보다 못지 않았다.
그런데 세 눈을 가진 귀왕(鬼王)이 거인을 쳐다보더니 바로 옥좌에서 내려와 허리를 굽혀 절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주인님 어찌된 일이십니까? 저승에서 이렇게 주인님을 뵈오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제가 일찍이 천상에서 죄를 진 바 있어 개의 몸으로 변하여 인간세상으로 귀양살이를 간 것인데 다행히 착한 주인님을 만나 편안히 잘 있다가 다시 돌아와 복직되어 오늘 이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이런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참으로 고맙고 황송합니다."
이 말을 듣고 나니 이거인도 전에 집에 있던 눈이 셋 달린 개가 바로 지금의 저승 임금이라는 것을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거인도 역시 이 기이한 인연에 놀라 인사를 마치고 눈물로서 대답하였다.
"천한 이 몸이 본래 배우지 못하고 아는 것이 없는데 이제 곧 염라대왕을 찾아 뵈오면 묻는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귀왕께서는 저로 하여금 이롭게 되는 길을 가리쳐주십시요" 하였다.
귀왕이 말하기를
"착하고 어진 주인님이여! 이제 내가 상세히 아르켜드릴테니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염라대왕한데 가면 인간세상에 있을 때 무슨 좋은 일을 하였느냐고 틀림없이 물으실 것입니다. 몸이 천한 일에만 종사하여 좋은 일은 할 사이도 없었습니다. 항상 부처님 말씀의 귀중함을 받들고 대장경판을 만들어 널리 알리려 하였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이렇게 저승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라고 대답하라 하였다.
그래서 거인은 귀왕의 말을 명심하여 듣고 나서 곧 사자들의 안내를 받아 저승에 들어가니 염왕이 묻기를 "너는 인간세상에 있을 때 무슨 좋은 일을 하고 왔느냐?"고 하였다.
"저는 젊은 시절부터 말단 관직에 있었던 탓으로 착한 일을 할 사이가 없었기에 나이가 들면서 장차 큰 불사를 일어켜 부처님과 인연을 만들고자 하였는데 갑자기 저승사자의 부름을 받아 이렇게 죽어 왔사오니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거인의 대답을 들은 염라대왕은 부드러운 얼굴로 친절하게 앞으로 가까이 오라하기에 공손히 앞으로 나가니 염라대왕은
"그러면 네가 인간 세상에 있을 때 무슨 일을 하려다가 이루지 못하고 말았느냐 사실대로 말하여라" 하였다.
거인은 아까 귀왕이 미리 알려준 바와 같이 "이 천한 몸이 듣건데 부처님의 말씀은 지극히 귀하다 하옵기에 장차 경판을 새겨서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하다가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심히 유감입니다." 하였더니
이 말을 듣고 일부러 뜰로 나려온 염라대왕은 매우 친절한 태도로
"바라건데 잠시 올라와서 일시 쉬도록 하여라" 하였다. 그러나 거인이 계속 사양하자 염라대왕은 판정관에게 명령하여 거인을 귀신명부에서 제외하게 하였다. 이어서 염라대왕은 거인을 칭찬하여 마지않으면서 정해진 수명보다 더 보태어 인간세상으로 되돌아가게 하였다.
백배사례하고 돌아 나오다가 다시 귀왕의 거처를 찾아 작별인사를 하려하니 미리 자리를 만들어 두고 어가 가까이 오르게 하여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하기를
"주인님 큰 일을 맡으셨나이다. 그러나 조금도 염려하시지 말고 집에 돌아가시면 권선문을 지어서 팔만대장경이라 제목을 쓰고 선행을 한 공로 이야기를 판으로 새겨 관청에 납본하여 도장을 받아 보관해 두십시오. 그리하여 내년 봄에 내가 인간세계를 순시할 때를 다시 만나기로 하지요."라 하였다.
거인은 안심하고 유유히 물러나와 크게 지지게를 켜고 잠을 깨치니 한바탕의 꿈이었다. 거인은 곧 공덕문을 지어서 관인을 받아두고 봄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더니 어느듯 다음해인 정유년 봄이 되었다.
이때 마침 신라의 공주자매가 동시에 병을 얻어 자리에 누워있다가 어느 날 부왕에게
"바라건대 급히 대장경 화주(化主-중생을 교화 인도하는 학식 높은 스님)를 불러 주십시요. 아니면 여식들은 곧 죽어 버릴 것입니다."
하며 통곡하는지라 임금은 곧 바로 합천 태수에게 연락하여 거인을 서울로 보내게 하였다.
거인이 궐문에 이르니 연락을 받은 공주가 나와서 말하기를
"화주님이시여 잘 오셨습니다. 와 주셔서 아픔은 다 나았습니다. 내가 바로 저승에서 만난 귀왕입니다. 저승에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찾아왔습니다." 한다.
공주는 다시 임금님께 말씀드리기를
"이 사람 거인은 전에 저승으로 들어갔더니 염라대왕께서 다시 인간세계로 되돌려 보냈다하오며 이는 오로지 대장경판을 새겨서 온누리에 널리 알리도록하기 위함이니 원하옵건데 부왕께서는 대단(大檀-불교의 특별한 의식을 치루는데 필요한 단)을 만들어서 이 큰 일을 도모함이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리하시면 저희 공주들도 무병할 것이고 나라의 행운이 영원할 것이며 부왕께서도 오래오래 복을 누리실 것입니다."함에 왕은 곧 허락하였다.
이에 임무를 다한 귀왕은 거인과 작별을 고하고 다시 현신하여 천상으로 돌아가 버렸다.
공주에게 있든 귀왕의 혼령이 떠나자 병이 완쾌되고 정신도 본 정신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공주는 다시 부왕과 모후에게 아뢰기를
"저승에서도 이처럼 착한 일만 하였는데 하물며 인간세계에서 어찌 등한히 할수 있겠습니까? 부모님께서는 소홀히 하지 마십시요" 하니 왕이 감복하여 대장경 각판을 허락하였다. 왕은 곧 화주의 착한 마음씨를 칭찬하며 대각승통을 불러 대장도감으로 설치하였다. 사재를 들여 대장경 각판을 잘하는 사람을 불러 모우고 거제도에서 경판을 만들어 금으로 장식하여 옻칠을 하고 해인사에 옮긴 다음 십이경찬법회(十二慶讚法會)를 열었다.}
내용 중 {당대중 임술년}과 {신라}라는 말이 이 기록을 믿지 못하게 하고 있다. 왜냐하면 대장경판에는 말미에는 {고려국대장도감 봉칙조조(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라하여 고려 고종때 각판하였다는 사실은 너무 명백하여 이론을 제기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해인사 사적비는 조선 영조45년(1769)에 새운 것인데 비문내용중에 {....高麗文宗時藏大藏經板 我惠莊大王 戊寅歲 重修板閣又印其經文焉....}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고종보다 거의 200여년이나 앞선 고려문종(재위기간1046-1083)시대에 경판을 해인사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으로서 이 역시 같은 이유로 인정을 받고 있지 못하다.
4.2 강화출육설(江華出陸說)
언제쯤 해인사로 왔는지 시기에 대한 논란은 있으나 강화도에서 새겨 해인사로 옮겨왔다는 설이 가장 널리 인정되고 있고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몇가지 주장을 보면 다음과 같다.
4.2.1 고려말설(高麗末說)
이는 다카하시(高橋亨)라는 일본인 학자 등에 의하여 주장된 것으로서 고려말에서 이조 초까지 국왕이나 개인이 대장경을 인출한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신라때 부터 이조 숙종조에 걸쳐 시문을 모아 엮은 동문선(東文選) 68권의 박전지가 지은 영봉산 용암사 중창기를 보면 충숙왕 5년(1313) 임금은 구 대장경이 부식되어있음을 보고 이 절의 주지에게 명하여 새로이 인출하여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내용중에 {就江華板堂印出闕函闕卷闕張而來}라는 구절이 있어 강화판당에서 인출하여 가져온 것을 알 수 있어서 이때까지도 대장경판은 강화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동문선 76권에 보면 이숭인이 지은 신륵사대장각기(神勒寺大藏閣記)가 있는데 이는 이색이 우왕 7년(1381)에 죽은 부친의 뜻을 따라 대장경을 인출하고 신륵사에 대장각을 세워 안치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또 이숭인의 도은집(陶隱集)에는 {睡庵長老印藏經于海印寺獻呈}이라는 시(詩)구절에서 수암장로가 해인사에서 대장경을 인경하여 바쳤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상의 자료를 근거로 대장경판을 해인사로 옮겨온 것은 고려충숙왕 5년(1318)에서 우왕7년(1381)에 걸치는 63년간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유일한 근거라고 할 수 있는 수암장로 시구절의 {장경}이 지금도 해인사에는 고려 중기 및 말기에 새긴 삼본화엄경등 사간(寺刊)경판이 많이 있으므로 이것이 정장 고려대장경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이유 등으로 거의 인정을 받고 있지 못하다.
4.2.2 정축년출육설(丁丑年出陸說)
태조3년에서 정종원년사이의 7년간에 옮겼다는 설이다.
해인사 사간장에서 발견된 석화엄교분기 원통초(釋華嚴敎分記圓通?)에는 제 10권 10장 판의 윤곽 바같 쪽에 <丁丑年出陸時 此?失 與知識道元同願開板入上 乙酉十月日 首座?玄>이라 음각되어 있다. 즉 {정축년에 강화도로부터 내올 때 이 경판을 잊어버렸으므로 수좌 충현이 지식 도원과 함께 불사를 일어키고 을유년 10월에 판을 새겨 넣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판이 대장경판을 옮긴후 정리를 할 때에 원통초 10권10장판이 없어진 것을 알고 정축년에서 9년 후인 을유년에 판을 새겨 넣었는데 뒤에 인경작업등을 하다가 원본을 찾아내었으므로 새로 새긴 충현의 판은 잡판으로 돌린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정축년(1398)에 출육한 대장경판은 이후 을유년(1406)까지 9년에 걸쳐 해인사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여기서의 정축년이 이조실록의 태조 7년(1399)조의 출육기록과는 1년의 차이가 있고 정장이 아닌 잡판에 있는 점을 들어 후세의 가짜 판각일수도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4.2.3 태조7년설(太祖七年說)
조선왕조 태조 7년 5월 10일과 정조 원년의 1월 9일 사이에 대장경판을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옮겨왔다는 설이다.
이에 관하여는 이조실록 태조 7년(1399) 5월조에 {丙辰 幸龍山江 大藏經板 輸自江華 禪源寺 丁巳雨戊午雨 令隊長隊副二千人 輸經板于支天寺命檢參贊門下府使兪光祐 行香 五敎兩宗僧徒 誦經 儀仗鼓吹前導}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이태조가 1399년 5월 10일 한강으로 행차하여 대장경판이 강화도 선원사로 부터 가져오는 것을 참관하였다. 비는 10일부터 12일 까지 계속되었고 2천명의 병사를 동원하여 지천사로 옮겼다. 검참찬문하부사 유 광우에게 명하여 향을 피우게하고 오교양종의 승려가 경을 외우고 의장을 갖추어 나팔을 불며 인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지천사의 위치는 서울 서대문밖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기록에서는 강화도에서 옮겨온 대장경판이 전부 혹은 일부인지, 정장인지 속장인지 나아가서는 여기서 말하는 대장경판이 우리가 알고있는 고려대장경판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경판인지도 명확히 알 수 없다.
다시 조선왕조실록의 정종조를 보면 정종원년(1499) 정월 9일에 경상감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볼 수 있다.
{太上王欲以 私財印成大藏經 納東北面 厥畜菽栗五百四十石于端吉兩州倉 換海印寺傍近 諸州米豆} 즉 "대장경 인쇄에 참가할 승려들을 공양하기 위하여 태상왕 이성계는 동북면에 저축한 콩과 밤 540석의 사재를 내어놓았는데 거리가 멀어 직접 가져 갈 수 없으니 단주와 길주 두 고을 창고에 납입하게 하고 해인사근방의 여러 고을에서 쌀과 콩을 대신 내주도록 하라."는 기록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기록을 비교해보면 1399년 정월에 대장경판은 벌써 해인사에 있었고 만약 강화도에 팔만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었다면 지천사로 옮긴 1400년의 5월 10일과는 불과 8개월의 기간밖에 없으며 이 사이에 대장경은 서울의 지천사에서 해인사로 옮겨온 셈이 된다. 이 주장은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출처가 분명한 자료의 기록이고 명확한 연대가 있는 점을 들어 가장 널리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러나 8개월 동안에 과연 그 많은 경판을 해인사로 옮겨올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논란의 여지가 많다.
4.3 대장경판 2벌 설
일본은 고려말부터 조선왕조 효종에 이르는 2백 여년간 끝없이 대장경을 하사해 달라고 요구하였으며 그때마다 우리 조정에서는 처리에 골몰하였다. 적당한 핑계로 아예 주지 않거나 또 주더라도 정장이 아닌 밀교장경등을 대신 보내기도 하였다.
조선왕조 실록 정종 원년(1399) 7월 21일에 보면 일본 사신의 부관인 스님 10여명이 입궐하여 예를 올리니 모시·삼베 및 인삼과 호랑이가죽·표범가죽 등의 물건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대장군과 의홍이란 사람이 우리 나라를 위하여 적을 멸한 뜻을 사례하고, 또 대장경판을 하사해 주십사고 청한 것에 대하여 대답하였다.
"예전에 2벌이 있었는데, 1벌은 나라 사람들이 인쇄하는 것이고, 나머지 1벌은 바다 도적떼가 불태워서 없어진 것이 많아 완전하지 못하다. 장차 유사를 시켜 완전히 보충하여 보낼 터이니, 배를 준비하여 와서 실어 가라."
라는 기록이 있다.
또 세종 5년 12월(임신)조에는 일본국왕의 사신 규주와 범령이 와서 국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중에 {귀국에는 장경판이 1벌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은 바 1벌의 하사를 요청한다.(別有所請 聞貴國藏經板非一 要請一藏板)}
이상의 문헌을 보면 대장경판을 만들 때 2벌을 만들어 한 벌은 강화도에, 나머지 한벌은 해인사에 두었다는 내용으로 지금까지 우리가 대장경판의 판각위치나 옮겨온 경로에 대한 문헌기록과 맞아떨어지므로 여러 가지 의문점은 말끔하게 풀어 버릴 수 있다. 즉 해인사 한 벌은 남해나 거제도의 경판을 새길수 있는 나무가 많이 나오는 지역에서 만들어 수시로 해인사로 옮겨도 놓았고 강화도 경판은 서해안 및 남해안에서 나무를 실어다가 강화도에서 새긴 후 보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2벌설은 한 벌을 새기기에도 전 국력을 동원하여야 할만큼 벅찬 국가적인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경판을 두벌 새겻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 만약 정조때 한 벌을 일본에 주어 버렸드라면 다시 대장경을 달라고 매달리지는 않았을 것인데 정조이후에도 효종에 이르는 160연년 동안 끈질기고 집요하게 150여 차례에 걸쳐 일본인들이 우리 조선에 대장경을 요구한 것을 보면 2벌 설은 믿기 어렵다. 그러나 기록이 정확하기로 이름난 조선왕조 실록에, 그것도 외교사신을 접견한 자리에서 임금이 하신 말씀을 그냥 흘려버리기에는 많은 여운이 남은 대목이다.
5. 옮겨오는 과정에 일어나는 문제점은?
해인사에 있는 대적광전의 벽화를 보면 대장경판을 소달구지에 싣고 남자는 지게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옮겨가는 모양을 그려 놓았다. 그러나 이 그림이 반드시 강화도에 서 옮겨온 경판이라는 증거가 없는 이상 당시의 상황을 그려놓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거제도나 남해에서 만든 경판을 수시로 해인사로 옮겨오는 과정을 그린 그림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본다면 강화도 대장경판을 옮겨오는 길은 육상운반과 해상운반의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육상운반은 조선왕조 실록 태조 7년의 기록대로 강화도에서 서울의 지천사로 옮겨온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지천사에 얼마동안 보관되었든 경판은 남한강, 충주까지 한강을 거슬러 올라온 다음 육로로 문경새재를 넘어 점촌을 거쳐 낙동강변에 도착한다. 수로로 낙동강을 타고 내려와서 고령의 장경나루에 도착, 다시 육로로 해인사로 운반하는 과정이다.
해상운반은 강화도 선원사 혹은 서울의 지천사에서 조운선에 싣고 서해와 남해를 거쳐 낙동강을 거슬러 고령의 장경나루에 도착하는 길이다.
그러면 대장경판을 먼 산간오지인 해인사까지 운반하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우선 안전하게 이동하기 위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대장경판은 나무로 만들어 졌으므로 충격과 습기에 노출되면 파괴되거나 썩어버릴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또 글자의 크기는 사방1.5cm정도의 정사각 형안에 굵기 2mm정도, 글자깊이 2mm정도이며 글자 끝의 빗침 부분은 가늘고 날카로워 조그만 충격에도 떨어져 나가 버릴 수 있다.
따라서 포장작업을 정교하게 하지 않으면 옮기는 과정에 경판은 대부분 각판부분이 서로 맞닿아 마멸되어 쓸모 없게 되거나 비를 맞아 경판이 갈라지고 비틀어지는 등 막심한 피해가 생길 것이다. 각판 당시에도 마구리의 손잡이를 글자를 새긴 경판 보다 두껍게 하여 서로 맞닿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하였다.
준비로서 경판이 서로 맞닿지 않게 완충포장지를 넣어 고정하고 사람이나 우마차가 들거나 싣기에 적당한 크기로 튼튼한 포장을 해야한다. 경판과 경판 사이에 쓰일 수 있는 완충지는 한지, 베, 짚 등을 생각할 수 있고 몇 개씩 단위로 포장하는 데는 외부충격을 감안하여 비교적 두꺼운 나무판자로 만든 괘짝이 아니면 않된다.
이상과 같은 몇 가지 재료에 대한 가정을 해두고 재료의 양이 어느 정도일지 계산해보자. 경판 한 면의 넓이는, 대부분을 차지하는 68cm경판과 78cm경판의 평균으로서 길이 73cm를 잡고 폭을 24cm로 보아 약 1,752cm2가 된다. 이를 경판의 장수로 곱한 전체 경판의 한쪽 넓이는 자그마치 1억2천4백만m2, 우리가 요즘 사용하고 있는 한지 크기로 따져도 2500만장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지 한 장으로는 완충효과를 가져올 수가 없으므로 적어도 3-5장은 필요하였다면 어림잡아도 1억장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포장단위는 크게 잡아 한사람이 30-40kg을 짊어지고 옮길 수 있는 것으로 가정하여 경판 한 장의 무게가 3.5kg정도인데 포장판자의 무게를 포함하여야하므로 10장 이내로 생각된다. 경판10장을 쌓으면 높이는 대략50cm, 포장판자의 두께를 한치(2.5cm)로 본다면 한묶음을 포장하는 데 0.03m3 약 100사이의 판자가 필요하다. 기타 포장의 양옆에 들어가는 짚 등의 완충제를 생각해 보면 필요한 재료는 엄청난 양이 필요하다.
다음은 육상이든 해상이든 대장경판을 해인사로 가져오는 과정에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생각해 보자.
첫 번째는 태조7년 5월 10-12일에 걸쳐 지천사로 옮길 때 군사 2000명이 동원되었다 하였으나 이 숫자로 팔만대장경을 전부 옮겼다는 것은 생각할수도 없으며 옮기기 위하여는 적어도 수 만 명이 동원되어야 한다. 이 기록대로 라면 3일 동안에 전부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고 오랫동안 옮기는 작업을 계속하다가 마지막 옮기는 날 태조가 격려 차 행차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두 번째는 당시의 동원 장정수와 대장경판의 무게와의 관련을 지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대장경판의 무게는 개략적으로 경판당 평균무게를 3.5kg으로 보아 8100여장의 무게는 약 28만kg, 여기에 포장을 포함하면 40-50만kg으로 추정할 수 있다. 장정 한사람이 최대 30-40kg을 진다면 연 인원 약 1만 4천여명의 인원이 필요하다.
세종실록 지리지(地理誌)에 의하면 태종6년의 경기도 및 충청도의 장정수는 각각 38,138명과 44,476명이다. 따라서 경기충청 양도의 전체 장정의 17%가 동원되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물론 수운과 우마차를 겸용을 생각하면 동원 인원수는 훨씬 줄 수가 있으나 농번기가 포함되어 있고 당시의 교통상황 및 장정 동원에 따른 잠자리와 식사문제를 고려해 본다면 전혀 가능하지 않다. 만에 하나 이렇게 많은 장정이 단기간에 동원되었다면 국가적인 지원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고 이조초기의 사회분위기가 국고를 허비해 가면서 대장경 운반에 대대적인 지원을 할 수는 없었다고 생각된다.
세번째로는 강화도 선원사에서 서울 지천사로 다시 새재를 넘어 낙동강을 내려와 장경나루를 거쳐 해인사의 장장 천리길을 옮겨왔다면 아무리 포장을 철저히 하였더라도 마멸되거나 각자부가 떨어져 나간 부분이 상당수 있을 것이고 적어도 서로 맞닫는 마구리에는 옮기는 동안의 흔들림에 의하여 마멸된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의 해인사 경판에는 물리적인 마찰에 의한 흔적은 전혀 관찰되지 않는다.
네 번째는 정조 원년 1월 11일 대장경판을 인경하기 위하여는 적어도 수개월 전에 해인사에 경판이 도착해 있어야만 경판을 정리하고 분류하여 인쇄할 수 가 있다. 1915년 일본인들이 카드를 작성해 가면서 과학적으로 인경작업을 수행하는데도 인쇄가 끝난 대장경의 정리에만 4개월이 소요되었다 한다. 무질서하게 옮겨온 경판의 권.차를 순서대로 정리하는 데 아무리 낮추어 잡아도 1-2개월은 소요되며 더욱이 그 사이에 한 겨울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이유를 감안한다면 정조실록의 기록대로 원년 정월 11일에 경판을 인쇄하기 위하여는 대장경판이 적어도 한해 전인 태조7년 10월까지 해인사에 도착하여야 할 것이다. 5월12일 지천사에 옮겼다 하였으니 얼마동안은 지천사에 보관하였다고 보아야 하며 설령 옮기자 말자 바로 해인사로 출발하였다고 가정하더라도 약 5,6개월 동안에 해인사에 옮겨와야 한다는 결론이나 한 여름의 무더위와 장마철이 또 이 기간에 포함되어 있다.
다섯 번째는 당시로서는 그 엄청난 양의 대장경판을 옮기기 위하여는 적어도 범국가적인 경비지원과 수많은 인원을 이 사업에 동원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조초기의 기록들이 실록을 비롯하여 세세한 내용까지 상세히 기록에 남아있는데 반하여 대장경 이운에 관한 내용은 실록은 물론 어느 역사서에도 남아있지 않다.
이상과 같이 여러 가지 정황을 검토해 보면 대장경판은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옮겨왔다는 학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태조실록과 정조실록에 의거하여 태조7년 5월12일에서 정조원년 정월 11일 까지의 9개월의 기간동안에 대장경판이 강화도 선원사에서 합천 해인사로 옮겨왔다는 태조7년설은 물리적으로 전혀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6. 대장경은 어떻게 인쇄하였는가?
목판으로 만들어진 대장경은 그대로 두어서는 주옥같은 부처님 말씀을 중생에게 전달 할 수가 없다. 처음부터 인쇄하여 여러 권의 책으로 만들어 반포하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태종13년 3월11일 대장경을 개경사에 안치할 목적으로 해인사에서 인쇄한 기록 중에 풍해·경기·충청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그 도에서 만든 경판 인쇄용지 2백 60속(束)을 경상도에 보내게 하고, 또 경상도 관찰사에게 명하기를,
“지금 수집한 인쇄용 종이를 해인사로 수레에 실어 보내니 대장경을 인쇄하고 여기에 관련된 여러 사람과 중 2백명에게도 보수를 모두 지급토록 하라.”
등의 단편적인 기록이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경판을 인쇄하였는 지는 상세히 알 수 있는 기록이 없으므로 추정해 보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 1915년 팔만대장경 전체를 인쇄하면서 {고려대장경 인쇄전말}이라는 보고서가 남아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6.1 인쇄용지
인쇄용지는 제본용지, 절본(折本)용지 철본(綴本)용지로 나누고 이중에 실제로 경을 인쇄하게 되는 절본용지의 제조에 가장 정성을 기울렸다.
인쇄용지는 본래 황지(黃紙)를 사용하던 예에 따라 수십종의 견본을 만들어 약 40일간 햇빛에 노출시키고 실험해본 결과 삽목(澁木)과 천궁을 끓인 즙을 섞고 닥나무를 원료로 종이를 뜬 것이 가장 변색이 덜되고 우수하였다. 제본의 크기는 약간의 여분을 포함하여 세로 35cm, 가로 58cm로 하고 16만5천여장을 제조하였다.
철본용지는 그냥 백지를 쓰기로 하고 세로 41cm, 가로 61cm의 크기로 하여 33만여장을 만들었다. 제본용지는 모두 황지를 사용하기로 하고 1만2천여장을 제조하였다. 종이의 원료는 모두 국산 닥나무껍질을 사용하였으며 1914년 10월에 종이를 만들기 시작하여 1915년 7월 초순에 끝마쳤다.
6.2 인쇄인원
이 당시에 벌써 활판인쇄가 보급되기 시작하여 목판인쇄공은 극소수이었으며 1년전 부터 22명을 시험을 통하여 선발하고 3개월간 고용계약을 맺었다.
6.3 카드작성
옛 대장경을 인쇄할 때는 판가에서 꺼내어 사용하고 바같에다 그대로 쌓아두었다가 인쇄가 다 끝난 다음에 판가에 넣은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이 때문에 경판이 뒤섞여 다시 순서대로 찾아 넣는데 어려움이 많았고 인쇄된 대장경은 200여명의 승려가 동원되어 한 달이 넘게 정리하였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이번의 대장경 인쇄는 대장경이름, 권, 차별로 색깔을 달리하여 카드를 작성하고 인쇄가 끝나면 바로 원래의 판가에 되돌여 넣어 혼란을 막고자 하였다. 카드매수는 20,415매이며 5명이 동원되어 14일이 걸렸다.
6.4 인쇄에 사용한 용품
여러 가지를 비교해본 결과 옛 먹이 우수하여 평안남도 양덕에서 생산되는 먹이 가장 우수하였다. 먹을 비롯한 기타 품목은 다음과 같다.
양덕산 송연묵(松煙墨) |
17,45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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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털(마발,馬髮) |
6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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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 솔 |
6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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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 솔 |
2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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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랍(黃蠟) |
1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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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로 |
1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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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루 |
2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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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목(定木) |
20개
|
사침(沙針) |
40개
|
6.5 인쇄과정
인쇄시기는 작업이 편리하고 판목을 손상시킬 염려가 없는 3월 중순부터 시작하였다. 인쇄장소는 처음에는 경판장의 가운데 통로를 사용할 예정이었으나 춥고 작업공간이 좁아 불편하므로 가까이 있으면서 거의 사용하지 않은 불당을 쓰기로 하였다.
인쇄방법은 하루 전에 용지를 물에 적시고 먹물도 준비하였다가 인쇄공의 왼쪽에 용지를 순서대로 맞추어 그 옆에 물에 적신 솔과 밀랍을 놓고 오른쪽에는 먹물과 벼루 풀뿌리 솔 및 말털을 놓은다. 앞에는 판목을 놓고 2사람의 중간에 밀랍을 녹일 화로를 놓은다. 무릅 옆에 정목을 놓고 먼저 먹물을 벼루 위에 부어 풀뿌리 솔로 이를 개고 다음에 밀랍을 말털에 칠하여 인쇄할 판목에다 짚솔로서 물을 바르고 풀뿌리솔로서 몇 번씩 경판 표면을 닦아 먼지를 제거한다. 다음 풀뿌리 솔로서 먹물을 경판면에 칠하고 용지를 정목에 맞추어 경판 위에 펼쳐서 말털로 여러 차례 눌러서 인쇄한다.
6월2일까지로 작업이 끝났으므로 약 2개월 반이 걸린 셈이며 인쇄공의 연인원수는 총 1,306명이고 판목의 출납 및 인쇄용지 정리 등에 소요된 인부는 966명이었다.
6.6 결판(缺板) 및 결자(缺字)의 보충
판목을 정리한 결과 결판 18매가 있음을 발견하였으므로 월정사 등에 보관된 옛 인쇄본을 참조하여 보충할 경판의 원고를 확정하였다. 경판에 사용할 나무는 서울근처 여러곳에서 수집한 배나무재를 제재하여 이용하였고 서유거의 임원경제지에 기록된 대로 소금물에 침수하고 쪄서 건조할 예정이었으나 건조에 2개월 이상이 소요되고 인쇄작업에 차질이 우려되어 공업시험장에 의뢰하여 증기인공건조법으로 건조하였다. 판각이 끝난 경판은 전 표면에 옻칠을 하고 4귀퉁이에는 구리로 만든 금구(金具)를 밖아 넣어 옛날의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또한 대장경을 인쇄한 후 글자가 빠진 경판을 검사한 결과 136개소 1,017자가 있어서 결판의 예에서 마찬가지로 이미 인쇄되어 있는 대장경을 참고하여 다시 새겨서 경판에 붙여 넣었다.
6.7 제본 및 마무리
인쇄된 대장경은 서울로 옮겨와서 4월 8일부터 8월 30일까지 약 5개월이 걸렸고 인원은 감독 및 교정인원을 제외하고도 총 2,090명이 소요되었다. 인쇄된 대장경의 수는 목록을 포함하여 총 1,511종 6,805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