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판의 새기는 과정의 추정
팔만대장경판은 폭악한 몽골군을 퇴치하기 위한 고려인의 피맺힌 염원을 역사속에 파묻는채 속인들이 부질없이 알고 싶어하는 비밀의 문은 여전히 닫아두고 말없이 해인사 수다라장과 법보전안에 81,258장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이제 우리는 앞에서 여러 가지로 검토해본 자료들을 바탕으로 나무를 베어 내어 말리고 다듬어서 고려인들이 그렇게 정성을 쏟아 부은 경판의 만드는 과정을 재구성해 보자.
경판 나무의 선정
산벚나무와 돌배나무 등 경판에 쓰인 나무는 같은 종류의 나무가 한꺼번에 모여서 자라지 않은다. 각자의 자람에 가장 적당한 곳에서 나름대로 자라는 나무이다. 운 좋게 땅이 깊고 양지바른 곳을 선택한 나무가 자라는 곳엔 경쟁자가 많게 마련이다. 물푸레나무, 참나무 등 우악스럽고 무서운 경쟁자를 물리치기 위하여는 하늘을 향하여 한눈 팔지 않고 빨리 높이 올라가지 않으면 안된다. 보다 많은 햇빛을 얻는 것이 바로 생존과 연결되고 많은 나무와 경쟁한 나무일수록 늘씬하고 곧바른 줄기를 갖게 된다. 이런 나무만이 경판재로 쓸 수 있다. 부처님의 말씀이 새겨질 영예로운 경판재로 선택되는 첫 번째 조건은 짧게는 30년, 길게는 40∼50년씩 자란 나무 중에서 굵기가 40센티미터 이상은 되어야 하고 곧바르고 옹이가 없어야 한다.
아무리 좋고 적당한 나무라도 베어서 가져 나오기가 어려워서는 쓸모가 없는 나무일 따름이다. 경판재로 가장 많이 사용된 산벚나무는 살고 있는 동네에서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깊은 산에서만 자라는 나무가 아니고 야트막한 앞산이나 뒷산에서도 흔히 만나는 친근한 나무이다. 산벚나무는 이른봄에 잎이 나기도 전에 온통 분홍빛 꽃을 피우고 나무껍질은 대부분의 다른 나무가 시꺼멓게 세로로 보기 흉하게 갈라지는 반면에 산벚나무는 진한 적갈색에 숨구멍이 가로로 나 있어서 멀리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또한 큰 장점이다. 돌배나무도 먹는 과일이 달리는 나무이니 어디에 가면 얼마만큼 크고 곧바르게 자라 경판재로 정당한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른 경판재 나무들도 어느 나무가 속썩음이 없고 옹이가 적어 베어내면 경판을 만들기에 적합한 좋은 나무인지는 금새 알아보았을 것이다.
벌채와 운반
경판을 만들기에 적당한 나무가 선정되면 다음은 나무를 베어 넘기는 벌채단계이다. 나무를 어디에 넘기는 것이 좋을지를 결정한 다음 넘어질 방향으로 땅에서 한 뼘 정도 떼어놓고 도끼자국을 깊게 넣는다. 반대편에 약간 높은 곳에 다시 도끼자국을 넣어 가면 예정된 곳으로 넘어진다. 가지가 붙어 있는 줄기부분은 옹이가 들어가 있어서 쓸 수 없으므로 경판을 만들기에 알맞게 적어도 90센티미터 이상의 길이로 절단을 한다.
이제는 가장 힘든 운반문제가 남는다. 경판재로 켜기 위해서는 적어도 가슴높이에서의 지름이 40센티미터 이상의 굵기를 가지는 나무이어야 하므로 생나무의 비중을 1로 보아 어림계산을 하여도 무게는 110∼130킬로그램이나 된다. 쌀 한 가마하고도 또 반 가마의 무게가 더 있으니 아무리 힘센 장정이라도 지게에 혼자 지고 내려오기는 어렵다. 두 사람이나 4사람이 한 조가 되어 어깨에 매고 영차! 영차! 목도를 해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목도 거리는 짧을수록 좋고 바다나 강에 바로 면하여 자란 나무는 굴러내려도 금새 물 속에 떨어지게 할 수가 있다. 일단 물 속에 떨어진 나무는 뗏목을 만들거나 배로 끌고 분사대장도감이나 경판재를 모으는 중간하치장에 옮겨가면 된다. 낙동강, 섬진강 등의 연안을 비롯하여 거제도와 남해도로 이어지는 크고 작은 섬과 바다에 맞 붙어있는 여수, 하동, 고성, 진해 등 남해안 해안선 지역이 대상지역이 될 것이다.
판자켜기
통나무상태로 운반한 후 한 곳에 모아 판자켜기 등 가공과정에 들어가는 것이 능율적이고 일관작업을 할 수 있는 장점은 있으나 강이나 바다와 조금만 떨어지면 운반에 엄청난 인력이 동원되어야 한다. 또 경판재처럼 크기가 들쭉날쭉하지 않고 일정한 판재를 얻을 경우에는 꼭 한 곳에 모아서 일관작업을 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 많은 경판재를 조달하기에는 강이나 바다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벌채하여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경판제작에 쓰인 대분분의 나무는 벌채하여 1∼2년 동안 현장에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가 판자켜기를 하여 필요 없는 죽더기 등은 내버리고 꼭 필요한 경판판자만 운반하였다고 본다. 이렇게 하면 여러 가지 장점이 있는데 우선은 운반하는 무게가 1/10 이상으로 줄어들어 훨씬 간편하고 효과적이다. 벌채 현장에 얼마동안 방치하는 이유는 또 다른 이점은 나무의 생장응력(生長應力)을 제거해 줌으로써 건조할 때의 갈라짐과 비틀어짐 등의 결함이 훨씬 덜 생기도록 하기 위함이다. 벌채한 생나무를 바로 켜면 살아 있을 때 나무에 걸려 있던 생장응력이 그대로 남아 있으나 통나무 상태로 눕혀 두면 꼿꼿하게 서 있을 때의 응력은 차츰 줄어든다. 그 외에 나무 속의 심재(心材)와 변재(邊材) 사이의 심한 수분차이도 상당히 없어지며 나무진도 빠져버린다. 목수들이 말하는 진을 빼고 삭히는 작업이 바로 이 과정이다.
나무를 베어둔 후 느긋하게 1∼2년 기다렸다가 이제는 충분히 진이 빠졌다고 생각되면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탕개톱(그림참조) 하나를 들고 베어 둔 자리로 다시 올라간다. 제법 굵은 나뭇가지를 잘라 X자 모양으로 판자 켜는 틀을 만들고 진을 뺀 통나무를 걸쳐서 두께5센티미터 정도의 판자가 나오게 표시한 다음 아래위로 서로 마주 보면서 흥부가 박타는 모양으로 톱질을 하면 원하는 경판판자가 만들어진다. 옹이가 많거나 썩은 부분이 포함되어 있어서 쓸 수가 없는 것은 그대로 버리고 오면 되므로 대단히 효율적이고 편리하다. 아무리 진을 뺀 나무라도 갓 켠 판자는 수분이 많으므로 표면이 햇빛에 노출되거나 오랫동안 공기 중에 방치하면 갈라지거나 비틀어질 염려가 있으므로 신속히 운반하여야 하고 바로 물 속에 담구어 두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이다.
산에서 바로 만들어진 경판판자는 적게는 몇 장, 많게는 십여 장씩을 지고 내려올 수 있다. 경판을 새기는 절에 개인적으로 {경판시주}를 하거나 분사대장도감 등 관청에 받쳤을 것이다.
대장경판과 바닷물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경판을 만들 나무를 베어 바닷물에 3년을 담궈 두었다가 소금물로 삶아서 건조한 후 경판을 만들었다고 한다. 과연 번거롭고 귀찮은 이런 과정을 왜 밟았으며 소금물에 삶을 필요까지 있었는가? 사실을 알아보기 위하여 우선 옛 문헌에서 찾아보자. 서유거(1764∼1845)의『임원경제지』이운지(怡雲志)에 경판을 만드는 방법과 인쇄후의 보관방법을 기술하고 있다. 즉 {나무를 켜서 판자를 만든 다음 소금물에 삶아내어 말리면 판이 뒤틀리지 않고 또 조각하기도 쉽다}라고 하여 경판재를 제작하는 과정에 먼저 소금물에 삶은 후 자연 건조하면 건조 중에 생기는 여러 가지 결함을 예방할 수 있다고 하였다.
나무의 건조는 속에 있는 수분이 표면으로 이동하여 수증기가 되어 대기 중으로 날아가면서 차츰 수분이 줄어드는 것인데 나무의 세포 구조가 복잡하므로 중요한 것은 판자가 휘거나 갈라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장경판 목재처럼 두껍고 넓은 판재는 아무 처리도 하지 않고 그대로 건조하면 속의 수분이 표면으로 제대로 이동하기도 전에 표면이 너무 빨리 건조되어 버림으로써 갈라지고 비틀어지기 쉽다. 이럴 경우에 소금물에 판자를 담궈 두었다가 건조하면 수분을 흡수하는 성질을 가진 소금기가 표면에 발라진 상태가 되어 약간씩 흡습하면서 건조되므로 비록 건조는 천천히 되나 결함이 없는 경판재를 얻을 수 있다. 오늘날에는 소금물이 쇠를 녹슬게 하는 철부식성(鐵腐蝕性)을 가지기 때문에 잘 사용하지 않으나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바둑판이나 다듬이판 등 두꺼운 나무를 오줌통이나 시궁창에 몇 년씩 담궈 두었다가 음지에서 건조하는 것도 모두 소금물처리의 한 방법이다.
실제로 통나무를 바닷물에 넣어둔 후 바닷물이 들어간 깊이를 조사해 보았더니 나무껍질 아래는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판자를 켜서 넣어둔 것도 1미리메타가 채 들어가지 않는다. 이와 같이 통나무 상태로는 수년간을 두어도 가운데의 심재까지 바닷물이 들어가기가 어렵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바닷물에 3년 담궜다는 이야기는 일부러 시간을 정해두고 반드시 시행한 경판제작의 필수 과정이 아니라 바다로 운반하게되면 자연스럽게 바닷물에 몇 년씩 담궈지는 현상을 두고 일컫는 말일 것이다. 경판재를 만들 통나무를 바닷물에 담그는 처리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만큼 큰 효과가 없고 오히려 바다 속에 오래 두면 바다나무좀 혹은 목선천공충 등의 해양생물에 의한 피해를 받기 쉽다.
따라서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로 통나무를 바닷물에 3년을 담구어 두었다는 것은 과학적인 아무런 근거도 없고 또 그렇게 반드시 해야할 필요도 없다. 다만 판자를 경판을 건조하기 전에 소금물에 삶았다는 이운지의 기록은 타당성이 있고 또 이 과정을 밟아야만 건조가 잘 되므로 필수과정이었을 것이다. 우리 나라는 위지 동이전이나 삼국사기에 기록이 나올 만큼 옛부터 삼베를 짜는 기술이 발달하였으므로 이때 사용하던 삶음 장치를 이용하면 판자를 소금물에 삶는 일은 손쉽게 할 수 있고 바닷가가 아닌 내륙 지방에서도 소금물의 반복사용이 가능하여 삶은 작업에 어려움이 없다. 특히 경판을 제작하기 위하여 산벚나무나 돌배나무 판자를 만들 때 처음 두께는 5센티미터 정도이므로 이렇게 두꺼운 판자라면 오늘날 최신 기기를 사용한 인공증기건조(人工蒸氣乾燥)를 하더라도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자칫하면 판자가 갈라지고 비틀어져 못쓰게 되기가 십상이다.
이외에도 판자를 삶는 처리는 나무의 진을 빼고 판자내의 수분분포를 균일하게 하며 나무결을 부드럽게 하여 글자를 새기기 쉽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 아울러서 숨어있던 벌레 알들이 경판을 새긴 후 애벌레가 되어 경판을 파먹는 불경스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효과도 겸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통나무를 바닷물에 3년 담궈 두었다는 구전은 경판 제작과정의 필수요건은 아니고 운반과 보관과정에 자연스럽게 있는 일상의 과정이었을 따름이고 기간이 3년이라는 것도 별 의미가 없다. 그러나 경판을 만들 판자는 경판재가 휘거나 갈라지지 않고 충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반드시 소금물에 삶아서 사용하였을 것이다
건조(乾燥)의 실제
경판재를 소금물에 삶고 찌는 것은 모두 부처님의 말씀을 새길 판자가 갈라지거나 비틀어짐이 없이 잘 건조시키기 위함이다.
나무는 여러 종류의 세포가 복잡하게 배열되어 있으며 또한 많은 물을 가지고 있으므로 건조하는 일이 단순하지 않으며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가구나 여러 가지 나무제품을 만드는 데도 건조가 가장 어려운 공정 중의 하나이다.
소금물에 삶는 등 온갖 정성을 들인 경판용 판자는 여전히 너무 두꺼워서 그대로 건조하면 갈라지고 휘어져서 못쓰게 되기 쉬우므로 또 다른 추가처리가 필요하다. 판자의 양끝에 두껍게 풀칠을 하고 한지를 붙여 두는 것인데 이는 나무가 섬유방향으로 수분이 너무 빨리 이동되어 방향간에 불균형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오늘날 엔드코팅(end coating)이라 하여 두껍고 건조가 어려운 귀중한 목재의 횡단면에 방수페인트를 칠하는 원리와 마찬가지이다.
다음은 약간 높은 곳에 배수가 잘되고 바람이 잘 통하는 사방이 툭 터진 오늘날의 강당 같은 넓고 비를 피할 수 있는 건물이 필요하다. 제법 규모를 갖춘 사찰이라면 선원(禪院)을 비롯하여 적당한 건물은 있었을 것이고 그도 저도 없다면 경판재 건조를 위한 가건물을 지어야 한다. 바닥에 받침목을 두 개 놓고, 가로로 경판판자를 받침목 길이 만큼 십여 장 정도 놓는다. 그 위에 다시 받침목을 나란히 놓고 판자를 얹은 작업을 반복하여 취급하기 쉽도록 높이가 1∼2미터정도 되게 한다. 마지막 판자의 위에는 경판판자가 휘거나 틀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혹시라도 돌풍에 넘어가지 않도록 무거운 돌을 얹어두고 새끼줄로 묶어둔다. 그 외에도 井자로 쌓거나 세워쌓기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건조하였을 것이다.
판자더미의 가장자리에 있는 판자가 훨씬 빨리 건조되므로 며칠만에 한 번씩 판자더미를 풀어 위치를 바꾸어 가면서 건조를 계속한다. 나무의 종류에 따라 기간은 다르나 산벚나무나 돌배나무라면 약 1년 정도 온갖 정성을 쏟아야만 적당히 건조되어 경판을 새기기에 알맞은 판자가 얻어진다.
이상의 건조과정은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나무를 다루는 고도의 기술이 없으면 건조에 실패하여 고생스럽게 베어온 나무를 쓰지도 못하고 내버려야 한다. 다행히도 우리의 선조 들은 멀리 삼국시대부터 자단(紫檀)이나 침향(沈香) 등 고급나무도 잘 사용하여온 기록에서 보듯이 아주 훌륭한 건조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경판제작 과정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건조기술은 차츰 발달하였을 것이다.
판자다듬기
이제 바로 경판을 새길 수 있는 판자다듬기에 들어가야 한다. 먹물을 튀기고 한 장 한 장 길이를 정하여 마구리에 들어갈 네 귀퉁이 부분을 크기에 맞추어 작은 톱으로 잘라낸다. 다음은 정해진 두께에 맞게 깎아내는 작업이다. 자귀로 대체적인 작업을 한 뒤 대패로 정밀하게 정해진 두께까지 조심스럽게 마무리를 하였을 것이다. 한쪽 면만 새겨진 경판의 경우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은 뒷면은 자귀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서 이런 과정을 거쳤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감탄하는 것은 나무를 다루는 기술의 정밀성이다. 표4는 한 경판과 다른 경판간의 편차인데 경판 길이를 78센티미터로 만들겠다고 예정해 두고 실제 경판으로 만들어진 길이는 평균 77.8센티미터이고 그 편차는 0.2∼0.5센티미터이다. 너비는 길이에 상관없이 24센티미터를 예정하여 가공하였는데 편차는 0.1∼0.6센티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두께는 2.7∼2.9센티미터를 예정하고 가공하여 불과 0.03센티미터 이내의 편차밖에 없다. 또 경판내의 위치에 따른 두께의 경우는 두께의 편차는 1밀리미터 이하로서 더 더욱 우리를 놀라게 한다. 두께를 조정하는 것은 대패를 이용하는 기술에 의하여 결정되는 데 이런 편차라면 그야 말로 신의 손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오늘날 컴퓨터로 조작되는 자동대패기에서도 이런 편차라면 우수한 성능의 기계라고 할 수 있으니 우리 선조 들이 나무를 다루는 솜씨에 다시 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표 1. 경판재 마무리가공의 치수편차
마무리 경판길이 |
길이(cm) |
너비(cm) |
두께 (mm) |
78cm |
77.8±0.3 |
24.5±0.3 |
272±3 |
68cm |
67.8±0.2 |
23.7±0.2 |
291±2 |
70cm |
70.4±0.5 |
24.3±0.6 |
293±3 |
72cm |
72.5±0.2 |
24.4±0.1 |
292±1 |
다음은 마구리를 만드는 작업이다. 경판목재는 손으로 제재해야하는 특성상 판자는 나이테가 너비방향에 길게 들어가는 널결(널빤지에 U자 혹은 V자로 나타나는 나이테모양) 판자일 수밖에 없다. 널결 판자는 곧은결 판자에 비하여 휘고 갈라지기 쉽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건조해야함은 물론 기계적으로 휨을 방지할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 마구리재는 경판을 만들기 위하여 켠 판자 중 가운데 수심이 들어있어서 경판재로 쓸 수 없는 판자를 사용하였다. 길이는 경판의 너비와 거의 같거나 경판 너비 보다 약 0.5밀리미터 정도 살짝 나오게 정확하게 맞추었다. 마구리의 네 귀퉁이를 조금 깎아내어 전체적인 모양은 긴 팔면체이다. 가운데는 끌로 깊이 2.5∼3.0센티미터, 너비 1.5∼2.0센티미터의 홈을 파내어 경판몸체와 암수가 꼭 맞게 하였다. 또 지름 5밀리미터 정도의 원형 혹은 4각형의 나무못을 마구리의 아래 위 두 군데에 박아 넣어 경판 몸체가 빠져 나오지 않도록 견고하게 고정하였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마구리와 경판사이에는 얇은 금속판, 즉 금구(金具)로 다시 연결하였다. 금구는 구리, 철, 구리계열 합금 등 다양한 금속이 상용된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최근의 조사결과 순도 97∼99%에 이르는 순수 동판(銅板)을 사용한 금속판도 있다고 한다. 두께 1∼2밀리미터, 길이 15∼20센티미터, 너비 2∼2.6센티미터 크기로서 모양은 T자형 및 一자형이다. 경판과 마구리를 금구로 감싸고 적게는 5개 많게는 10개 이상의 쇠못으로 단단히 고정하였다.
쇠못은 근세에 만들어진 기계 못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어서 금구의 제작은 경판을 새길 당시에 한 것이 아니고 조선조 고종 때 경판을 수리하면서 만들었다는 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경판마다 너무 완벽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모두가 고종 때의 금구라고 단정하기는 어렵고 사용 금속의 성분분석 등 과학적인 조사가 이어져야 할 것이다.
경판새김
이제까지의 공정으로 경판을 새길 준비는 다 되었다. 다음은 수기대사가 엄밀하고 정성스럽게 교정한 판하본(板下本)을 받아다가 준비된 경판판자 위에다 고루 풀칠을 하고 붙이는 일이다. 인쇄할 때 글자가 바로 찍히도록 하기 위하여 글자가 쓰진 면이 판자 쪽에 가도록 뒤집어 붙이고, 위에다 다시 한번 풀칠을 하여 말린다. 완전히 마르면 하얗게 되어 판하본의 글씨가 잘 보이지 않으므로 경판을 새기기 바로 전에 식물성 기름을 얇게 바르고 바로 경판새김에 들어간다.
새김의 과정이야말로 경판제작의 마지막 단계이며 가장 중요한 공정이다. 아무리 벌채에서 건조, 판자다듬기까지가 완벽하였더라도 640여 자의 글자중 한 자로도 잘못 새기면 그야말로 나무아미타불을 외쳐야 할만큼 온갖 정성을 쏟아야 한다. 한 자 새기고 한번씩 합장하였다고 전해지는데 한 획 한 획에 지극한 믿음의 혼을 불어 넣어야하는 인고의 작업이었다. 실제로 글자를 새기는 각수(刻手)는 많은 경험을 가진 노련하고 숙련된 솜씨를 가진 장인이 아니면 안 된다.
그래서 경판을 새기는 과정은 분업상태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즉 허드렛일을 하고 판하본을 붙이는 보조원, 행과 행 사이의 넓은 공간을 파내는 초보각수, 획이나 빗침부분를 제외한 글자와 글자 사이를 깎아내는 반 숙련각수, 마지막으로 판하본 그대로 목판에 직접 새기는 장인의 단계별로 나누어 이루어졌을 것이다.
달인의 경지에 이른 장인이 하루에 새길 수 있는 글자 수는 얼마나 될까?. 요즈음 서각(書刻)을 전문으로 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 사람이 적게는 하루 30자 많이 잡아도 50자라고 한다. 경판 한 장을 새기는 데 13일에서 21일이 필요한 셈이다. 또 하루 새길 수 있는 글자 수를 평균 40자로 잡아 전체 대장경판 글자 수 5천2백여 만 자로 나누어 동원된 장인의 연인원을 알아보면 약 백3십1만여 명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실제로 새긴 기간이 12년간이니 연간으로 따져 11만 명의 연인원이 필요하나 연도별 새긴 경판의 매수가 일정하지 않으니 많은 해는 수십만 명의 장인이 동원되어야 한다. 따라서 장인 수만 따져도 하루에 적게는 3백 명에서 많게는 천명 이상이 동원되어야만 한다. 여기에 보조원과 미숙련 각수들까지 포함하면 경판을 새기는 데 필요한 인원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다.
팔만대장경판에 새겨진 글자의 모양을 보면 수많은 경판의 글씨체가 마치 한 사람이 새긴 것처럼 거의 동일하다. 글자를 새기는 데도 엄청난 노력과 인원이 필요하겠지만 글씨를 동일하게 쓰는 것도 대단한 정성이 깃들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인쇄술이 일반화되지 않은 시기라서 사경(寫經-손으로 경을 옮겨 쓰는 일)이 매우 발달되어 있었다한다. 풍부한 사경 인원 중에서 대장경판 사경의 장인을 선발하여 구양순(歐陽詢, 557∼641) 필체로 마치 한 사람이 쓴 듯이 거의 통일될 때까지 일정기간 동안 필체교정교육을 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글씨가 하도 아름다워 조선시대의 명필 추사 김정희선생도 이 글씨를 보고 {이는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마치 신선이 내려와서 쓴 것 같다}고 감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잘못 새긴 글자의 처리
팔만대장경판 한 장에 새겨진 글자는 앞뒷면 합쳐서 640여 자나 되므로 새겨나가는 과정에 정신통일을 하지 않으며 아차! 하는 순간에 획이 하나 날아가 버린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글자 한 자 새기고 합장 한번 하였다고 하며 지극한 신앙심과 정성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이 완벽한 대장경판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는 일이다. 아무리 조심을 하더라도 실수는 있게 마련이고 대장경판에는 그 흔적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가끔 볼 수 있다. 경판을 조사하는 과정 중 너무 완벽함만을 듣고 보아온 팔만대장경판에서 이런 실수를 만나는 것은 오직 믿는 마음으로 뭉쳐있는 고려인의 인간적인 면을 엿보는 것 같아 오히려 반갑기까지 하였다.
잘못 판각한 글자는 두 가지 방법으로 수리하였다. 첫째는 틀린 글자를 口자로 오려내고 다른 나무에 바른 글자를 새겨서 맞추어 넣은 방식이다. 오려낸 깊이가 깊지 않으면 뒷면에 아교를 발라 붙였는데 부분적으로 떨어져 있는 경우도 있다. 다른 방법은 틀린 글자의 행이 있는 나머지 부분을 U자형으로 길게 모두 오려내고 새로 새긴 행을 너비방향에서 밀어 넣은 방식이다. 두 방식 모두 경판을 왠만큼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아서는 찾아 낼 수 없을 정도로 짜맞춤이 너무나 치밀하다.
옻칠
옻은 옻나무, 개옻나무, 검양옻나무 등 옻나무과 옻나무속이라는 무리에 들어가는 나무에서 채취하는 우루시올(Urushiol)이라는 페놀성물질을 주성분으로 하는 도료(塗料)인데 질 좋은 많은 양의 옻을 채취하는데는 역시 옻나무라야 한다. 옻은 역사 이전부터 사용되었다 하며 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인 낙랑고분의 관재(棺材), 공주의 무령왕릉 관재 및 우리 나라 여기저기서 출토되는 칠기 등 광범위하게 이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옻칠은 여러 가지 안료(顔料)를 섞어 표면을 아름답게 함은 물론 방습성(防濕性)과 아울러 썩지 않고 벌레가 침입하지 못하는 우수한 도장(塗裝)재료이다.
팔만대장경판에는 일부 경판이 옻칠이 되어 있다. 일부라고 한 것은 경판의 글자를 새기지 않은 외곽부에 육안으로 명확하게 옻칠이 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경판도 있으나 대부분의 경판은 인쇄할 때 사용한 먹이 두꺼운 층을 형성하고 있어서 옻칠의 유무를 단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옻칠은 주로 글자새김이 있는 바깥 외곽부에 되어 있다. 마구리는 옻칠을 하지 않았으며 할 필요도 없다. 글자가 새겨진 부분은 확인에 어려움이 있으나 대부분 옻칠이 안된 것으로 보인다. 경판 중에는 글자의 표면이 유난히 매끄러운 경판이 있어서 어떤 분들은 글자 부분에도 옻칠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글자 부분에 옻칠을 하면 나무세포의 미세한 틈새기까지도 막아버려 먹물이 나무의 글자부분에 잘 묻지 않아 오히려 인쇄할 때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옻은 여과와 탈수 등 기본적인 정제만 한 생옻을 사용하여 2∼3회 도포하였고 칠의 두께는 0.06밀리미터 정도이었다. 일반 옻칠과는 달리 몇 경판을 제외하고는 안료를 섞지 않아 색깔로 옻칠유무를 확인하기 어렵다. 옻칠된 부분을 현미경으로 검사 해보면 목질부와 옻칠사이에 먹층이 들어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경판을 새긴 다음 여러 번의 인쇄를 한 후에 옻칠을 한 것임을 의미한다. 옻칠공정에서 바탕을 고르게 해주는 눈막이란 공정이 있는데 몇 번 인쇄를 하면 먹물에 섞여있는 미세한 돌가루가 이런 과정을 자연스럽게 대신해 주는 역할도 하게 된다.
해인사 고문서인 이거인의 개간인유에 {거제도에서 경판을 만들어 금으로 장식하여 옻칠을 하고 해인사에 옮긴 다음 십이경찬법회(十二慶讚法會)를 열었다.}내용이 있어 옛날에 경판을 새기면 옻칠을 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팔만대장경판의 경우 방대한 양의 경판을 한꺼번에 모두 옻칠하려면 엄청난 양의 옻이 있어야 하므로 경판을 새기는 일 만으로도 힘들었던 경판 제작기간에는 바로 옻칠을 할 수 없어서 경판을 제작하여 사용하면서 필요한 경판만 골라서 옻칠을 한 것 같다. 모든 경판에 옻칠을 하지 않더라도 나무라는 재료의 특성상 수분관리만 잘해주면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경판전 건물은 이런 의미에서는 대단히 효과적인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