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로 본 고려대장경판의 판각지 고찰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박상진
13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고려대장경판은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81,258장이라는 엄청난 규모에 비하여 판각장소를 비롯한 관련 기록이 너무 부족한 탓이다. 다행히 경판 자체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이를 대상으로 과학적인 분석을 하면 미비한 기록을 보완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필자는 경판을 만드는데 쓰인 나무의 종류를 비롯한 재질분석으로 고려대장경판에서 얻은 몇 가지 새로운 결과를 소개하고자 한다.
1. 고려대장경판의 개요
고려대장경판은 약 5천2백만 자의 글자가 새겨진 81,258장의 나무판이다. 경판 한 장에는 앞뒤로 약 640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양옆에는 마구리(손잡이)가 붙어있다. 경판 길이는 68cm 혹은 78cm가 대부분이며 너비 24cm, 두께 약2.8cm, 무게 3.4㎏전후다. 전체 무게는 약 280톤, 4톤 트럭에 싣는 다면 70대 분량이다. 부피는 약 450m3이다.
2. 경판 새김에 쓰인 나무
고려대장경판을 만든 나무는 지금까지 자작나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필자가 2백여 장의 경판에서 극소량의 표본을 수집하여 현미경으로 분석한 결과 자작나무는 검출되지 않았다. 옛날에는 산벚나무나 자작나무를 모두 ‘화(樺)’란 같은 글자로 표기하였으므로 실제는 산벚나무 임에도 자작나무로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경판을 만든 나무는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 대부분이며 거제수나무, 층층나무, 고로쇠나무, 후박나무, 사시나무의 순서였다.
수종 |
수량(장) |
비율(%) |
산벚나무 |
135 |
64 |
돌배나무 |
32 |
15 |
거제수나무 |
18 |
9 |
층층나무 |
12 |
6 |
고로쇠나무 |
6 |
3 |
후박나무 |
5 |
2 |
사시나무 |
1 |
1 |
계 |
209 |
100 |
산벚나무
팔만대장경판에 쓰인 나무의 약 2/3는 산벚나무다. 전국 어디에나 자라며 비중이 0.6 정도로 너무 단단하지도 무르지도 않아 경판을 새기기에 아주 적당하다. 그 외 산벚나무를 많이 사용한 다른 이유가 있다. 나무줄기의 피목皮目이 약간 진한 적갈색을 띠고 가로로 짧게 혹은 길게 분포하여 멀리서도 다른 나무와 쉽게 구별하여 찾아낼 수 있다. 몽고군이 나라를 점령하고 있던 당시에 몰래 한 나무씩 베어 나오기에도 알맞다. 또 이른 봄에 분홍빛 꽃을 잔뜩 피우므로 멀리서도 다른 나무와 구별하여 찾아낼 수 있는 것도 선택받은 이유다.
돌배나무
두 번째로 많이 쓰인 나무는 약 14%의 돌배나무다. 거의 전국에 걸쳐 자라며 높이 10여m에 아름드리로 자라는 나무다. 산벚나무보다 구하기가 어렵고 나무의 굵기도 약간 가늘어 대장경판의 재료로 산벚나무만큼 많이 쓰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거제수나무
거제수나무는 높은 산에 자라며 대부분 표고 600~1,000m에 주로 자란다. 식물학적으로는 자작나무과(科) 자작나무속(屬)에 들어가며 자작나무와 생김새가 비슷하여 혼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후박나무
경판을 어디서 새긴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는 현실에서 후박나무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자라는 곳이 남해안이나 다도해의 섬 지방, 제주도에 걸쳐 있어서다.
기타 대장경판을 만드는 데 사용한 나무에는 층층나무, 고로쇠나무, 사시나무 등이 들어 있다.
3. 나무로 본 새김 장소
고려대장경판 관련 믿을 만한 기록은 다음 셋이다. ≪고려사≫ 에는 1251년 임금은 초조대장경판이 불타버린 후 16년간에 걸쳐 경판을 다시 새겼다.“ 고 했다. 150쯤 지난 1398년 5월 10~12일 ≪조선왕조실록≫ 에는 “임금이 한강에 행차하여 강화도 선원사로부터 대장경을 가져오는 것을 참관했다.” 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어디로 옮겼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이어서 다음해인 1399년 1월9일 “해인사에서 대장경을 인쇄하였다.” 는 것이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대장경판은 ‘1236~1251년의 16년에 걸쳐 강화도에서 새겨서 보관하고 있다가 1398년 해인사로 옮겼다고 지금까지 알려져 있다. 이 학설에 대하여 경판에 사용된 나무의 재질 분석을 바탕으로 새김 장소가 어디인지를 재검토해본다.
첫째, 경판의 표면 상태가 너무 완벽하여 강화도에서 서울을 거쳐 해인사까지 400km가 넘는 먼 거리를 옮길 때 생길 수 있는 마모 흔적을 비롯한 아무런 흠도 찾을 수 없는 점이다. 육안으로 보아 마모된 흔적이 전혀 없고 글자의 획 하나 떨어진 곳이 없다. 경판의 표면을 현미경으로 보면 작은 골이 수없이 져 있는 요철凹凸이다. 여기에 정밀하게 글자까지 새겨져 있으니 조금이라도 서로 닿아 흔들리면 나무 세포가 떨어져 나간 흔적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흠이 없다는 것은 가까운 거리에서 경판을 새겨서 바로 보관했을 때만 가능하다.
둘째, 경판 나무에 거제수나무가 들어 있는 점은 새김 장소를 찾는 중요한 실마리다. 거제수나무는 주로 해발 600~1,000m 사이의 고산에서 자란다. 그래서 거제수나무는 먼 곳에서 일부러 가져다 경판 나무로 이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른 나무를 비교적 손쉽게 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높은 산에 자라는 거제수나무를 어렵게 베어다 쓸 특별한 이유가 없어서다. 그런데 해인사 인근에는 질 좋은 거제수나무가 흔히 자란다. 따라서 팔만대장경판에 거제수나무가 일부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해인사 주위에서 벤 거제수나무를 사용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셋째, 경판을 만든 나무의 대부분인 산벚나무와 돌배나무는 식물학적으로 전국 어디에나 자랄 수 있는 나무다. 하지만 실제로 나무가 벌채된 곳은 남해안 섬과 경남과 전남 일대의 남부 지방이라고 본다. 후박나무 등 따뜻한 남쪽에 자라는 나무가 포함되어 있고 수운을 주로 이용하는 당시의 운반 수단을 생각해 본다면 전쟁 상황에서 비교적 몽고군의 영향을 덜 받은 남해안이라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거제도․남해도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그곳에서 나무를 베어 조경판(粗經板)을 만든 후 해인사 및 그 인근으로 추정되는 새김 장소로 옮기면 된다.
이상 경판의 재질을 중심으로 검토해본 결과 새김 장소가 강화도라는 지금까지의 학설에 동의하기 어렵다. 새김 장소는 해인사 자체 및 인근 지역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더 범위를 넓혀서 검토하면, 거제도 및 남해도를 포함한 남부 섬지방도 일부 새김 장소로 추정할 수 있다.
4. 경판 관련 구전(口傳)의 재검토
경판 제작에 관련된 기록이 거의 없으므로 구전으로 알려진 이야기가 많다. 중요한 몇 가지만 사실여부를 검토해 본다.
판전 건물의 밑바닥에는 숯이 묻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숯이 들어있지 않으며 해인사 주변의 사질양토 그대로다. 배수가 잘 되는 경사지에 위치한 판전 바닥에 구태여 숯을 넣지 않아도 수분조절에 문제가 없다.
경판의 극히 일부는 옻칠이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은 경판이 760년 동안 보존될 수 있는 이유가 옻칠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경판 모두가 옻칠이 된 것도 아니고, 통풍이 잘 되는 건조한 곳에 보관된 경판은 옻칠을 하지 않아도 보존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 경판의 현재 함수율은 15% 정도인데, 이런 상태에서는 옻칠을 하지 않아도 나무가 썩을 염려는 없다.
또 통나무를 베어 바닷물에 3년을 담가두었다가 경판을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바닷물의 염분농도는 3.5%에 불과하여 썩음을 막고 벌레가 덤비지 않게 하는 효과는 그렇게 크지 않다. 경판 제작 과정 중 운반과 보관 및 취급 편의를 위해 바닷물에 담글 수는 있었지만 꼭 필요한 조치는 아니었다.